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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그레이 May 20. 2024

초등학생, 빌런 vs 빌런

9화 잠자는 빌런의 코털을 건드린 자...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중요한 시점이 다가왔다.

입학식 날 아침, 어머니는 나를 연기자 오디션에 보내듯 유난을 떨며 분주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머리카락을 롤빵처럼 동그랗게 말아 올려 고정했다. 머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목폴라 티의 목 부분을 조심스레 늘려 입히고, 흰색 면 스타킹도 신겨 주었다. 그 위에 성인의 정장을 본뜬 듯한 분홍색 치마와 재킷을 입었는데, 그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학교로 향하는 길, 스타킹의 조이는 느낌이 너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계속 스타킹을 잡아당기며, 방금 포경수술을 받은 남자애처럼 엉성하게 걸었다. 어머니는 애써 꾸며놓은 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똑바로 걸으라 핀잔하면서 내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힘없이 흔들거리며 무력감을 느낀 나는 불편함을 참기 위해 보폭을 좁게 하여 총총총 걸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모진 바람에 맞서는 나뭇잎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초조했다.


학교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단지 소음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말을 걸면, 덜떨어진 사람처럼 웃기만 했다. 난 마치 기계처럼 행동했다. 등교하여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때 되면 밥 먹고, 끝나면 집에 갔다. 글쎄, 무슨 생각을 하긴 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 같은 건 없었으며, 그런 관계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 내게 가족 이외에는 그 어떤 누구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다른 아이들이 나를 놀리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활짝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 — 그런 웃음은 민망함의 표현이었을까? 먹이사슬의 아래층에서 생존하려는 비굴한 아부였을까? 견디기 힘든 현실을 가볍게 치부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을까? 복잡한 감정을 웃음으로 덮어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여느 때와 같이 하교하려던 내게, 조금은 신경 쓰이는 사건이 생긴다. 실내화를 챙기고, 운동화로 갈아 신기 위해 수그렸을 때였다.


 『야, 니네 엄마 코끼리 같애.』 같은 반 남자아이가 다가와 속삭였다. 평소에 나의 시선은 대부분 땅을 향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구부린 허리를 펴고 빳빳이 서서,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내 안에 정체 모를 무언가가 뒤섞이고 있었다. 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릴 적 만난 요크셔테리어가 떠올랐다. 작은 개들은 왕왕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을 향해 짖는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조각 날 입술을 주시했다. 한 번만 더 열었다간,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을 주변의 온기로 경고했다. 그는 평소와 다른 나의 반응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히죽거렸다. 『네 엄마 다리, 코끼리 다리.』 그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나는 화가 나 콧잔등을 찡긋하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실내화 주머니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가, 그의 얼굴에 내리쳤다. —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찰나에, 세게 얻어맞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곧장 입술에서 피가 흘렀고,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나자빠졌다. 이 모든 변화가 느린 동작처럼 보였다.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 내 울자, 나의 시각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바나의 코끼리를 군림할 듯한 재간과 기세는 어디 가고, 움츠러든 그의 모습은 마치 적의 대전차 앞에서 무릎 꿇은 패잔병 같았다. 사실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고, 그저 비굴해 보였다. 설움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그를 보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실내화 주머니에 피가 묻었는지만 살펴본 뒤 탁탁 털고 돌아섰다.


그날 저녁, 그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는 그들이 실제로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허리를 여러 번 굽혀 가며 사죄했다. 통화가 끝나자 어머니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나무 빗자루를 들고 나를 빨랫감처럼 두들겨 팼다. 볼기짝이 전부 부르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나를 무릎 꿇리고, 빗자루 끝으로 입 주변을 푹푹 찔렀다.

『이런 쌍년아 네 입도 똑같이 찢어줄까?』

참으로 오싹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들이마신 숨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나를 깨워 약을 발라주었다. 그녀의 손이 지날 때마다 쓰라렸다. 약을 바르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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