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바르셀로나의 밤이 내게 괜찮다고 했다.
\이전 시리즈부터 읽으려면?
<#0. 백수, 그 완벽한 여행조건에 대하여>
https://brunch.co.kr/@winniethedana/9
<#1. 유랑카페가 필요없는 바르셀로나 여행 준비 총정리편>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0
숨 막히는 9호선을 뚫고 매일 아침 다녔던 여의도 출근길. 마지막 출근 후 그렇게 익숙했던 그 길을 더이상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밝았다.
처음 며칠은 매일 같이 일어났던 6시 반에 눈이 떠졌다. 다시 자도 되는 여유로움이 즐거우면서도 몸이 기억하는 익숙한 시작에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다시 또 잘 잔다. ㅋㅋㅋㅋ
그렇게 느즈막히 하루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사람들을 만났다. 약속을 잡을 때마다 반가운 마음도 컸지만 한 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대화는 자연스레 내 다음 커리어를 물어볼 테고 아직 계획이 없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보낼 것이 당연하게 그려졌다. 그런 탓에 처음 몇 번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나갔다.
그런데 내 걱정이 너무나 무색하도록, 누굴 만나던지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닥치고 바르셀로나' 였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언제가?
다녀왔다면 그 엄청난 매력을 알기에 눈을 반짝거렸고, 다녀오지 않았다면 '바르셀로나'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엄청나게 질문 공세를 했다.
요즘 바르셀로나 씨의 근황을 알려드려야 할지, 내 근황을 이야기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ㅎㅎ
바르셀로나는 그런 곳이다. 모두가 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제 3자의 관점으로 보면 미래의 나 자신까지 부러워지는 그런 곳.
한편 사람들과의 약속이 없을 때는 카페나 집에서 바르셀로나 공부를 했다. 그 곳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책 혹은 가우디에 관한 책이 주 독서목록.
그런데 이상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어딘가 부족했다.
아직 그곳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활자라는 매개체와 몇 장의 사진은 '뭔가 더 있을 텐데' 하는 갈증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모르겠다라는 것.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가상의 소설 같은 느낌이 아쉬웠다.
그만큼 그것은 낯선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직장인의 일상과는 멀어진 채로 조금 느린 일상에 익숙해졌고, 벌써 3주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추석 연휴가 가까워졌다. 동시에 오매불망 기다렸던 출국일도 다가온 것. 내가 내일이면 스페인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는 그 곳은 얼마나 낯선 모습일까.
한편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이 추석 연휴기간인 것은 우리 가족의 이번 추석 계획이 '각자 여행하기'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친구들과 싱가포르, 동생 커플은 도쿄, 나는 혼자 바르셀로나.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추석 계획을 들려주면, "너도 참 특이한 줄은 알았지만 가족도 범상치 않다."라는 반응. ㅎㅎ
우리 자매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데, 우연히 서로의 출국 비행기가 같은 날 한 시간 차이로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재밌어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함께 집을 나섰다.
나는 오후 2시, 동생이 타는 도쿄행은 오후 3시 비행기 출발. 공항버스 앞에서 만난 동생의 남자 친구까지 합류해 오늘의 인천공항 크루가 다 모였다.
버스를 타고 이제 자볼까하는 순간, 내 비행기가 1시간 연착이 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한 시간이 뉘 집 고양이 이름도 아니고, 다음 비행기로 환승하는 시간이 겨우 1시간 50분인데... 그렇다면 환승할 시간이 50분밖에 없는 건데. 처음 가보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대서양처럼 넓으면 어찌하려고ㅠㅠ
급하게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외항사 직원답게 굴리는 발음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50분 정도면 해당 공항의 최소 환승시간보다는 긴 시간이라 괜찮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대신 빠르게 나갈 수 있도록 비행기 앞 쪽에 통로 좌석으로 미리 배정해주겠다고 했다. 땡 갓 ㅠㅠ
뭔가 이번 여행이 범상치 않게 전개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하지만 한낱 인간이 어쩌겠냐.
최선을 다한 뒤엔 행운만 빌뿐
거의 4시간이 남았지만 부랴부랴 수속을 밟았다.
이번에 이용한 항공사는 루프트 한자. 한 시간 연착사건이 슬펐지만 문자도 꼬박꼬박 넣어주고 굴리는 발음으로 대응도 해줬으므로 다행이라며 좋게 생각했다.
한번 대만에서 중국 항공사의 나몰라라식의 연착 대응을 당했더니 이렇게나 관대한 사람이 됐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
다시 한번 확인해보니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환승을 한 뒤 스페인 현지 시간, 밤 11시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여정.
도착하기에 너무 늦은 밤은 아닐런지. 공항에서 숙소까지 무사히 가기를 바라며 평소처럼 뒷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잘 다녀오겠다는 연락을 하고. 인스타에 티켓 인증 사진도 올렸고. 마지막으로, 면세점 쇼핑에 한창 열을 올리는 여동생의 정신까지 챙겨 오니 벌써 시간이 다 되어갔다.
우리는 각자의 게이트로 헤어졌다.
혼자 자리에 앉았고 이제 조금 실감이 났다. 절대 익숙하지 않을 앞으로의 일주일.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이다.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서는 옆 자리 두 분 모두 우리나라 분들이셨는데, 8시간 정도 몽롱한 시간을 보낸 후 한두 시간쯤 남았을까. 창문 쪽 좌석에 있던 중년 여성분이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 교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분은 덴마크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 인사를 계기로, 나와 내 옆 자리분이 어떤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시는 듯했다.
들어보니 옆자리에 앉은 분은 건축회사를 다니는 내 또래였고, 휴가로 파리, 스위스를 가기 위해 파리로 환승을 할 계획이라고.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퇴사 후 아무 계획 없이 바르셀로나를 가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잠시.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72열의 A, B, C 좌석 세 사람은 그 후 2시간 내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장시간 비행의 가장 즐거운 점은 이런 자발적 사육을 당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루프트한자 기내식은 꽤 괜찮았다.
그리고 팁이 있다면, 유럽 항공사에 탄 만큼 웬만하면 술을 주구장창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라는 것. 루프트한자라 독일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와인을 더 좋아한다. 그 탓에 틈날 때마다 와인을 마셨더니 장시간 비행에 그렇게 필수라는 수면유도제가 전~혀 필요 없었다.
믿어보시라. 불편한 좌석이라도 아주 딥슬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와인에 취한 10시간이 지나고, 각기 다른 환승행을 타야 하는 이들의 급한 마음을 아는지 비행기가 헐레벌떡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생각보다 올드했고 넓었다.
신기한 것은 환승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라는 유럽연합 국가에 이미 들어온 것으므로 독일에서 입국심사와 짐 검사를 했다는 것. 생애 처음으로 실제 유럽연합을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신기한 것도 잠시, 환승시간이 딱 20분 밖에 안 남지 않았다. 뛰어서 겨우 도착한 게이트. 역시 아시아인은 나밖에 없었다. 이제 이것도 익숙해지겠지
몇 가지 재밌는 생각이 스친 후,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로 무사히 탑승했다.
한국은 한참 밤이 깊었을거다. 너무 피곤했다. 어서 숙소에 누울 생각만 하며 2시간을 뜬 눈으로 앉아있었다.
드디어 얼마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근데 덜덜더러더러더더럳덜 제발 살려주세여.
밤 11시, 불이 꺼진 바르셀로나 공항에 내렸다.
한 20분 정도 공항버스를 타고 왔을까.
(다음 편에 계속)
<#3. 바르셀로나식 첫인사, '우유 넣은 커피'>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2
<#4. 피카소를 수첩에 데려오는 법>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