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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나 Sep 23. 2016

#0 백수, 그 완벽한 여행조건에 대하여

한계에 도달했을 때,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만은 분명해보였다.

한계에 다달았다

부푼 꿈을 가지고 이직했던 회사였다. 하지만 입사 후 7개월쯤 되었을까. 회사의 분위기는 계속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1년이 다 되어가던 때 조직에 대한 실망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몇 번의 의견 개진과 조직의 대응을 지켜봤고 결국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많은 동료들이 퇴사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회사 전반적인 분위기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사실 나에게는 야근, 주말 출근이 필수일 때가 가장 재밌게 일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본래의 모습은 워커홀릭이다. 그런 내가 '직장인으로 사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회의까지 갔으니. 건강과 멘탈이 최악을 향해 달리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심지어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았고 더 이상 일에 욕심부리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싫어했던 모습인 '월급쟁이'같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이어나가고 있던 것이다.


만족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에 불면증과 우울감은 최고 수준을 달했다. 같이 살고 있는 친동생과 친한 지인들까지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괴로워할 정도. 정작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던 어느 날, 이전 회사에서 인연을 맺어 인생 멘토 같은 이사님께 삼성역 카페에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지막이 돌아오는 한 마디.

"잠시 쉬어가도 세상 끝나지 않아. 괜찮아"
요즘은 일하지 않는 것도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마지막 희망, 5일짜리 바르셀로나행 티켓

갑자기 2개월 전 추석 연휴 기간 바르셀로나 여행을 예약해둔 것이 생각났다. 바로 이거다. 나에겐 마지막 희망이었다. 생각은 너무 복잡하고 내가 나를 가장 모르는 것 같은 이때,  할 수 있는 것도 또한 해야 될 것도 여행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생 신분일 때 휴가로 잡은 터라 일정은 5일. 스페인은 오며 가며 이틀을 쓰는 먼 나라이기에 결국 여행은 3일밖에 되지 않는 거다. 노 웨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짧은 일정이지만, 그때는 직장인으로서 눈치는 미친 듯이 봐야 하고, 스페인은 미친 듯이 가고 싶고 그 둘 사이에서 합의를 내린 것이 5일이었던 것 같다. 처량하지만 냄새라도 맡고 오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퇴사한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지. 이제 연차고 뭐고 상관없지 않은가.

(우왕 굿)


친한 친구가 알려주길 항공사에 전화해서 수수료를 좀 내면 표를 바꿀 수 있단다. 오케이. 루프트한자에 전화를 걸었다. 많지 않은 수수료로 오는 비행기를 이틀 뒤로 바꿀 수 있단다. 아싸 오케이이이이. 그렇게 5일의 일정은 7일로 늘어나 여행에도, 나의 마음에도 큰 여유를 주었다. 드디어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는 생겼어!!

과거의 나에게 건배. 스페인 여행이라니. 기특한 녀석.


미친놈들의 나라로 한번 가보자

하고 많은 나라들 중 왜 스페인이었을까? 나에게 스페인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미친 X들의 나라'였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회화를 좋아하는데 내가 푹 빠졌던 작가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하나같이 스페인 태생이었다. 피카소, 벨라스케스, 고야, 달리. 스페인 화가만 필터링한 것도 아닌데 알고 보니 다 그 나라 출신이었고,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이런 겁나 미친놈들이 많이 태어난 걸까


그리고 정말 그 이유가 다였다. 지금 퇴사한다고 하면 미쳤다는 이야기를 어지간히 듣는데 같은 미친 사람으로서 궁금해서라도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가는 정해졌고, 스페인을 다녀온 모두가 추천하는 도시인 바르셀로나로 목적지를 정한 것뿐이다. 스페인어는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그곳에 가우디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역사는 별 것 아니게 시작하는 거다. 그냥 가보는 거지 뭐.


내 마음에 바르셀로나 불을 지핀 그 영상. 강추. https://vimeo.com/98123388



그것이 영원한 휴가가 될 줄은

어차피 모두가 자위(자기 위안)하며 사는게 우리네 인생. 지금 나의 위안과 희망은 바르셀로나에 있음이 분명해 보였고 다음 스텝을 미리 고민해봤자 지금의 섣부른 판단은 또 다른 불행을 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고로 다음 계획을 정하지 않은 채로 퇴사를 선언했다는 것.


한마디로 큰일 났다는 얘기다. 큰일 났어.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야. 그렇지만 다녀와서 생각하자. 잇힝(발바닥 박수).

그렇게 나는 literally 백수가 되었다.

이게 바로 자유여행(자유멘탈 여행)의 필수품 아니겠니? 덕분에 시간은 넘치게 생겼고 더욱 덕후 같은 여행을 준비하기에 완벽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

그때는 백수 신분으로 이 비행기에 올라탈 줄 몰랐었다.


자 이제 백수가 여행을 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지.




(다음 편에 계속)


<#1. 유랑카페가 필요없는 바르셀로나 여행 준비 총정리편>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0

<#2. 출국, 익숙함을 떠나는 연습>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1

<#3. 바르셀로나식 첫 인사, '우유 넣은 커피'>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2

<#4. 피카소를 수첩에 데려오는 법>
https://brunch.co.kr/@winniethedana/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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