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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an 25. 2024

열 살 여자 아이라는 완벽한 세상

어제도 강의하는 날이었는데 컨디션이 정말 별로였다. 강의는 순발력이 생명인데 순발력은커녕 눈은 감기고 귀는 안 들리고 머리는 멍하고 혀도 굳어 있고 입술도 안 움직여서 말도 안 나오는 총체적 난국. 그래도 강의를 갔다. 강사는 약속이 생명이지. 암암. 


아이들을 만나니까 갑자기 눈이 개안이라도 된 것처럼 뿌옇던 것이 다 걷히고 선명하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반갑고 어여쁜 아이들의 웃는 얼굴에 기분이 좋아지고 굳어 있던 얼굴근육이 하나하나 살아나며 웃음꽃이 피어난다. 너희들은 알까.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웃게 만들었다는 걸?


감정카드를 두어 개씩 고르는 시간으로 항상 수업을 시작하는데 오늘 나는 '곤란하다'를 골랐다.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여러분 앞에서 실수해서 곤란해질까 봐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아이들은 별 말없이 그렇구나 하고 내 얘기를 들어준다. 그렇게 털어놓으니 속이 또 후련해진다. 그럼 또 달려 볼까.


아이들은 수업시간 내내 진지하게 듣다가 말하다가 꺄르륵 웃기를 반복한다. 말을 어른처럼 능수능란하게 하지 못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다. 가끔은 뭐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를 때도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절대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참 변화무쌍한 사람들. 


좋아하는 아이돌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만 서로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단호한 자매라는 존재. 말썽 부리는 꼬마 강아지를 잡아서 하우스에 넣는 일에는 카리스마 있게 앞장설 수 있지만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은 아직 꺼내 놓기 어렵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반짝한 눈으로 이것저것 궁금해하다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아내면 스스로가 대견해서 우쭐해하는 그 모습이 한 편의 드라마 같아. 내 눈엔 그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 여리고 푸르른 생명체들에게 감동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니. 예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부족한 내 언어가 개탄스럽다. 지금 이 순간이 왜 이렇게 완벽해 보일까. 내가 보는 지금 이 모습을 너희들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들이 이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들의 지금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왜 이렇게 여자들의 인생에는 힘든 일이 많이 생기는 걸까.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던 열 살 여자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업이 끝나고 나오려는데 아이들이 내게 배꼽인사를 한다. 너희들 덕분에 나도 오늘 너무 즐거웠어. 나도 따라서 배꼽인사를 하고 나니 아이코 이런, 이번에는 강아지랑 같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다. 이 사랑스러운 모습이 나를 위한 것이라니, 이런 호강이 다 있나? 다음에는 사진기를 가지고 가서 사진을 찍어줘야겠다.


어쩌면 나는 방문 교육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애들이 너무 예쁘다. 세 번 만났는데 사랑에 빠져 버렸다. 매번 강의가 끝나고 주변인들에게 강의 후기를 나눌 때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더랬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엉엉 울고 있다. 아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려 글자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옷소매가 다 젖었다. 이게 이럴 일인가? 내 적성에 안 맞는 게 아닐까? 이 와중에 애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객님은 재결제를 진행해 주셨다. 적성에 맞는 걸까? 안 맞는 걸까? 내가 진짜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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