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 다룰 주제는 바로 '경국대전'입니다. 조선에는 '이상한 법전'이 있었습니다. 제작기간만 무려 30년. 심지어 그동안 왕위도 두 번이나 바통터치가 된. 하지만 완성되고서야 조선의 이상(理想)을 더욱 좇아갈 수 있게 된 그런 법전이죠. 과연 어떤 법전이길래 이렇게나 특이점이 등장한 건지, 지금부터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의 모든 법은 이 책에서 비롯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현재 대한민국의 법은 '기본육법'이라 불리는 6개의 법에 근거하는데요, 그렇다 보니 이들 6개의 법을 모두 묶어놓은 '육법전서'라는 책이 있기도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국가의 법조항을 모두 모은 책이 대한민국에만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에도 이런 역할을 하던 책인 '경국대전'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매우 기나긴 시간이 소요되는데요, 처음 이 책을 만들기로 결정한 건 7대 세조 1년인 1455년이지만, 완성은 9대 성종 16년인 1485년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들게 됐냐면요...
대체 어쩌다 책 하나 만드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걸까요? 우선 경국대전을 만들기로 결정한 세조 1년으로 가보겠습니다. 당시 집현전 직제학이었던 양성지는 상소문 하나를 올리는데요, 중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조(太祖)·세종(世宗) 때 《원전(原典)》과 《속전(續典)》이 있었고, 또 《등록(謄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좋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제(田制)와 의주(儀註)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병제(兵制)와 공법(貢法)도 임시로 적당하게 한 법이 많았으니, 어찌 성대(盛代)의 불충분한 전장(典章)이 아니겠습니까? 빌건대 대신(大臣)에게 명하시어 이에 다시 검토(檢討)를 더하여 한 조대(朝代)의 제도를 정하시어 자손 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5일 무인 -
즉 양성지는 '기존에도 법전 만들어서 법대로 하려고는 했는데 허술한 데가 너무 많으니 즉위하신 김에 정리 좀 하는 것이 어떠하냐'라고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죠. 그런데 세조가 이 상소문을 읽은 이후 제대로 결심이 섰던 모양입니다. 경국대전 서문을 보면 이러한 세조의 의지가 확고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우리 역대 임금들의 깊고 두터운 은택과 웅대하고 아름다운 규범이 실려 있는 법전으로『경제원육전(經濟元六典)』·『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육전등록(六典謄錄)』이 있고, 또 여러 차례 내린 교지(敎旨)가 있어서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관리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받들어 시행하는 데에 헷갈리니, 이는 참으로 법조문이 번거롭고 많으며 앞뒤 조항이 모순되어 크게 하나로 정해지지 않아서일 뿐이다. 이제 참작하여 증감하고 정리하여 통일해서 만세토록 사용할 수 있는 정해진 법을 만들고자 한다.
-경국대전 서문-
다시 말하면 '예전에 만든 법들 잘 만들긴 했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주먹구구식이네. 이번에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세조는 이전에 만들어진 법전보다 훨씬 더 완성된 법전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는데요, 세조 4년의 기록을 보면 아예 세조 자신이 법전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수정할 점을 집어주기까지 합니다.
육전 상정관(六典詳定官) 등이 각기 찬(撰)한 법전을 올리니, 임금이 후원에 나아가 친히 보고 필삭(筆削)하였다.
- 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 윤2월 22일 경진 -
후전(後殿)에 나아갔다. 육전 상정관(六典詳定官) 등이 각기 찬(撰)한 바의 법전을 가지고 아뢰니, 임금이 친히 보고 필삭(筆削)하였다.
- 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 윤2월 24일 임오 -
법전 완성을 위한 세조의 열정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조실록 5년의 기록을 보면, 그해 4월 28일 법전 제작을 맡길 인재로 前 공조판서(현재의 국토교통부 장관쯤 됩니다) 최항(崔恒)이란 인물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는데요, 문제는 이 당시 최항은 모친의 장례 후 3년상을 치르는 중이었단 것입니다. 거기에 세조는 그다음 달인 5월 7일에, 아직 복귀도 안 한 최항을 곧바로 '지중추원사'라는 관직에 임명합니다.
세조: 공.. 아, 아니 지중추원사~ 3년상 중인건 아는데 법전 만드느라 사정이 좀 급해. 기복(상중(喪中)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다시 기용(起用)하던 일)해줄 테니까 그만하고 얼른 올라와서 법전 좀 써라.
최항: 전하? 제가 왜 때문에 지중추원사죠? 그리고 저는 그런 거 할 만큼 대단한 엄친아도 아니고요, 어머니 살아생전에 제대로 못 모셔서 3년상이라도 풀로 채워야겠어요.
세조: 응 아니야~ 당신 뛰어난 인재인 거 내가 다 알아. 그냥 오랄 때 와.
최항: 아니 전하 그래도 3년상은 다 채우는 게 맞잖아요. 공자께서 3년상 길다고 투덜댄 재여 지적한 내용 논어에서 못 보셨나요? 그리고 보니까 저 필요하신 만큼 급한 일 아니구먼. 저 안 올라갑니다.
세조: 3년상 길다고 투덜댄 건 재여지 당신이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공자랑 다르게 님이 급하게 필요해요. 그니까 그만하고 빨리 올라와.
최항: 하... 전하. 조정에 고급 인재들은 뒀다 뭐 하시는데요? 그리고 좀 지나면 삼년상 금방 끝나요. 전하 같으시면 규칙을 어긴 인간이 만든 법 지키실래요? 아무튼 전 여기 계속 있겠습니다. 탈상하면 봬요.
세조: 아 그딴 거 모르겠고 넌 그냥 조선 조정 소속의 결재 안된 휴가 많~이 쓰는 관원이야. 빨리 올라와.
그렇게 세조는 복귀를 3번이나 거절한 최항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맡을 핵심 인력으로서 조정에 복귀시키고, 이후로 편찬사업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렇게 한 파트씩 완성되는 편찬 사업
그렇게 1년이 지난 세조 6년 7월, 마침내 조선은 경국대전의 한 파트인 '호전(戶典)'을 완성하여 반포 및 시행하고 이전에 사용하던 법을 모두 거두도록 합니다.
명하여 새로 제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원(元)》과 《속전(續典)》 《등록(謄錄)》 내의 호전(戶典)을 거두도록 하였다.
- 세조실록 21권, 세조 6년 7월 17일 신묘 -
그리고 이로부터 1년 뒤인 세조 7년 7월에는 경국대전의 또 다른 파트인 '형전(刑典)'을 완성하여 반포하기에 이릅니다.
신찬(新撰)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을 반포(頒布)하기를 명하였다.
- 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 7월 15일 계축 -
경국대전의 여러 파트 중 '호전'과 '형전'이 우선적으로 완성된 이유는, 이 두 가지 파트에 담긴 내용이 '백성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호전'의 주요 내용을 보면 관리의 급여 지급, 토지 측량, 호적 등록, 세금 징수 등 국가 재정에 대한 갖가지 규정들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형전'의 내용을 보면 각종 범죄에 대한 형량, 형벌을 시행하지 않는 날, 노비·소송·상속 등 지금으로 치면 민사, 형사재판 등에 필요한 규칙이 적혀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 가장 먼저 규칙을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두 개의 파트가 먼저 완성된 것이죠.
그리고 이보다 시간이 더 지난 세조 12년, 마침내 조선에는 경국대전의 모든 파트가 '1차적으로' 완성됩니다.
병술년(1466년, 세조 12년)에는 왕이 누조(累朝)에서 입법(立法)한 것의 과조(科條)가 진실로 번거롭고 상완(商琬)이 손익(損益)되었다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정(定)하여 만드셨고...
- 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 11월 28일 갑신 -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1차적으로 완성'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국대전도 끊임없는 수정 과정을 거쳤다는 뜻이죠.
실제로 세조 12년의 완성본은 실제 법전으로 반포되지 않았으며, 이후에 작업된 과정을 보면 모두가 새로운 장을 만든 것이 아닌 '이전 판본의 미흡한 점을 수정·보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니까 이 과정을 계속 거치 고나서야 '진짜 최종본'을 완성했단 것이죠. 기록을 살펴봤을 때 '진짜 최종본'이 나오기 전까지 경국대전은 다음의 버전들이 만들어졌었습니다.
1466년(세조 14년) 병술대전: 1차 완성본, 호전과 형전만 반포됨
1469년(예종 원년) 기축대전: 병술대전 수정본, 1470년에 반포하기로 했으나 예종이 사망하여 취소
1471년(성종 1년) 신묘대전: 최초로 모든 파트가 반포, 이전·호전·형전의 내용 수정
1474년(성종 4년) 갑오대전: 처음 경국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72개 조를 '속록'이란 별책에 포함하여 함께 반포
그러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도 법령의 해석 등의 문제로 경국대전의 조항을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경국대전은 또다시 수정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484년인 성종 15년이 되자, 성종은 경국대전 완성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전일 내가 감교청(勘校廳, 경국대전의 수정을 맡은 부서)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교정(校定)을 마친 뒤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와 재상(宰相)들이 당부(當否)를 참고하게 하였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그 첨가하여 기록한 것은 다 《속전(續典)》에서 따온 것이므로 곧 선왕(先王)께서 이미 시행하신 법인데, 재상들이 각각 소견을 고집하여 논의가 어지럽게 된다면, 《경국대전》이 어느 때에 정하여지겠는가? 참고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겸교청에 묻도록 하라."
- 성종실록 167권, 성종 15년 6월 29일 갑신 -
그렇게 성종은 경국대전 편찬에 있어 더 이상 신하들끼리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게끔 작업을 진행하였고, 마침내 같은 해 12월 이른바 '을사대전'이라 부르는 경국대전의 '찐 최종본'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대전을 다음 해인 1485년에 반포하여 사용하게 되죠.
<참고문헌>
『세조실록』
『경국대전』
『신편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2002
『한국민족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