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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26. 2022

달리기를 넘어 마라톤

달리기는 좋아하지만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할까. 필라테스 선생님은 10킬로미터 완주는 많이 어렵지 않으니 한번 신청해 보라고 하셨다. 혼자 나가는 건 머쓱해서 남편을 꼬셨다. 

“마라톤 대회에 한 번 나가볼래? 10킬로는 별로 어렵지 않대.”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남편과 시합 몇 주 전부터 한강을 뛰었다. 일주일에 3번, 5킬로~ 7킬로 정도. 처음 나가는 시합이니 목표는 완주로 잡았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가 일정하면 좋다고 했다. 그리고 한 번 걷기 시작하면 다시 뛰기가 어려우니 힘들어도 걷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시합 전 운동할 때도 이 규칙을 지켜가며 연습했다. 나이키 앱은 켜고 뛰면 1km를 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알려준다. 속도에 큰 차이가 없게 하려고 처음에도 빠르게 달리지 않았고 나중에 힘들어 천천히 뛰더라도 아예 걷지는 않도록 주의했다.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뭘 입고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집 앞 한강을 뛸 땐 그냥 편한 바지에 아무 티셔츠나 입고 뛰었는데 대회 때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감사하게도 주최 측에서 시합 전주에 러닝 티셔츠를 보내왔다. 경기 날 당일, 러닝 티셔츠와 검은 몸빼 바지, 챙 넓은 모자, 선글라스, 편한 운동화를 장착한 후 집을 나섰다. 남편은 내 모습을 보고는 한강에서 커피 파는 아줌마 같다며 지나가는 사람이 커피 달라고 해도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했다.      



여의도 너른 들판에서 오전 8시까지 집합이라 아침 일찍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집합 장소로 출발했다. 집합 장소에 가니 많은 이벤트 부스들이 있었다. 꼭 대학교 축제 같다.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조금 흥분한 듯 기분 좋은 에너지를 뿜는다. 우린 각 부스들의 플래카드를 보며 마음에 드는 사은품을 주는 곳에 줄을 섰다. 에너지 음료도 받고 바디워시 제품도 스포츠용품도 챙겼다. 한껏 신이 났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오자 준비운동을 하고 출발 지점으로 이동했다. 남편과 나는 의도하지 않게 인파에 밀려 거의 맨 앞에 섰다. 앞, 뒤, 좌우를 돌아봐도 모두 선수 같은 사람들뿐이다. 러닝 클럽에서 맞춘듯한 러닝복, 머리띠에 탄탄한 몸.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뒤로 갈 수가 없다. 곧이어 출발 신호 폭죽이 울렸다. 난 사람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역시, 빠르다. 빨라. 내 옆에 있던 남편은 잘 뛰는 사람들을 따라 내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안녕, 잘 가라’

금세 조그맣게 보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달리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날 휙휙 지나쳐간다. 옆의 사람들을 신경 안 쓰고 내 페이스대로 뛰고 싶지만 잘되지 않는다. 겨우 1킬로가 넘었는데 그만 뛰고 싶다. 3킬로 정도 됐을 때 다행히 내 페이스를 찾았다. 천천히 쉬지 않고 걷지 않기. 그것만 기억하며 달렸다.      



반환점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많이 지쳐있다. 나와 페이스를 맞춰 조금 뛰다가 뒤쳐졌다. 난 씩 웃으며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속도보다 빨리 뛰면 체력소모가 커져 지치기 마련이다. 10킬로미터는 생각보다 길었다. ‘걷지만 말자’ 하면서 끝까지 달려 결승점에 들어왔다. 결승점에 와서 빨개진 얼굴을 바람에 식히며 남편을 기다렸다. 고개를 쭉 내밀고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열심히 살폈다. 이렇게 남편을 기다렸던 적이 언제였던가.      



5분쯤 뒤에 저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무사히 완주한 남편과 함께 간식 부스에 가서 간식도 받고 메달도 받고 순두부를 주는 곳도 있어서 순두부도 받아 맛있게 먹었다. 우린 각자 자신의 첫 10킬로 마라톤 경험을 나눴다. 

“그렇게 앞에서 출발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잘 뛰는 사람들 속도에 맞춰서 뛰다가 나중엔 어찌나 힘들던지. 정말 겨우 들어왔다니까.”

“그러니까. 다음엔 뒤에서 출발하자. 난 결승점 거의 다 와서는 무리했는지 입안에서 피 맛이 나더라고. 하하.”     



우린 벌써 다음 마라톤 대회를 이야기한다. 비록 10킬로밖에 뛰지 않았지만 내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이 값지다. 남편은 나보다 한술 더 뜬다. 

“세계 4대 마라톤 대회가 어디지? 보스턴 하고 또 어디였더라. 그런 큰 대회에도 10킬로 코스가 따로 있나? 있으면 참여하고 싶은데 말이지.”

웃음이 쿡쿡 났다. 찾아보니 10킬로미터 코스는 무슨, 하프코스도 없다.      



걷고 싶은데 걷지 않고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지 않고 그저 끝까지 가기만 하면 보상이 있다. 참고 꾸준히 나아가면 어쨌든 목표점에 다다른다. 나에게는 마라톤의 이 명쾌함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것도 했으니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거야.’ 하며 완주의 경험을 다른 모든 일로 확장시킨다.      



며칠 뒤, 아이도 꼬셔서 또 다른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기록 측정을 하지 않는 온 가족이 다 즐길 수 있는 마라톤 대회다. 재미있거나 특이한 옷을 입고 온 사람들을 뽑아 상을 준다고 했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가장무도회에 온 느낌이다. 우린 간단하게 아이에게 핼러윈 머리띠와 망토만 입히고 갔는데 재미있게 입고 온 사람들이 많다. 공룡, 신데렐라, 백설공주, 슈퍼 마리오 등등.      



아이와 이런저런 이벤트 부스를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되어 출발점으로 이동했다. 출발 신호 후, 아주 천천히 뛰었다. 아이와 함께라서 달린 시간보다 걸은 시간이 더 많다. 이번엔 5킬로미터 코스를 신청했다. 신기한 옷을 입은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결승점에 도착했다. 비록 5킬로미터 코스지만 끝까지 잘 걸은 아이를 칭찬해주었다.

“우리 딸 대단한데! 쉬지도 않고 정말 잘했어!”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허세를 부린다.

“마라톤 할만한데! 별로 안 힘들어.”     



대회가 끝난 후, 재미있게 옷을 입은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이 있었다. 진행자는 대회 참가자 중 눈에 띄게 옷을 입은 사람을 무대 위로 불러 인터뷰했다. 그중 동화 속 주인공처럼 꾸미고 나온 부부가 있었다. 남편과 아내가 재미있게 즐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진행자는 무대 위 여자분에게 어떤 말끝에 “그런데 시어머니가 이러고 다니는 줄 알아요?”란 질문을 했다. 여자분의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긴장했는데 예상외의 대답이 나왔다. 

“네, 그럼요. 저희 시어머니도 함께 왔는데요!”

여자분은 무대 아래 한쪽을 가리켰다.

“오, 시어머니도 위로 올라와 주세요.”

신이 나서 무대 위로 오르는 시어머니는 백설공주 옷을 입고 계셨다. 그 반전의 장면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한참을 웃었다. 그 가족의 숨은 즐거운 시간들을 상상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갈 옷을 서로 고심해서 고르고 대회 전에 그 옷을 입어보며 몇 번이나 깔깔 웃었을 거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대한 이런저런 기회를 잡아 재미있게 살고 싶다. 같은 시간 텔레비전을 보며 집에서 뒹굴거릴 수도 있지만 뭔가 새로운 걸 하며 신나는 추억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린 시상식을 구경하고 한강 라면을 맛있게 흡입한 후 집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일 년에 몇 번은 온 가족이 같이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생에 몇 번 없을 달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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