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gs we watch] 이런 도서관이 있어 참 다행이다
[Things we watch]에서는 Play Fund가 흥미롭게 본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영화, 다큐멘터리나 책일 수도 있고 재밌게 들었던 팟캐스트, 영상 클립일 수도 있습니다. 콘텐츠를 보고 나서 꼭꼭 씹어 소화하고 싶고 콘텐츠에 대해 대화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뉴욕 공립 도서관 웹사이트,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홍보 사진, PBS Slide,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한 문장으로 미리 보기
도서관은 어떤 배움의 공간이어얄지 정답은 없지만 정답지에 가까운 현실의 답을 찾는 분들께 추천하는 206분의 영화 같은 실화 이야기
도서관을 떠올리면 책이 빼곡히 꽂혀있는 서가와 둘러앉는 길쭉한 책상이 생각납니다. 사서는 어떤가요? 책이 어딨는지 알려주고 책을 빌려주는 친절한 사람 외엔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종이책의 위기에 따라 미래에는 도서관이 필요 없다는 논의도 종종 들립니다. 과연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일까요? 다큐멘터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속에서 80대 자원 봉사자는 "도서관에만 있으면 살아날 힘이 생긴다(Keep me on keeping on)"고 이야기하고, 숌버그 리서치 센터장은 90주년 행사에서 "도서관은 생명을 구하는 일(Life-saving work)"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도서관은 어떤 공간일까요?
다큐멘터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도서관이 책을 보관하는 창고를 넘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만큼 얼마나 의미 있는 공간인지를 별도의 내레이션이나 기획된 인터뷰 없이, 있는 그대로를 통해 보여줍니다. 12주간 뉴욕 공립도서관 92개 분관에서 벌어진 일상을 빠짐없이 꾹꾹 눌러 담아 뉴욕 공립도서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들만 겨우 겨우 추려내 러닝타임 206분의 영상을 만들었죠. 예고편을 보면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뉴욕의 모든 예술가가 여길 이용했을 겁니다"라는 자부심 넘치는 사서의 말도 "난 영화 학교 갈 돈이 없어 도서관에서 배웠어요"라는 도서관 애호가의 말도 모두 마음을 울렸습니다. 다큐멘터리 보는 내내 예고편에서 느꼈던 두근거림은 탄성과 끄덕임, 부러움, 미소,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는 설렘으로 이어졌죠.
도서관은 열정과 호기심을 수용할 수 있는
따뜻하고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시작부터 인상 깊은 장면이 2가지 나오는데요. 먼저 리처드 도킨스가 도서관 로비에서 캐주얼하게 대담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중 하나인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임에도 으리으리한 행사장에 고가의 입장료를 내는 행사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도서관 로비라는 열린 공간에서 진행하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다양한 국적과 연령으로 이뤄진 뉴요커 그 자체였죠. 도서관이 아니면 이런 기회를 가지기 어려울 것 같은 일반 사람들, 뉴욕이라는 동네에서 일상을 보내는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이용자들의 문의를 대응하는 사서의 모습이었는데요. 유니콘을 궁금해하는 이용자의 전화를 그냥 끊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유니콘을 검색하면서 관련 자료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족보를 찾고자 하는 이용자에게 인구 통계 자료 중 귀화 자료를 참고하라고 조언을 해주는 모습은 "호기심과 열정을 공유하는 가까운 친구"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열정과 호기심을 존중하는 공간이 바로 이런 곳 아닐까요?
뉴욕 공립 도서관의 92개 분관은 뉴욕의 다채로운 지역 사회와 가까이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브롱스 도서관 센터에서는 마치 한 번도 음악회에 가보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각자의 편안한 자세로 앉아 지역 주민이 준비한 악기 공연을 즐깁니다. 웨스트체스터 스퀘어 분관에서는 70대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서 댄스 클래스를 들으며 그동안 숨겨온 흥을 분출하기도 하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인생 경험을 나누기도 하죠. 분관에서 열리는 갖가지 강연은 주제도 다양하지만 깊이가 남다릅니다. 책의 저자와 같은 전문가를 초대해 노예제, 이슬람 종교, 흑인 사회 폭력, 유대인 이민 1.5세대 등 수많은 대담을 열죠. 대담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 정말 다양한 뉴요커들입니다.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연을 듣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졸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습니다. 이처럼 각자 나름대로 열린 공간에서 편안하게 지식과 영감을 접하는 모습은 진정한 오픈 스페이스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도서관 앞 계단처럼요. 누군가는 연주를 하고 여행객은 기념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잠시 앉아 인터넷을 하는 도서관 앞 계단의 오픈 스페이스는 도서관 강연장 깊숙이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가디언지에서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모두를 위한, 모두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표현했는데요. 이처럼 92개의 분관은 매일 다르게 태어나는 92개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러닝타임 내내 젠더, 국적, 연령, 장애를 뛰어넘는, 뉴욕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진정한 열린 공간으로서의 뉴욕 공립 도서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롬 파크 분관에서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다양한 국적의 선생님에게 숙제 도움을 받는 모습이나 다양한 국적의 엄마와 3~5살 아이들이 함께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Story Time을 가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지요. 또한 차이나타운 근처 채텀 스퀘어 분관에서 중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영어 수업이나 컴퓨터에 사진 저장하기와 같은 간단한 IT 교육을 하는 모습도 나왔습니다.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의 마콤스브릿지분관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교과서 오류를 이야기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이런 오류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해야 한다는 대화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연령과 국적의 다양성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분관의 이야기도 나왔는데요. 앤드류 허이스켈 점자와 음성 도서관 (Talking library)에서 손으로 점자를 읽는 법을 가르치는 모습이나 점자 책을 대여하는 모습, 바우처, 메디케이드 등 정부 관계자가 장애우들을 위한 정책에 대해 강연하면서 "It's good to know your right"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서관 분관 중 하나인 도로시와 루이스 컬먼 센터에서 진행된 수화 공연 통역사의 강연 이야기도 나왔는데요. 청각 장애우들이 울고 웃으며 다른 관객처럼 즐길 수 있도록 무대 위 상황, 캐릭터, 배우, 연출 방식 등을 고민하고 결합해서 청각 장애우들을 위한 레드 카펫이 되어준다는 통역사의 메시지는 마치 뉴욕 공립 도서관이 지향하는 열린 공간의 모습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보면서 제가 가장 탄성을 내질렀던 공간은 Picture collection입니다. 작가, 작품명으로 보관하던 시각 자료를 주제어 구분으로 바꾸면서 지금도 아티스트는 물론, 학생 등 뉴요커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우비 입은 사람" 주제어를 보면 1910년대 광고물부터 어떤 가족의 일상 사진까지 같은 주제더라도 다양한 움직임이나 분위기, 그림의 종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는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자료를 보거나 액자에 끼워두고 멀찍이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열람하면서 자신의 영감을 토대로 자료를 찾아보고 대여까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영감을 원하는지 이야기하면 어떤 그림으로 해석하면 좋을지 함께 대화 나눌 사서가 있죠. 가장 멋진 점은 광고, 서체, 소수(Minority)를 표현한 방식 등 역사 속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지난 백여 년의 과거가 담긴 자료를 모아 왔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100년 후에 누군가가 영감을 위해 찾을지 모르는 각종 자료들을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아카이빙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조명판의 사진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소가 모든 예술가가 거쳐간, (앞으로의) 모든 예술가를 위한 장소라는 말 안에는 모두가 예술가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아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러닝타임 중간중간에 도서관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경영진 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민간 자본과 공공 자금 (대부분 뉴욕시 예산)으로 이뤄진 공공 기관으로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의 요구와 시의 요구, 옳은 일을 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특히 21세기 학습 도구가 인터넷임에도 불구하고 3백만 명의 뉴요커가 인터넷 접근이 안된다는 현실 속에서 인터넷이 없는 이들을 위한 기술의 허브이자 기술 습득의 장,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지켜주는 인프라로서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리고 "다들 위워크는 안 가도 동네 디지털 센터는 간다"며 컴퓨터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며, 도서관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정부보다도 먼저 인터넷을 도서관 이용자의 집에 대여해주는 Library HotSpot 서비스를 시작했고, 나이에 상관없이 무료로 컴퓨터와 IT 기술을 배울 수 있는 Tech connect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죠. 모든 사람을 위한 지식 인프라로서 단순히 인터넷 제공을 넘어 사회에서 필요한 디지털 기술은 무엇인지, 각 세대에게 요구되는 디지털 소양이란 무엇인지, 디지털 통합도시란 어떤 모습인지까지 고민하는 모습은 책임감 있는 앞선 고민이란 이런 거야!라고 외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디에 돈을 쓸지에 대한 논의에서도 공공 기관으로서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종이책과 전자책에 어떻게 투자할 것인지를 의사 결정할 때 라이선스에 투자한 만큼 대출이 되어야 가치가 있다는 현실적인 명분과 대출률 낮은 책이더라도 연구 가치, 사용가치가 있는 자료에 투자해야 한다는 대의적 명분, 뉴욕 공립 도서관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희귀 도서도 갖춰야 한다는 사회적 명분까지 다양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치열한 고민 속에서도 항상 우선순위는 미래 세대라는 점입니다. Early Literacy를 핵심 우선순위 영역으로 선정하고, 유아책과 어린이 비소설 컬렉션 확보에 집중하고, 5세 이하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유아 문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연계하여 교사들을 지원하고 학년별 책 컬렉션을 구축하고 학년별 무료 방과 후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모습은 지역 사회의 지식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전 생애적인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뉴욕 공립 도서관이 내부 직원들, 그리고 지역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분관 중 한 곳을 리노베이션 하기 위해 선정한 건축가를 초대하여 그녀가 생각하는 도서관이란 어떤 모습이고, 미래의 도서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 직원과 대담을 나누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도서관 시설 감독이 강연 형태로 뉴욕 공립 도서관의 총 260개의 과제 중 70개 우선순위 과제가 있는데 그중 7개에 예산을 얼마나 투입했는지를 공유하고 분관별로 바닥 개선 등 무엇을 고쳤는지, 몇 군데가 남았는지 소통하고 대화하는 모습도 나왔습니다. 시 예산도 있지만 지역 사회 개인과 단체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기관인 만큼 대외적인 투명성을 보장하고, 조직 내부로는 적극적으로 소통하여 직원 모두가 같은 비전과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하나의 노력이 지금의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도서관이 예산 계획을 앞두고 준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분관에서 일하는 직원들 모두를 대상으로 대화하는 자리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분관 직원 개개인이 분관이 위치한 지역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전체 도서관의 존속에 핵심적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었죠.
도서관을 아끼는 사람들이 우리 대신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분관 방문객, 지역 사회와 관계를 어떻게 돈독히 할 것인가, 그들에게 우리 일의 중요성을 입증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Board of trustee 회의 모습도 나왔는데요. 회의에선 최초 여성 흑인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사회 일원들과 함께 도서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되새깁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현재 이사회 사람들은 단체 사진으로, 과거 이사회 사람들은 초상화와 사진으로 일부 등장하는데요. 마치 도서관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자 도서관을 지속하게 하는 힘인 이사회 일원들을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나오는 일부러 엔딩 크레딧 직전에 배치한 느낌입니다. 이 사람들 덕분에 이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영화를 마치면서 관객들에게 너도 이토록 멋진 이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냐는 마무리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서관은 늘 시의 교육 체계를 보완했어요. 우린 시민의 삶과 지역 사회를 개선하려고 노력해요."
생각해보면 배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학교와 도서관은 비슷하지만, 어떤 배움을 할 수 있는가는 정말 다른 것 같습니다.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이 교과서나 참고서를 빌리는 곳이나 열람실이 된다면 학교와 다른 배움, 학교가 가르쳐줄 수 없는 배움은 과연 어디서 할 수 있을까요? 단체 수업에서 벗어나 내가 읽고 싶던 책에 푹 빠져 읽는다거나, 우연히 서가에서 발견한 책 한 권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는 것 말이죠.
도서관이 연령, 국적, 젠더 등 '다름'에서 벗어나 모두의 호기심을 지켜주는 열린 인프라로서 존재하려면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요? 또한 지역 사회 개개인의 역량을 키우고 지역 사회 개개인 사이의 대화를 만드는 공간이 되려면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요? 만약 도서관이 없다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교와 멀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지식, 영감, 호기심을 키울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지만 정답지에 가까운 현실의 답을 찾는 분들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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