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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솔 Jun 09. 2024

6화. 고민하는 식스팩남

결국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새벽에 깨서 태산에게 카톡을 보냈다.     

 

  ‘태산이 보고싶어.’

  ‘태산이 보고싶다.’     


  아침 9시쯤 답장이 왔다.

  ‘일어나면 연락해.’     


  ‘너도 내가 보고 싶어?’     


  ‘커피 마시자.’ 태산이 답장했다.  

   

  태산과 집 근처 카페 앞에서 만났다. 태산은 숙취 때문에 오전에 죽을 뻔했다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어제 기억나?”

  “기억나지.”

  “책임져야 해, 너.”

  “그래서 안 째고 커피 마시러 나왔잖아.”     


  커피숍에서는 태산과 어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키스를 퍼붓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추태를 보였던 태산을 놀리는 게 재미있었다. 특히 ‘네가 어제 힘으로…’ 라고 운을 띄우면 태산은 귀까지 막으며 싫어했다.   

  

  “네가 나한테 예쁘다고 하면서. 와, 이렇게 예쁜 애가 나한테 대쉬하다니 나 완전 운 좋다! 라고 말했잖아. 기억나?”

  “어어, 다 기억나.” 한참을 놀림 받던 태산이 내게 물었다.


  “너야말로 기억나? 내가 그랬던 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뭐라고 했는데?”

  태산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는 말 못 한다며 뜸을 들였다. 답답해진 내가 뭔데, 뭔데 하자 태산은 메모장을 켰다.      


  ‘내가 네 애기는 키 크게 해줄게!’

  평균보다 키가 큰 내가 딱 평균 정도 키의 태산을 유혹하다 한 말이었다.  

   

  커피를 다 마신 나와 태산은 사귀네, 마네, 토론했다. 태산이 벤치에 앉으면서 우리 심층적인 대화를 해보자고. 서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라고 말했고, 나는 나와 독일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태산에게 그럼 너는 왜 내 손을 잡고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태산은 부드러워서! 라고 대답해서 내 입을 다물렸다. 그러는 동안 해가 저물었고, 가을 날씨가 쌀쌀했기 때문에 태산은 내게 옷을 벗어줬다. 태산과 나는 그날 2만 보를 넘게 걸었다. 태산은 그날도 나를 집에 데려다줬다. 2만 보를 걸으며 대화했어도 결론이 나지 않아서 아파트 계단에 앉아 대화했다. 내가 추워했기 때문에, 어쩌면 추운 척도 했기 때문에 태산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른 채였다. 이번에는 내가 태산에게 키스를 하자고 졸랐다. 어떻게든 태산의 머릿속에서 그 독일인 여자를 지우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다. 태산이 내 목을 끌어안고 눈을 맞추며 오랫동안 고민했다. 나는 태산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동안, 아. 이거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다 키스하겠지? 라고도 생각했다. 정답이었다. 태산이 말했다.     


  “생각 정리 좀 해볼게. 기다리게 한 만큼, 사귀게 되면 정말 잘해줄게.”    

 

  다음 날, 정오쯤 태산에게 카톡이 왔다.

  ‘이따 저녁에 뭐 해.’

  ‘나 아직 계획 없어. 너는?’

  ‘나 뭐 공부하겠지. 밤에 생각해본 결과는 만나서 말하는 게 낫겠지?’

  ‘응.’

  어제 손잡은 채 2만 보를 걷고도, 아파트 계단에 앉아 몇 시간이나 대화하고서도 나지 않았던 결론을 태산이 내렸다는 말이었다. 태산은 저녁 늦게 내가 공부하는 카페 근처로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태산이 어떤 대답을 할까 조마조마하며 하루를 보냈다.


  태산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일기를 썼다.  

   

  ‘새벽에 자주 깨게 된다. 새벽에 깨고 나면, 그러면 태산이 생각이 난다. 태산이랑 키스하던 생각, 태산이랑 손잡고 걷던 생각. 태산이가 내 얼굴을 지그시 보며 눈 맞추던 생각. 마지막 게 가장 좋았네. 지금 생각해보니까.      


  태산이는 그날 술집에서 내게 아주 많이 키스한 일로 내가 관계에 우위를 잡고 제 약점 같은 걸 잡았다고 말하지만, 아니다. 난 이미 내 패를 다 보여줬고, 이 관계를 지속할지 말지는 온전히 태산이 손에 달렸다. 관계에 우위를 잡았다는 사람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데, 이게 맞는가? 태산이는 바보다.   

   

  혼자이기가 싫다. 태산을 놓아주면 내가 다시 내게 키스해줬으면 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어제 좀 울었다. 내가 태산이의 이상형이 아니어서 몇 번, 혼자인 게 새삼 다시 외로워서 여러 번.     

 

  태산이가 보고 싶다.’     


  태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 한 유튜버가 늘 최악을 상상해야 덜 충격이랬다. 태산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태산이 나를 차리라고 되뇌었다. 커피숍의 창가 자리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휴대폰에서 ‘카톡’ 소리가 울렸고, 나는 ‘산책 가자’라는 말을 들은 개처럼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다 왔어.’     


  태산이 유리창 밖에 서 있었다. 태산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태산은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며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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