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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Jul 22. 2020

강렬했던 예능 출연의 기억과 유느님의 은총

예능은 너무 어려워서 마이 아파

*아나운서 파헤치기. <김나진 아나운서의 마.이.아.파.>는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마음껏, 이토록 자세히,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한번, 파헤쳐봅니다! 아나운서 하면서 그동안 마.이.아.파.왔거든요^^*


1편 <아나운서요?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죠?>

2편 <아나운서의 고용 형태는? 연봉은?>

3편 아나운서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 발음? 발성? 애드리브?

4편 <라디오 DJ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5편 <아나운서 되려면 무슨 과를 나와야 하나요?>

6편 <세상의 모든 것을 배우는 직업, 리포터>

7편 <아나운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예능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아....... 기가 빨린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집에 가고 싶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예능인들은 대단한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또한 10시간도 넘게 진행되는 녹화 현장과 백 명에 육박하는 스태프들의 노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놀라움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13년 동안 예능과는 거리가 먼 커리어를 쌓아갔다. 하지만 아나운서 생활을 하다 보면 나처럼 예능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도 몇 번쯤 예능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주로 스포츠 캐스터로서 경력을 쌓아온 나는 <무한도전>, <아이돌 육상 선수권 대회> 같은 MBC 대표 예능프로그램에 캐스터로 섭외돼 함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필 <무한도전>은 마지막 방송 아이템의 녹화를 함께했다. 우리나라 예능을 10년 넘게 주름잡아온 <무한도전>의 섭외를 받은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는데 그 대미를 장식하던 순간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유재석, 박명수, 양세형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예능인들이 눈앞에서 보여주는 상황극, 즉석극들은 (이런 걸 방송계에서는 '시바이'라는 일본어를 사용하지만, 순화돼야 할 말 중의 하나이기에 이렇게 표현해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유느님은 출연자 각각의 개성과 행동을 기가 막히게 짚어냈다. 무미건조한 상황에서도 재미를 어떻게든 발견했으며 사람의 개성을 끌어냈다. 당시 아이템은 평창동계올림픽 은메달 스타, 컬링 국가대표 팀 킴과 <무한도전> 멤버가 함께하는 컬링 도전기였는데, 예능 프로그램이 처음이던 국가대표 선수들을 허물없이 대하고 웃음 포인트를 찾아내며 녹화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왜 유느님, 유느님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이 바로 예능인들의 전문성이 아닐까 싶었다. 쉽게 표현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노는 사람들이 바로 예능인들인데, 그 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터라 더욱 놀라웠다.

 

 예전 유느님이 <무한도전>에서 게스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놀긴 노는데 그냥 노는 게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엄청나게 재밌게 놀아야 한다. 지치면 안 된다. 끊임없이 재미를 찾아내야 한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날 알 수 있었다.

 나는 촬영 현장에 오후 4시쯤 도착했다. 의성 컬링장에 도착하니 이미 촬영은 아침부터 시작돼 있었다. 내가 도착한 이후에도 녹화는 멈출 줄 몰랐다. 잠시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며 무엇이든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저녁 9시 즈음 주변 음식점들의 문이 닫히기 전에 <무한도전> 멤버들과 늦은 저녁을 함께했다. TV에서 말고 처음 만나 뵙는 멤버들은 나를 한없이 편하게 대해주었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해 보였다.

 잠깐의 휴식 후 촬영은 다시 끝없이 이어졌다. 자정을 훌쩍 넘기고 새벽 3시쯤 됐을까. 그제야 모든 촬영이 종료되고,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김태호 피디와 함께 회사로 돌아갔다. 서울로 올라가는 2시간 넘는 시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뻗어버렸으니까.


 <아이돌 육상 선수권>도 마찬가지였다. 함께했던 전현무, 이특 같은 방송인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머릿속에 입력돼있는 아이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용해 즉석에서 수많은 상황극을 만들어냈다. 수백 명의 아이돌들이 어느 그룹에 속해있는지는 기본, 특성은 무엇인지 히트곡은 무엇인지 개인기는 뭐가 있는지 꿰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예능 <세 바퀴>에 출연했을 때도 김구라, 박미선 같은 예능인들의 진행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나로부터 쓸만한 대답을 이끌어내고, 재미없고 따분한 스타일인 내게서 웃음을 이끌어냈으니 말이다.


 언뜻 보기에 예능이라는 장르는 그저 그냥 가서 끼만 발휘하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참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기본 프로필을 넘어서는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 자신 또한 뛰어난 전문성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노는 전문성이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노래든 춤이든 성대모사든 뭔가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으로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확실히 예능은 DNA가 정말 중요한 거 같다. 지치지 않는 체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과 유쾌함, 재미라는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피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함부로 도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 누구든 예능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다면 단단히 각오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고 정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능은 참 어렵다. 예능이 어려워서 나도 참 마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아나운서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 중의 하나이자 자랑거리였던 그 날을 기록해본다. 하루는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유재석 형이 계셨다. 내가 인사를 하자 일단 인사를 받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던 유느님은 "나진이었구나! 마스크 하니 못 알아보겠네!"라고 말씀하셨다. "우와. 형님 잘 지내시죠?"라고 답하고 끝난 짧은 대화였지만 유느님의 전문성, 한두 번 본 사람이라도 이름까지 기억해내는 대단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시 유느님인가 보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 예능 현장에서 딱 한번 마주쳤던 유느님이 날 알아봐 주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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