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의 시작은 순두부였다
연꽃이 되고 싶은 사람
인생을 살며 나라는 꽃 한 송이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끝날 수 있다.
그래서 더 격렬하게 씨앗이 움트길 갈망하고, 필요보다 더 많은 물을 주면서 꽃이 만개하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속에서는 곪아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곪은 채 싹을 피워가는 꽃은 언젠가 썩어 문드러지게 되어있다. 그것이 인생에서는 번아웃이라 생각한다.
번아웃을 겪는 몇 년 동안 어린 시절의 나부터 지금의 나까지 되돌아보았고, 나라는 존재는 한 없이 나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타인의 나약함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을 때의 나는,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사람 혹은 힘든 시기를 넘기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정신력이 나약해서 그렇다며 마음속으로 힐난했었다. 그때는 나 역시도 언제든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자만과 오만에 잠식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강한 사람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나약하게 태어나서 점차 강해지는 것일까?
나의 삶을 돌아보니 쉽게 으깨지는 순두부에서 딱딱해진 두부로,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함부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고약한 취두부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번아웃을 만난 것이고.
나의 순두부 같은 자아는 언제부터였을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 그것이 나의 시작이었다.
1983년 태어나길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머리 양쪽에 뿔을 달고서.
어머니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산통을 느껴 기찻길 옆 셋방 살던 집으로 돌아왔고 주인집 할머니가 나를 받아줬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크게 울지도 않고 머리 양쪽에는 혹이 두 개가 나있었다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괴기한 아이의 모습에 두 사람은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서서 괴물을 낳은 것은 아닌가 놀랐다고 한다. 급히 병원비를 빌려 의사에게 찾아가 물어보니 "이 아이는 장차 크게 될 아이니 절대 나쁜 생각하지 말고 잘 키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작은 머리에 큰 혹이 두 개나 있는데 기형아라면 키울 엄두가 안 난다며 걱정을 토로했고, 의사는 "아기가 뱃속에서 많이 놀란 상태였던 것일 뿐 돌 전에는 다시 들어갈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라"라며 안심시켜 주어 일단 나를 버리지 않고 키우게 됐다고 한다. 다행히도 의사의 말처럼 두상의 혹은 1년 이내에 가라앉았고 그 뒤로 두상 양쪽은 평면처럼 납작하게 모양이 잡혀있다.
훗날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시며 임신 중 잦은 부부 싸움과 폭행으로 복중에서 많이 놀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것이 내가 진흙밭에 뿌려진 씨앗의 시초였다.
향냄새 가득했던 그곳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허름한 창고 건물 한편에 마련된 5평 남짓 쪽방에서 6명이 살았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으니 5명이 살았다고 해야겠다. 문을 열면 아궁이 주방을 지나 방이 있었는데, 마음이 힘들고 의지할 곳이 없었던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신당을 모셔두었고 항상 향냄새가 온 집안에 배어있었다.
어린 내가 보았던 방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장면이 평범하지는 않았던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노란 가방을 메고 병설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혼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 7살의 나.
여름에도 항상 얼굴은 터서 버짐을 달고 있었고, 소매에는 노란 콧물을 닦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시절 나의 별명은 '씩냉이'였다.(경상도 말로 씩냉이는 안 씻어서 더러운 아이에게 하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왜 나는 유치원을 안 보내주는지, 왜 우리는 먹을 것이 없는지"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이미 그 이유를 보고 있었으니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알았다.
나에게도 봄이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진흙밭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만나기만 하면 깨고 부수고, 욕하며 싸우던 부모님이 드디어 이혼을 결정하셨다.
12살 평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사실 나는 무수한 밤을 기도했었다. 제발 부모님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다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편부 편모의 이혼가정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무시가 심했던 시절임에도 나는 오히려 괜찮았다.
어머니는 홀로 사시면서 조금씩 세상 사는 것을 배우며 진정한 자립을 해나가셨고, 쪽방에 있을 때보다 더 당당하고 억세게 살아가실 수 있었다. 나는 친할머니댁에 맡겨졌기에 더 이상 공포에 떨며 힘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싸우던 사람이 안 싸우기란 어렵다. 그것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는 듯 눈만 마주쳐도 싸움이 난다.
그러니 눈을 안 마주치는 것이 해결책이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망가져 버린 관계, 이혼은 우리 모두에게 최선을 선택이었고, 두 분 역시 당신들의 선택에 후회 없이 살아가고 계신 듯하여 감사할 뿐이다.
순두부가 강해지기로 결심한 날
중학교 1학년 사춘기가 왔을 즈음, 존재 의미와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며 한 번의 일탈로 친구와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가출한 적이 있었다. 가출이라고 해봐야 집 바로 뒷골목에 있는 롤러스케이트장이었고, 낮은 담장을 넘어 컴컴한 롤러장 시멘트 바닥 위에 뭉쳐 앉아 추위에 떨며 새벽을 지새웠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싸늘한 새벽공기를 감당할 만큼 일탈이 좋지는 않았기에 아침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집에서는 내가 가출을 해도 관심이나 걱정해 줄 사람이 없었으니 귀가 후의 일상은 변함없을 것 같았으나, 학교에서는 달랐다. 학생주임은 학생들을 세워두고서 '가출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뺨을 내리쳤다. 본보기가 학생에게 모멸감과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주는 것으로 선도를 하는 것이었다면, 그래. 성공했다. 그때 나는 학생주임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나약한 나를 스스로를 보호하고, 이런 수모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선택을 하며 살아야겠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순두부 같은 내면을 숨기며 조금씩 강하게 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가까이하던 친구 몇몇과 소원해졌고, 운동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책으로 마음을 챙겼다.
갈라진 진흙밭 사이로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등 자기 계발서와 동기부여 책을 읽으며, 나처럼 힘들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멘토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 후 무난하게 원하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HR 회사에 취직하여 커리어 컨설턴트로 길을 걸었다.
새로운 도전 그리고 번아웃
7년 후 경력이 안정될 시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동안 꿈꾸던 대학원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세계적인 멘토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토익 200점대 수준의 영어 실력으로 워킹홀리데이부터 어학연수 프렙 과정을 거쳐 장학금을 받고 HRM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장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힘든 나날이었지만 앞만 보고 내달렸다. 이제 다 잘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안고 호주에서 취업을 준비했지만, 졸업 시점에 Covid-19가 시작되면서 면접 진행 중이던 곳에서 보류하였고, 국경 봉쇄와 사업 축소로 인해 채용 시장이 얼어버렸다. 1년 넘게 기다렸지만 경기 침체는 장기화 추세를 보였고, 힘든 목표를 수행하고 나서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허무함과 무기력이 밀려와 기운이 쭉 빠졌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꾹꾹 눌러두었던 순두부 같은 본모습이 다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사실 대학원을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시작되었던 무기력감과 우울감, 의욕 상실 등은 번아웃의 초기 증상이었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졸업 후 1년 넘게 HR분야에서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오가닉 푸드 공장에서 팩커로 일하고 있다는 것에서 성장보다 퇴보를, 자신감보다 자괴감이 커지면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갇히고 있었지만 무시했었다.
겉으로는 고고한 연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진흙밭 속에서는 뿌리까지 곪아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괜찮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했던 것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지쳐갈 즈음, 비행 편이 막힌다는 소식에 한국행을 선택했고, 돌아와서 활기차게 시작해 보자 했었지만 K-방역으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던 한국에서는 백신을 맞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다닐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백신을 맞는 대신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혼자 지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 후 정신의 문제는 육체로 이어져 면역력 저하로 대상포진, 알레르기, 안과 질환, 위장병 등으로 병원 다니기에 진을 뺐고, 차량 침수, 주식 폭락, 부동산 투자 실패 등 재정적 손실까지 겹치니 뭘 해도 안 되는 때인가 보다 하고 낙담하며 그렇게 나는 번아웃이라는 그림자 아래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2년의 세월을 홀로 은둔하게 되었다.
2019년부터 시작된 번아웃, 약 5년 동안 인생의 최저점을 혹은 그보다 더 깊이 생과 사를 생각하는 시점까지 오가면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부단히 찾으려 발버둥을 쳤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잡았던 '독서'라는 동아줄 덕분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힘든 일은 한 번만 오지 않는다.
그 빈도와 강도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역경은 오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그 역경을 이겨낼 만한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고난이 닥쳐올 때면 또다시 순두부 같은 모습을 덮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 있고, 오늘도 진흙밭에서 연꽃이 피어날 날을 기다리며 충실히 살아내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독서를 하며 블로그에 생각을 올리는 과정 동안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해 주는 것에 놀랐다. 그들의 공감과 댓글을 책에 대한 리뷰에 한정된 것이었을지라도, 나는 단절된 사회와 연결하며 다시 살아볼 이유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번아웃은 홀로 이겨낸 것이 아니라, 실상은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이겨낸 것이다.
그래서 글로 풀어내기로 했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누군가에게 한 순간이라도 힘이 된다면,
서로 에너지를 나누며 응원해 줄 수 있다면,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도 나비효과가 되어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사를 글로 풀어내기까지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지만, 긴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보고 알아갈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하였기에 그 과정도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후련했던 것은 "나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였고 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인생, 대단한 척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삶에 대한 부담도 덜해졌다.
이제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로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