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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Mar 27. 2019

수미상관 고백법

진정성 있는 고백을 위한 한 가지 방법

말이 없던 거리와 그곳을 걷던 우리들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넌 땅을 보고 있어

이러고만 있으면 여기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아서

창밖 빛이 파래져도

우리 이러고 있자, 계속 이러고 있자


SURL(설) - 여기에 있자


  초등학생 때는 세뱃돈으로 산 사탕을 선물했고, 중학생 때는 편지를 썼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의 입을 빌렸고,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의 고백은 나이가 들수록 사랑과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닿지 못한 고백들이 하나 둘 쌓여가는 걸 보면서 앞으로의 고백에는 주소를 적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래서 혼자였다. 가끔씩 아무도 수거해가지 않은 고백 더미 안에 숨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소리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 고백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백에 실패할 때마다 점점 단단해진다. 어쩌면 단단해진 척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사랑인 것 같아도 아니라고 되뇌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도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랑을 찾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한 발짝 물러서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사랑 할리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가끔씩 참을 수 없는 고백이 터져 나오곤 하는데, 아무도 그 고백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의 고백이 그러했다. 아무리 좋아한다 말해도 그 말이 그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며칠 전에 퇴근하면서 망개떡을 사 먹은 적이 있다. 떡 사세요. 떡 사세요.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떡장수에게 찾아갔듯이, 무작정 외치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도 마냥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사랑해줘요. 그럼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런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라고 혼자 읊조린 탓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제야 진짜 '고백'이 뭔지 깨달았다. 친한 사람들과 모이는 술자리가 한두 번 있었고, 그 자리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깊어질 때 즈음 둘만의 술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회사 근처의 펍에서 한참이나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만한 주제가 잠깐 나왔던 것도 같은데, 그 자리에는 마냥 기다리는 것밖에 모르는 가장 최근의 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잠시 적막이 이어졌다. 그녀는 포크를 들고 음식을 깨작거리다가, 내 눈을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앞접시만 찔러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당장 내뱉고 싶은 단어들을 눈 앞에 꺼내놓고 혼자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너랑 이렇게 있는 거 너무 좋다."


  찾아온 잠깐의 정적. 고백은 망개잎 냄새처럼 은은하게 찾아왔다. 지금 이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3초의 시간이 앞에 있었고, 그다음 그녀의 고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3초의 시간이 뒤에 있었다. 그래서 그 고백이 내게는 사랑이었다. 그 순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남자는 자신의 고백을 아무도 사랑이라 불러주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공백, 고백, 그리고 공백. 장황한 설명은 생략하고, 주소와 내용만 간략하게 적혀 있는 그녀의 고백은 누구라도 자신의 것임을 알아챌만했다.


  항상 자존감이 높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친구에게 그녀의 고백법에 대해 말해줬다. 조용히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이 너에게 무슨 의미인지 넌지시 말해라.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봐라. 친구도 그녀의 고백법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이 고백할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친구 역시 나처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잘 모르겠다. 내가 여태 알고 있던 고백은 고백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친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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