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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진 Apr 20. 2020

사탕도 젤리도 없는 이곳

딸아, 너의 말로 아빠도 자란단다


"제주에는 사탕도 없고 젤리도 없고......."
  
 
"그래도 좋아. “
  
 

단 거 주세요!




  
딸에게 한없이 약한 아빠이기에

아이가 달라는 걸 원 없이 퍼주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되게 마음먹자고 다짐했지만

하연이가 울고 보채게 되면 조금 전의 결심 따위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울지 말라고 다독이며

어느덧 젤리를 건네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자연스레 하연이는 밥은 적게 먹으며 사탕이나 젤리 같은 단 음식을 많이 찾게 되었고,

상위 5%의 저체중 아이가 되었다.

하루 두 끼만 먹는 식습관이 당연해졌고

남은 한 끼는 밥 대신 가공식품들이 하연이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속이 상했다. 끊임없이 자책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하연이가 달라는 것들을 주지 않을 자신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절호의 찬스가 한번 찾아왔다.
  
바로 제주 보름 살기였다.
짧은 타지 살기를 준비하며

하연이의 식습관도 바꿔보자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제주 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하연이에게 거듭 설명을 해줬다.
  
“하연아 지금 가는 제주에는 사탕도 없고 젤리도 없어.

 그래서 맘마를 잘 먹어야 해.”
  
하연이는 도착 이후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인 듯했다.

종종 젤리를 달라고 했지만 다시 한번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젤리 없는 삶에 잘 적응하자

하연이는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간식도 서울에서와는 달리 까까가 아닌 예쁜 감귤을

먹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먹는 밥의 양이 눈에 띄게 늘었고

체중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이게 뭐라고 눈물 날 정도로 제주가 고마웠다.


그도 그럴 게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 많았고

서울보다 편의점의 수도 확연히 적었기에

하연이가 가공식품을 접할 기회 자체가 적었다.


마트에 갈 때도 젤리나 초콜릿 따위가 있는 칸은

의식적으로 피해서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게 했다.

서울 집에서는 가보지 못했던 낯선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봤기에 이곳엔 역시 젤리나 사탕이 없구나

인식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 생활이 열흘을 넘기고 있던 때였다.
우리 가족은 매일 그랬던 것처럼

바닷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미 찍을 만큼 찍었기에 그저 제주의 멋진 풍경을 눈에 담고, 바다의 바람을 즐기며,

맛있는 공기를 마시기 바빴다.
  
그러다 불쑥, 하연이가 말을 내뱉었다.


제주에는 사탕도 없고 젤리도 없고.......


“제주에는 사탕도 없고 젤리도 없고.......”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며 얘기한 이 말에

아내와 나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딸이 젤리 없는 현실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
33개월 된 아이가 열흘이 넘는 시간을 어떻게 참았을까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폭소를 거듭해 배가 아프다 못해 뭉쳐서 쥐가 나고,

실신해 바닥에 떼굴떼굴 정도로 한참을 웃고 나서야

하연이가 눈에 다시 들어왔다.


잠시 웃음기를 떠나보내곤 아직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에게 되물었다.
  
“하연아 그래서 싫어?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잠시 생각하던 하연이는 우리에게 답해주었다.
  
 “그래도 좋아.”
  
이 평범한 대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제주 보름 살기 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뿌듯함이 밀려왔다.
  
하연이가 그토록 사랑하던 젤리를 잊게 할 정도로 좋았던 제주의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감사했다.
아이 밥도 잘 안 챙기는 나쁜 엄마 아빠에서

조금은 해방된 거 같아서 더 감사했다.
  
그리곤 이제 한 달 살기를 계획하게 됐다.
무조건 가기로 했다.
하연이가 젤리보다 더 좋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p.s.


하연이는 결국 13일째에 초콜릿을 찾아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이틀 남았기에 장을 보면

음식을 많이 남길 것 같았기에 대부분을 사 먹었다.
사 먹지 못할 때는 소량의 먹거리가 필요했기에

대형 마트인 하나로 마트보다 편의점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긴장을 살짝 늦추고 말았다.
  
“우와! 여기 젤리가 있어! 아빠! 우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하연이의 모습을 보자

우리는 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부터 다시 시작된 하연이의 젤리 사랑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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