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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Sep 07. 2024

08. 대머리 뇌과학자

수현 (3)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립니다. 건물 옆 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대머리에 펑퍼짐한 옷을 입었습니다. 상하의 모두 회색이라, 승복 같기도 하고 현대식으로 개량된 일상 한복 같기도 합니다. 옷 자체는 이상하지만, 그에게 제법 잘 어울립니다. 그의 태도가 깍듯할뿐더러 속세와는 무관한 옷차림에 저도 모르게 공손하게 몸가짐을 하게 됩니다. 저는 얼른 인사를 하고, 남편의 소개 이야기를 합니다.


“네, 잘 오셨습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들어가서 천천히 말씀 나누시지요.”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공원 속의 대머리 신사라니, 제가 잘 찾아온 것이 맞는지 헷갈립니다.


“따라오시지요.”


그는 어둑한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갑니다. 옆으로는 나지막한 신발장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 위로 올라섭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는 양팔 너비만한 큰 문이 하나 보입니다. 그는 큰 문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꺾어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조촐한 공간입니다. 책상과 컴퓨터가 있고, 가운데에는 원형 탁자와 의자 세 개가 둘레에 놓여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다기가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자로 손짓합니다. 안내한 대로 자리에 앉자 그가 마주앉습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눈을 마주치고 말합니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을 잇습니다.


“그럼 이제, 간단히 소개를 해드려야겠군요. 명함을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며 답합니다. “예, 괜찮아요.”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잘 됐습니다. 곧 휴대폰 화면에 명함 전송 승인 안내가 왔습니다.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띱니다.


박연호.


이름만 얼른 확인하고 저도 명함을 전송합니다. 박 선생님의 명함을 자세히 확인하는 도중에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듭니다.


“저는 심리학 연구실에서 뇌과학 연구를 하는 박연호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방금 명함 보내드렸어요. 저는 수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김수현이라고 합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칩니다. 은미한 미소를 띱니다.


“어쩐지 눈에 익다 했습니다. 위상수학 전공이셨군요.”


“이쪽 분야도 아시나요?”


“조금 관심을 가지는 정도입니다. 지난주에 학회에도 다녀왔습니다. 김수현 선생님도 참석하시지 않으셨나요. 거기서 뵌 것 같기도 합니다.”


“네, 맞아요. 얼마 전에 참석했거든요.”


“인연이란 것이 참 신기합니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나 봅니다.”


같은 학회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박연호 선생님에게 친근감이 들어 저도 미소를 지어봅니다.


“뇌과학자이신데 그 학회는 어떻게……”


말을 뱉고 생각해보니 그 학회는 우주의 모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 학회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른 분께는 이런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게 뻔해서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김수현 선생님 같이 적절한 말상대를 마주하면 제 입이 간지러워 참기가 힘듭니다. 괜찮으시다면 짧게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옛날에 한 정신분석학자가 인간에게 속한 정신에 관하여서 수학적 개념의 일부 빌려와 표현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시도들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후로 취미 삼아 이쪽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분이 무슨 개념을 말씀하셨어요?”


“대수적인 부분도 있고, 다양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뫼비우스의 띠, 원환체, 크로스 캡, 보로메오 매듭,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는 저보다 선생님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위상수학에서 다루는 대상들이네요.”




“예,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것, 또는 대립되는 두 개념들이 사실 한데 섞여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뫼비우스 띠의 구조로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과 무의식 말입니다. 뫼비우스의 띠 한 가운데에 서 있다면 안과 밖이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실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지요. 뫼비우스의 띠는 면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면이지요. 기표와 기의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원환체를 가지고도 자신의 정신분석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정신분석을 공식화하기 위해 대수식을 사용한 부분입니다. 공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신분석도 과학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다. 이 말이 생각나네요.”


“딱 맞는 문장입니다. 수학은 과학이 되도록 권위를 부여해주는 셈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가우스가 한 말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그 정신분석학자는 집합론의 개념도…….” 박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끊고 환하게 웃습니다. “저도 모르게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습니다. 수학자 앞에서 수학을 설명하고 있다니, 창피할 따름입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나 다른 수학 개념들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갑자기 침묵합니다. 창을 통해 새 지저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옵니다. 저는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뗍니다.


“여기서는 새소리가 잘 들리네요.”


우리는 잠시 귀를 기울입니다. 새소리가 가시고 공간으로 다시 정적이 찾아옵니다.


“남편이 여기 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제가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요.”



저는 연구실로 오는 내내 심리 상담을 상상했습니다. 이 조용하고 좁은 공간에 앉아 차분한 대머리 신사에게 지난 일에 대해 얘기하고, 무슨 방식일지는 몰라도 마음을 모아 치유하고자 시도하는 것. 저는 우선 딸아이 이야기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과 없이 제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면 괜찮아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야기를 고백하기로 단단히 각오하고 왔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박연호 선생님과 짧게 대화를 한 것만으로도 그가 꽤나 괜찮은 사람인 듯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자, 그러면 서로 어색함도 풀었으니 천천히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저도 그를 따라 일어나 방을 나갑니다. 입구에서 보았던 큰 문을 열어 들어갔더니 황색 마룻바닥이 길게 닦여 있고, 줄을 맞춰 검파란 색의 방석이 펼쳐 있습니다. 대충 세어도 40개 정도는 됩니다. 조도는 어둑어둑합니다. 벽은 대나무로 짠 듯 밝은 색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습니다.


저는 박연호 선생님을 따라 방석 사이로 걸어 들어갑니다. 걸을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내부에 작게 울립니다. 천정 가운데에 난 둥그런 창으로는 볕이 들어와 어둑한 공간 중앙에 내립니다. 가장 안 쪽에는 약간 높은 평상 하나가 있습니다. 박 선생님은 곧장 평상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더니 바로 그 앞에 방석으로 저를 인도합니다. 저는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공간과 적막에 압도되어 소리를 죽여 말합니다.

“선생님, 여기는……?”


“이곳은 명상홀입니다. 저는 뇌과학 연구와 명상 지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대머리인 것이 이해가 됩니다. 저는 당황하여 답합니다.


“명상이요? 무슨 상담이 아니라요?”


“상담을 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면담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명상을 시작할 겁니다.”


“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네, 가장 편한 자세면 충분합니다.”


저는 엉겁결에 방석에 앉아 선생님을 올려다봅니다. 약간 겁이 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 제가 바보 같기도 하고, 자세한 얘기는 쏙 빼고 저를 보낸 남편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다짜고짜 명상을 시작하는 선생님도 이상하기만 합니다.


“좋습니다. 손도 편안하게 두시면 됩니다. 무릎 위나, 허벅지 위도 좋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편한 자세로.”


낯선 분위기에 휩싸인 채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간략한 주문을 따라 팔을 움직입니다. 무릎 위가 편할까. 허벅지 위가 편할까. 아니면 어디서 손을 모으는 것을 봤는데, 그렇게 해야 하나. 박 선생님은 저를 편안하고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자, 자세를 잡으셨으면 눈을 천천히 감습니다.”


눈을 감은 채로 괜히 불안해 눈알을 굴려봅니다. 초조한 기분이 들어 입술이 마릅니다. 입을 다시며 입술에 침을 묻혀봅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냥 눈을 뜰까.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까. 고민하는 사이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명상홀 안으로 맑고 깨끗한 싱잉볼의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집니다.






09. 떠난 사람들 _ 진영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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