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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오션 Aug 07. 2023

밥줘충도 긍지가 있다

이 정도면 밥주시면안될까요감사합니다충에 가깝다.

나는! 밥줘충이다!

남들로 하여금 밥을 차려주게 만드는 인간이란 뜻이다.

밥줘충은 자기 끼니 여부를 제대로 된 보상을 주지도 않고 타인에게 부담스럽게 위탁하는 사람들을 비하적으로 이르는 표현이다.   


난 정확히는 알아서 챙겨먹을줄은 아는데 해먹을줄 아는 게 그다지 없어서 챙겨줄 수밖에 없는 쪽에 가깝다.

알아서 잘하면서 차려달라고 요구하는 '의도의 밥줘충'이랑 혼자선 무능해서 차려줘야 하는 '능력의 밥줘충'이 있는데 난 후자다.

즉 전자에 비해 수동적인 밥줘충이다 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긍지의 근원이다.





나는 왜 밥줘충 신세인가?


첫째! 선단 공포증!!!

식칼을 손에 들어야 한다니 무섭다. 든다는 생각만 해도 내 손등을 찌르거나 손가락을 자를 것만 같은 상상이 든다. 들고 옮기다가 떨어트려서 내 발가락을 싹둑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요리를 배울 수 없다. 부엌에 가면 절대로 식칼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절대'까지는 아니고… 쓱 보는 것으로 경기를 일으킬만큼 심각한 수준도 아니지만… 아, 아무튼 불안하다고.

나름 이 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적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노력의 증거


그리고 팔이 비실비실한 편이라 좀 이케 좀 변명이긴 한데 칼질 외 다른 것도 략간 좀 그렇다.



둘째! 연이은 실수!!!

전자레인지에 이상한 걸 넣고 너무 오래 돌려서 뻥! 소리가 났던 적이 있다.

설거지를 하면 바닥이 물 바다가 됐었다. 미끌미끌~ 나는 좀 젖어도 개의치않아 하지만 어머니는 오감이 예민해서 매우 찝찝해 하신다. 곰팡이 핀다고 좀 제대로 할 수 없녜. 니가 설거지 안하는 게 돕는 거란다. 머쓱하구만~ 게다가 내가 설거지를 오래 하면서 물을 엄청 많이 쓰는 것도 답답해하셨다.

그리고 손재주도 없다. 분명 같은 라면인데도 이상하게 내가 끓이면 맛이 없었다. 가족들한테 라면을 대접하겠다고 권유해도 니가 끓인 라면은 맛이 없으니 혼자 먹으라며 한사코 거절하더라.

이러한 누적된 죄목으로 참다 못한 어머니는 내게 부엌 접근 금지령을 내리셨다.


어머니 피곤하시죠? 제가 설거지 할까요?

아니, 너는 하면 한세월이잖아. 차라리 내가 후딱 하고 쉬는 게 낫지.

그럼 요리하는 거 도와드릴까요?

가르치는 게 더 일이고 어차피 네가 할 거 없어.

설거지 할까요? 요리하는 도와드릴까요? 설거지 할까요? 요리하는 도와드릴까요? (도돌이표)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어머니 이거 할까요 저거 할까요' 좀 하지마!

음, 도와주고 싶으면 방 청소나 해라. 


난 청소기 밀고 걸레질 하는 건 능숙하게 해냈기에, 그것만이 내 몫이 되었다!

그리고 그릇 준비하고 상을 닦는다.



셋째! 귀찮다며 굶어버리기!!!

끼니 굶지마. 잘 챙겨먹어.

누이가 독립하면서 신신당부한 말이다. 관련 글

언니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가족들도, 아버지 어머니 동생 모두가, 잘 챙겨먹으라고 일갈한다.

그만큼 나는 배고파도 바로 챙겨먹지 않았다. 챙기는 게 더 귀찮았기 때문이다. 할줄 아는 거 라면 뿐이었… 요리는 뭔가 어려운 영역 같고.

그리하여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밥까지 챙겨주었다. 배달 시키는데 같이 시켜먹거나 자기 거 요리하는데 같이 해주거나.

어찌 보면 가족끼리 당연한 일이긴 하지. 내가 배달 시키고 요리하는 횟수가 적었을 뿐. 물론 나는 라면 끓여주겠다고 계속 그랬는데 가족들이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배달시키는 건 양심상 하지 못했다. 밥줘충이면서 배달충이기까지 하라고?? 내 돈 쓰는 것도 아닌데? 일말의 양심 때문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은근히 유혹했다. 뭔가 빨간맛 끌리지 않냐면서. 우리 시켜먹은지 오래 된 거 아냐고. 더운 날에 시원한 음료 땡기지 않냐고. 가서 사올까 이러고 막. 

나말고 다른 사람도 먹고 싶어서 시키는 거면 무죄다!




근데 사실 지금은 2, 3번째의 문제점을 상당히 개선했다.

1~2년 전인 이때도 밥줘충 중에는 양심파였지만

문제를 많이 개선한 지금의 나는 훨씬 더 괜찮은 밥줘충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나는 긍지 있는 밥줘충인가?

왜 밥줘충들 사이에서 양심적인 인물에 해당할까?

나는 나름 다른 밥줘충들에게 훈수 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밥줘충 주제에 말이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단점을 개선해나가는 중!!!

부엌 접근 금지령도 옛날 일이다. 요즘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당연히 끼니도 알아서 챙겨먹어야 되게 생겼다.


가족들이 각지로 노동과 국방의 의무를 행하러 뿔뿔이 흩어져 가끔 집에 돌아오는 마당에, 내 상황이 자취 비스무리하게 되면서 주로

1. 라면, 참치, 계란, 파레, 햇반의 조합

2. 배달시켜서 몇끼(때로는 며칠)를 먹음

3. 어머니가 해놓고 가신 반찬(주로 김치찌개) 끼니마다 나눠 먹음

이걸로 돌려막기 한다구~


게다가 무려 최근에 계란찜이랑 계란 후라이 배웠다. 무려 김밥 구워먹어봤다. 대단하지 않냐?

김치찌개 남은 거 넣어서 라면 끓이는 퓨전 매직까지 부린다. 쩔지 않냐?

건강하게 다양한 음식 챙겨먹고 싶으니까 할줄 아는 메뉴 내 템포에 맞게 천천히 차차 늘릴 각이다. 칼 안써도 되는 요리 배워둬야지. 비빔밥이랑 찌개부터 시작하다 보면 언젠가는 파스타도 해먹을 수 있게 되겠지.


원래 할줄 아는 요리가 라면(기껏해야 계란 넣은)밖에 없었는데 천천히 갯수를 늘려가고 있는 거다.

심지어 라면 나름 잘 끓이게 되었다. 물량 잘 맞추고, 봉지를 물이 끓기 전에 미리 뜯어놓고, 면도 잘 저으면 되는 거였다.

밥 양도 너무 많이 넣지 말기. 불으니까.

충분히 익히겠다고 너무 오래 끓이지도 말기. 계속 불은 면만 먹을 수 없으니까.


끼니도 전보다 꼬박꼬박 잘 챙겨먹는다. 아무래도 해먹는 게 많아지고 익숙해지면 '밥을 차려야 함'이라는 것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부담감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라면이 물려도 다른 쉬운 방도가 있고.

그리고 건강 생각해서… 벌써부터 골벵 들 순 없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근육량 아슬아슬 위태로운데 밥이라도 잘 무야제.


지금은 설거지 예전보단 잘한다. 역시 할 수록 느는 법이다.

예전에는 워터파크 개장해서 에어컨 못 틀어도 덥지가 않았다면 지금은 그냥 살짝 젖어버린 욕실 바닥 수준이다.

이건 어머니 오시기 전까지 충분히 마를 수 있는 일이고 걸레로 훔쳐도 극복 가능하다. 예전에는 부엌 바닥에 상시 대기 중인 걸레로는 역부족이어서 물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걸레 특공대 정도는 와야 했다.


이제 전자레인지 생각없이 돌리진 않는다. 호일 절대 안넣어. 아무래도 멀쩡한 가전 망가뜨려서 재산 상의 손해를 입히고, 집을 불태워 거주지를 날려먹는 미래는 두렵기 때문이다.


햇반 매번 먹으면 쓰레기 계속 나오니까(게다가 1인분은 때때로 양이 부족해서 2개 째를 뜯게 되니까) 밥을 하려고 했었다. 근데 밥솥 접근 금지령 당했다.

왜냐면 빈 밥솥에 주걱을 넣은 채 보온을 깜빡하고 며칠 돌려버려서 주걱이 바싹 탔기 때문이다. 핫

 이 접근 금지령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셔서 밥 지어주실 때까지 고스란히 햇반 행이다.

다행히 아버지가 오실 때마다 햇반을 한가득 사오신다. 정말 감사합니다.



둘째! 남기지 않아요!!!

남기지 않는다. 식당에 가도 제일 끝까지 남아서 꾸역꾸역 남은 거 쳐먹는 사람 나야 나. 그치만 남기면 지옥 가서 잡탕밥으로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아니면 목구멍 바늘구멍인 아귀가 고통스럽게 먹어치워야 함.

집에 혼자 있으면 (제대로 된 걸 해먹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가 안나온다. 진짜 거~~~~의 안 나온다. 그나마 라면 건더기 중에 유일하게 안먹는 고추 정도가 배수구에 쌓일 뿐이다. 아니면 푸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밥 한 움큼 정도.

포장이든 배달이든 집에서 먹으면 좋은 점이 남은 음식을 싸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림 파스타 먹다가 물리면 싸놓으면 되는거고 다른 메뉴랑 반반씩 덜어서 같이 먹어도 되고.

어머니는 여름을 앞두고, 여름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집벌레를 잘 증폭시킨다고 경고하셨다. 음식물 쓰레기 나오거든 씻어놓은 배달용 플라스틱 용기에 넣고 냉동고에 넣어 얼리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찝찝하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는 것도 찝찝한데 이걸 멀쩡한 음식물이 들어있는 냉동고에 넣으라고? 오마이갓!

응, 안 남기면 그만이야. 그래서 안남겼다. 이걸 위해 배달 시키면 주는 김치, 단무지, 반찬 안 받는다. 남은 음식끼리는 말아서 먹는다. 아마 잘하면 몇 주 동안 내다놓을 일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난 이런 부분에서 곤란을 겪진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나온 음식물 쓰레기는 바닥에 엎어서 못먹게 된 유통기한 5일 지난 삼각김밥+치밥 조합이다.



셋째! 잘 안가려요!!!

먹는 걸 즐기지만 맛집을 따지진 않는다. 어디로 데려가서 무슨 메뉴를 시켜주든 그럭저럭 먹을 것이다.

영 입맛에 안맞지만 않으면야 2번의 원리로 꾸역꾸역 쳐먹는다. 기껏해야 야채 남기는 정도다. 예를 들어 톡 쏘는 무언가 때문에 량피(중국식 비빔면)가 입맛에 안맞았지만, 그래도 다 먹었다. 처음에는 야채까지 싹싹 긁어먹다가 식사를 끝마친 친구가 기다리기도 해서 에휴 면이라도 다 먹자 하고 야채는 좀 남겼다. 원래라면 오이랑 나물까지 다 먹었을 것이다. 영 입맛에 안맞는 건 구역질 나서 못먹겠더라. 예전에 이국적인 컵라면 먹으면서 토할 뻔 했다. 안맞는 소스와 향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친구가 급식 맛없다고 투덜거릴 때 이해를 못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맛없기로 좀 평판 있었던 곳이었고 내가 다닌 대학교는 학식 맛있다는 평판이 있던 곳이었는데 난 둘다 그냥 그렇게 먹었다.

가끔 '어? 뭔가 맛없어?' 하고 뭔가를 느낄 때도 있다. 그때는 그냥 다른 가게가 더 맛있다, 이 메뉴는 이제 안시켜야지 정도의 생각을 하며 다 먹는다.


즉 뭐겠어?? 어디 가게를 데려가서 뭘 사주든 냠냠한다는 거지! ^_^



넷째! 반찬 하나만 해줘도 며칠은 먹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김치찌개 하나 끓여주시면 그걸로 며칠은 먹었다. 멸치 하나로도 밥을 몇 끼나 먹었던 거 같다. 어머니가 밥을 부실하게 주신 게 아니고 초등학생 때까지는 편식을 좀 했었다.

아무튼 이건 좋아하는 메인 반찬으로 계속 먹을 수 있다는 훌륭한 장점이다. 고추장 불고기 해주면 그거 혼자서 먹고 또 먹고 고기 잘라서 먹고 밥에 비벼먹고 볶아먹고 계란찜이랑 같이 먹고 파래 뿌려먹고 계란 후라이랑 먹고 다른 반찬이랑 나눠먹고 그럴 것이다.

우리 언니는 혼자 잘 챙겨먹는 대신에 남은 건 안 먹는 편이다. 나는 반대로 혼자 잘 못챙겨먹는데 남은 걸 다 먹는다.


불고기랑 찌개 하나만 해주고 출장 가셔도 혼자 잘 있으면서 꼬박꼬박 끓이거나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아무튼 잘한다 이거지.

냉장고에 반찬 넣어두고 가시면 아침은 비벼먹고 점심은 라면이랑 먹고 저녁은 계란 후라이랑 먹고 하면서 잘 먹을 것이다. 배달만 시켜줘도 그거 알아서 나눠먹는다고. 아주 편리하다!

미래세대들이 내 밥을 챙겨줘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큰 부담은 주지 않을 것 같다. 간편하지?



다섯째! 감사인사 꼬박꼬박 해요!!!

"오~ 감사해요 어머니", "맛있겠당 어머니 짱!", "잘 먹겠습니다!" 내가 자주 하는 말들이다.

뭐 해주실 때마다 매번 오 감사해요 오 잘먹을게요 해서 어머니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아 한다. (이렇게 내가 애교많은 자녀인데 왜 나의 애살스러움을 인정 안하시는 걸까?ㅋㅋ)

원래 인사성이 바르고 감사인사를 꼬박꼬박 한다. 아무리 챙겨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늘 고마워한다.



여섯째! 다른 이들한테 설파해요!!!

우리 집 남자들에게 내가 계속 했던 소리가 있다. <알아서 챙겨먹지 못할 거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우리 같은 밥줘충은 고분고분하게 따르고 주는대로 감사히 먹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는 다른 이유로 부엌 접근 금지령을 받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된다 같은 구시대적인 그런 게 아니다. 아빠는 나와 다른 방향으로 서툴러서 금지당했다. 나의 경우 설거지를 할 때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에 물을 많이 써서 주변을 물바다로 만드는 케이스라면(대신에 확실히 깨끗하긴 하다), 아버지의 경우 나름 한다고는 하시지만 군데군데 덜 씻기는 케이스다.(노안이셔서 그렇기도 하고.)

어머니는 무능한 사람들이 답답하게 일처리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신다. 언니도 약간 그런 면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못하는 걸 계속 못하게 되었다. 뭐 하긴, 이해한다. 뒤처리도 알아서 하면 신경 안쓸텐데, 나는 주변이 젖어도 스스로는 신경을 안쓰니 모른채 넘어가기 일쑤고, 아버지가 하는 건 다시 해야 되니까. 특히 아버지의 경우 음식물 묻은 그릇을 식기건조대에 넣으니까 더 곤란하다. 멀쩡한 그릇까지 또 씻어야 하니까!

동생한테도 어머니한테 고맙다고 해라, 어머니 일 갔다오면 피곤한데 해달라고 하지 말고 알아서 챙겨먹어야 된다, 그 김에 내 것도 챙겨줘 이럼서 많은 잔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동생은 보통 끼니 알아서 배달 시켜먹든 친구랑 나가서 사먹든 챙겨먹고 그 김에 내 것도 처리해준다.(이 말 아까 적었던가?) 그리고 점점 효자가 되고 있다. 짜식~ 자랑인데, 동생이 어머니라는 말이 입에 붙은 것도 영향이다.


집에 밥줘충이 많으면 (이왕 많은 김에) 나 하나 들이는 것도 추천한다. 기특한 애완용을 지향하는 나 밥벌레는, 끼니를 챙겨주는 감사한 주인님을 위해 반찬 투정하는 다른 벌레들을 진정시키려 할 것이다. 주인님이 얼마나 고마우신 분이니? 챙겨주는 게 쉬운 줄 알아? 더운 여름에 불 앞에 서면 얼마나 힘들지 생각 못해봤어? 우린 그릇이라도 챙겨야돼!




!

고분고분한 밥줘충이다 이 말입니다.   

집안일 하나도 손 안대고 알아서 덜어 먹을줄도 모르고, 해주면 불평불만에, 매번 다른 밥을 해줘야 하는 일반적인 밥줘충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식충이가 아니다. 밥줘가 나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밥 줘"는 진화해서 "밥 주시면 안될까요?" 가 된다.

다시 말해 '밥 주시면 안될까요? 감사합니다'가 되었다.


식충이긴 한데 품질이 진화한 '정중한 식충이'다. 지금은 돈을 못 벌고 있기 때문에 밥만 축내는 밥벌레가 맞긴 하나, 정중하고 고분고분해서 애완용으로도 뭐 나름 괜찮은 밥벌레가 내 포지션이다.






돌이켜보면 난 어릴 때도 "엄마 밥줘!" 이 소리는 안했다. 밥보다 과자를 좋아해서도 있고, 알아서 차려주시기도 했고, 배고파도 얌전히 기다렸고, 그리고 제일 핵심 이유는… 사실 다른 말을 자주 해서였다.  

배고파요, 밥 주세요라는 말 보다는 기대감에 차서 어머니 우리 뭐 먹어요? 어머니 뭐 드시고 싶으세요? 형제들이 뭐 해달래요? 시장에서 뭐 사오셨어요? 이 말을 자주 했다.

지금 당장 안먹어도 된다. 배고픔이야 좀 참을 수 있어. 그냥 난 오늘 식사 메뉴가 기대되고 궁금했다!!!!!!

이런 면은 커서도 유지되었다. 그 놈의 뭐먹어요 소리 좀 그만 하라고 금지령 받았다 ㅋㅋ



사실 내게는 야망이 있다. 바로 우리 집 제일의 밥줘충으로 남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 경쟁자이자 제일 멀쩡하고 탈출 가능성 있는 동생에게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

전략 중 하나는 동생에게 밥 챙겨달라고(예: 우리 둘다 굶었는데 니가 더 라면 잘 끓이잖아, 내가 끓이면 안먹을 거잖아) 계속 지껄이는 것으로 밥줘충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을 온 틈을 타서 지위를 뺏어야 한다.

 요리 잘할 것 같다, 너는 편식을 하니까 네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해먹으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고 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들어도 무해한 메세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은근하게 흥미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그때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 씨부릴 수 있다.

동생이 아무리 막내여도, 아직 챙김 받아도 괜찮은 나이라 해도 소용없다. 내 식충이스러움이 더 드높다는 걸 보여주겠다. 동생한테 라면 끓여주는 누나? 아니지. 당당하게 동생한테 끼니 문제를 위임하련다. 난 당당하다.


동생은 자기가 나름 멀쩡하단 걸 잘 알고 있다. 언니랑 성격의 결을 공유해서,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먹는다. 아마 동기가 생기면 알아서 요리 배워 해먹게 될 듯하다. 그리고 기본 성격이 덜렁거리지는 않으니까(손으로 하는 작업에 나만큼 건성건성이거나 서툴지는 않으니까) 여차하면 가사노동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공통된 믿음이 가족 구성원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나와 아버지보다는 동생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보단 동생이 이런 영역에서는 더 낫다고 계속 지껄인 내 공도 있다.

주인님들(언니, 어머니)이 자리 비울 때 동생 보고 누나 챙겨주라고 하는 거 보고 속으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스트레스 받아하는 동생의 모습!! 캬캬캬! 내가 이겼다!

즉 밥줘충 서열이 나와 아버지보다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진성 밥줘충이고. 동생은 희망이 있고.


아버지 또한 나를 제일의 밥줘충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랑 나랑은 원래 서열이 비등비등 했는데 어느새 아버지가 스스로 서열 아래임을 자인한 것 같다.

동생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아버지한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뭐 일 다닌다든지 아프셨다든지 노안이라든지) 동생만큼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고 좀 봐주긴 했는데, 그래도 동생과 비슷하게 대하고는 있다. 약자라고 많이 봐주지는 않았다.

라면도 맛없게 끓이는 점(아버지도 라면은 잘 끓이시는데!), 부엌에서 이런저런 실수를 연달아 하는 점을 강조한 것과 아빠한테 밥 차려달라고 징징댄 일, 뭐 먹고 싶냐고 귀찮게 군 일 따위가 먹힌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랑 둘이 남으면 알아서 해결하신다. 나가서 드시고 오든지, 중간에 나가든지, 같이 밥 먹으러 식당 가자든지, 돈 줄테니까 먹고 싶은 음식 시켜보라고 하시든지, 갈비를 구워드시고, 닭 끓여드시고, 하여간 나는 편하다. 있는 밥이랑 반찬 내드리는 것도 안해도 된다. 가끔 내가 효심으로 해드리는 정도.

그리고 되려 아버지가 내 끼니를 신경 쓰신다. 밥 챙겨먹어라. 저 뭐 먹을까요? 부엌에 뭐 있데? 그거 먹어. 밥 챙겨먹었나? 아니요. 아직도? 밥 좀 챙겨먹어! 돈 줄테니까 굶지 말고 사먹어!


어머니와 언니는 이런저런 요리를 할줄 알기에 밥 달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아버지를 타일렀다.

어머니 일 갔다 오시면 피곤하잖아요.(=언니 공부하고 와서 이제 도착했는데 어떻게 밥을 해줘요?) 우리끼리 챙겨먹어야 돼요 원래. 배달 시켜 드실래요? 아니면 제가 라면 끓여드릴까요? 그냥 이제 아예 집에 오시기 전에 먹고 오세요! 저는 알아서 챙겨먹을게요! 엄마가 일 안하시면 모르겠는데 일 다니셔서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대신 쉬실 때 해달라는 거 해주시잖아요.

뭐 물론 요리할줄 아는 가족이 해주면 좋지. 한번에 많이 해서 같이 먹는 게 좋잖아. 집밥 해먹으면 싸잖아. 가족 좋은 게 뭔데? 우리 끼니 정도 위탁하면 안돼? 자기 거 요리하는 김에 같이 해주면 안돼? 양만 더 넣으면 되는데? 끼니 같은 사소하고 당연한 권리 문제에 매번 빌빌 기어 얻어먹듯 해야 돼? 굳이 매 끼니에 그러면 힘들지 않을까? 맞지 그치. 몹시 응당한 말이다.

그치만 요리하는 사람의 컨디션을 생각해서 요청해야 하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즉 피곤한 사람한테 억지로 갈구면 안된다는 거다. 무겁고 부담스러운 의무로 만들면 그건 차별이 된다.

그리고 해주면 지나치게 불평하진 말아야 한다. 짜다, 맵다 같은 말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해준 사람 성의는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지금 누리는 복 하나하나가 모든 인간이 똑같이 누리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당연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착한 밥줘충의 신념이다. 아 아무튼 식충이지만 착하다고. 아 아무튼 양심은 있다고.





훌륭한 밥줘충, 그러니까 끼니를 내가 만들지 않은 요리로 많이 떼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런 전략을 사용할 것이다.



첫번째! 대량 포장 식품 알아보기!!!

대량이어도 낱개 포장이면 쓰레기 많이 나오니까 잘 찾아야 한다.

최대한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한번에 많이 사서 나눠먹고 싶다.



두번째! 단골 식당 정해서 계속 방문하기!!!

돈만 넉넉하다면야 주변에 메뉴 다양하게 하고 깔끔하고 싼 식당을 알아놓는 게 좋겠다.

사장님께 얘기해서 선입금 충분히 하고 자주 가서 먹는 걸 루틴으로 두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방식이 가능한 건지는 안해봐서 모르겠어. 다만 식당 매번 고르고 매번 멀리 나가는 건 귀찮으니까 대충 집 근처에 설렁설렁 나가서 먹고 오면 편할 거 같다.

언제는 중식 집 가~ 언제는 한식 집 가~ 언제는 매일 메뉴 바뀌는 집밥 식당에 가~ 가게들 모든 메뉴 다 먹어. 단골 할인 받아. 펄풱트.



세번째! 용기내 챌린지 습관화!!!

직장생활 하면서는 이런 방법 쓰면 되겠다.  

매일 미리 포장 주문 해놓고 퇴근 시 가져가기! 그것마저 귀찮으면 식당 사장님과 사바사바 해서 매주 특정 요일에 반복적으로 포장되도록 해두기. 미리 선입금 하면 좋겠지?  

내 자리에 포장용기 몇 개 놔두기!

설거지하기 쉬우면서 정량을 담을 수 있고 음식물이 나오지 않게 튼튼한 걸로다가 잘 찾아서 여러 개 사놓기.

음식물 들고 교통 이용하면 힘들고 또 무거우니까 집에서 가깝거나 걸어갈 수 있는 위치의 식당들로 구비하기.

그렇기 위해 직장이나 집 주변에 괜찮은 식당 좀 알아놓기.   

휴일에 포장용 용기 싹 씻고 챙겨서 다음 근무일에 한꺼번에 챙겨가기.  



더 좋은 방법 있을까?

싸고 건강에 좋고 친환경적이면서 다양한 메뉴로 끼니를 떼울 수 있는 편한 방법.

일단 모닝빵 여러 개입 사서 점심마다 먹는 건 얼마 안가 골병 들 거 같으니 보류다.

 ai 가사 로봇이 혼자 살아가야만 하는 나를 긍휼히 여기고 챙겨주면 좋겠다. 복지로 보급해줘!!@!!!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어른인데, 저런 노력들을 할 거면 그냥 요리를 배우면 되지 않아?

왜 밥줘충으로 남으려 해?

밥줘충에 뭐가 긍지가 있어, 그래봤자 자기 몫을 못하는 어른이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렇다면 당당한 밥줘충으로 살 테야.

왜냐면! 칼 무서워!




사진: UnsplashJon Haley


사진 속 모델이 된 꼬마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밥줘충은 나인데 표지로 그대를 씀으로 마치 그대가 밥줘충인 것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미소와 밥의 조합이 매력있어서 그랬다.


밥줘충은 꼬마가 아니라 나다.

내가 밥줘충이다 이 말이에요.




다음 글 주제로는 [귀여움이란 무엇인가] 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해온 걸 대충 적어보면

귀여움이란 우호성과 무해함을 의미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인데, 이게 귀여움이란 게 대상마다 경우와 원인이 좀 다를 테니까 남들의 의견도 물어보고 좀더 생각해봐야 해서,

차라리 대화법에 대한 고찰을 적는 게 빠른 것도 같고,

고민 계속 할 바에는 1편 2편 나눠 적는 게 나을 거 같고, 고민하다 보니 결론 바뀌어도 뭐 고찰의 진행과정으로 치면 되고,

그럼 왜 성격 비슷해도 관심사가 다른가를 쓰는게 낫나 싶긴 하고,

무슨 주제든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도 같고,

그리고 지금 글 쓰는 것보다 취업준비가 더 급한 것도 같다. 왜냐면 나 식충이 밥벌레니까!!!!!!!

밥줘충에 밥벌레라니 레전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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