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희 Sep 16. 2021

인생 계획, 그 결과는 엉망진창이지만

계획과 변수

   또 방랑의 욕구와 게으름이 충돌했다. 언제나 어디라도 떠날 궁리를 하며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방랑자적 기질을 때때로 게으른 기질과 느린 기질이 방해를 놓는다.


 

   마음속에는 방랑의 욕구가 늘 공존하는데 이번엔 집에서 한 시간 반, 두 시간쯤 떨어진 곳이 며칠 동안이나 눈에 아른거려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여유가 생긴 날, 그 틈을 타 눈 뜨면서부터 오늘은 그곳에 가야지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나의 방랑은 주로 즉흥이기에 동행자 없이 혼자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준비하는 맛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여기서 시작된다. 정확한 시간표가 없으니 느린 기질은 한없이 시간을 늘려 쓰기 시작한다. 세월아 네월아. 또 옷을 골라 입는 걸 끝으로 비로소 외출 준비를 끝냈을 땐, 게으른 기질이 갈등을 만든다. 느리게 준비한 탓에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버렸고, 지금 출발하면 얼마 안 있다 돌아와야 하는데 가야 하나 싶어 귀찮아진다. 동행자가 없는 방랑엔 늘 이런 패턴의 반복이다. 그래도 게으름을 이긴 날엔 결국 좋은 마음을 가지고 후회 없이 돌아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출발 직전엔 주저하는 과정을 거친다. 주저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이른다. 차라리 그때 출발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스스로가 게으름과 씨름하느라 흘려보낸 시간이 또 모순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어쨌든 이런 패턴의 반복에서 이번 방랑의 계획은 게으름에게 양손을 들었다. 항복.



   마음으로  번도 ,  그곳에 가야지 했던 계획을 접고 참새 방앗간 행을 택했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온갖 것들을 하며 시간 보내기. 커피 하나 시켜놓고 마감시간까지 버티다 나왔다.  값에 좋은 시간, 좋은 날이었다.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집으로 걷는 시간, 느리게 여유 부리다가 어정쩡해진 시간 탓에 동네  바운더리를 결국 벗어나지 못했던 오후그래서 찾아온 지금의 저녁을 떠올렸다. 느림과 게으름으로 계획을 이행하지 않은  자신을 비판하지 않기로 했다. 그곳에 가는  미루고 말았지만, 그렇지만 좋은 시간이지 않았던가. 그날 하루의 변수를 즐기기로 했다. 세상은 계획대로 흘러갈  없고, 계획하지 않았던 곳에는 생각보다 좋은 일들이 벌어지니까. 그냥 그저 좋았던 카페에서의 오후처럼.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인생에 자주 비유되는 여행에서는 단 한 번도 변수 없이 흘러가기만 한 적이 없었고, 지난 나의 계획들과 지나 온 내 삶을 비교해 계획에 완성도를 측정하자면, 지난 계획들의 결과는 엉망진창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난 여행도 나의 삶도 무사했다. 또 그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해 당황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예상치 못한 재미도 신기함도 있었고, 깨달음도 있었으며, 생각지 못한 세상을 발견하기도,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그 길을 걸어가 보기도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가슴을 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계획대로만 되면 인생이 무료하고 재미없다 라고 포장할 수 있을 만큼 덕분에 다채로웠다.



   모든 걸 촘촘히 예상해서 계획을 세우느라 선택을 고뇌하는 이가 떠오른다. 완벽한 출발을 계획하느라 그래서 완벽하지 않을까 봐 또 짜고 또 짜느라 출발조차 하지 못한 사람. 아무리 촘촘히 따져도 결국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어 방해를 하고 말 텐데. 생각과는 다른 모양이 되었더라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을 텐데. 일단 출발부터 해 보라고 말해줘야 할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길을 걷게 되더라도 결국은 무사할 거라고. 돌아가더라도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결국은 그곳에 가 있을 것을 믿는다고. 심지어 온갖 다채로움을 겪고 겪어 예상보다 더 풍부한 모습으로 그곳에 도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실 그날의 변수를 잘 즐기고, 혹여나 자신의 잘 못된 선택이 자신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 출발 조차 못하고 있는 그를 떠 올린 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는 이 생각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이 말이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그러진 지난 계획들에 대한 씁쓸함을 감추려고 마음속으로 그를 향해 응원하는 척 나를 위로했다.


  

작가의 이전글 서툰 날 끝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