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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으로 나아가려다 주춤 뒷걸음을 친다
차가운 시간을 뜨겁게 보내고 차마 내던지지 못하고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비를 선택해
하늘은 눈물을 내리기로 한다 비를 흘리는 걸 보니
빗줄기의 개수는 무수한 눈의 개수로 보는 게 옳다
비가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지켜보는 눈은
지상보다 천상에 더 많구나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 슬쩍 고개를 쳐든 이유이고
부끄러운 때에 정수리가 따끔한 것도 다 이래서다
그러고 보면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함이 아니라 고이 받아 담는 기능으로 도구 삼는다
세상에 흘리는 빗물을 닦아줄 손수건은 없으니까
십시일반 서로가 둥그런 손수건 같은 우산으로 훔치는 것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후련해진 기분마저 든다
비는 하늘이 흘리는데
카타르시스는 내가 느끼고
인색하고 야박한 이 세상에 하나쯤은 나 대신 해주는 무언가가 있음은 이토록 참 다행스럽다
비는 非
자꾸 아니 아니 아니야 라고 말한다
비는 悲
내리는 자태만으로도 유독 슬프다
비는 比
지난 나와 지금 나를 견주게 한다
비는 卑
낮아지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게 만든다
비는 鼻
노출되는 순간 코 끝에는 비를 만난 냄새가 묻는다
비는 翡
사나운 때에는 물총새가 되어 나타난다
비는 妃 匕 碑
왕비의 비수가 되어 비석에 새겨진다 오래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