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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Oct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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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도시락을 준비했다는 상대방의 마음 때문이라기보다,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도 도시락을 준비했어요. 민지 씨 말처럼 저도 정말 간단한 도시락" 나의 말을 듣고 있던 민지 씨는 "정말요? 뭔데요?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말해해 볼까요?" 좋다는 대답을 했다. 동시에 숫자를 세고 민지 씨는 "유부초밥"이라고 외쳤고 나는 "샌드위치"라고 외쳤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오늘 다양하게 즐기면 되겠어요" 민지 씨는 그렇겠다며 나의 말에 힘을 싣는다. "이따금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근교로 나가곤 해요. 그래서 항상 돗자리를 가지고 다녀요. 한동안 사용하지 못했는데 오늘 써볼 수 있겠어요" 도시의 빌딩 숲을 지나 어느 순간 시골의 논과 밭이 펼쳐진다. 근처에 다다르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주차장에는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다. 십 분을 찾아다닌 끝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민지 씨는 한쪽 어깨에 돗자리가 담긴 백을 매고 있다. 쇼핑백은 나의 손에 들려있다. 이미 좋은 자리는 누군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산책도 할 겸 자리를 찾아 걸어보기로 했다. 

우리의 시선 안에는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다. 오분 정도를 더 걸어 나아가 이전보다는 인적이 더 드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는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햇살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비춰낸다. 나무는 그런 햇살을 조명삼아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워낸다. 

우리는 서로가 가져온 음식들을 돗자리에 펼쳐 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색함이 가득하다.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민지 씨가 맛있게 먹는 표정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 순간 웃고 있던 표정은 사라지고 오갈 데 없는 나의 시선은 방황하고 만다. "아, 아니요. 그냥요." 민지 씨는 말을 듣고 "그냥이 어디 있어요. 웃는 데는 이유가 있지." 당신의 표정을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말을 들은 당신의 반응이 궁금하다. 무슨 말을 할지 또 어떻게 반응을 할지 나의 마음은 어느새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더 이상 마음속에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이끌려 가는 대로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한편으로는 자꾸만 기울어져 가는 마음이 두렵기도 하다. 이 두려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제는 이 순간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이다. "정말 그냥 웃음이 나왔어요. 저도 모르게" "그래요? 그 정도로 지금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게요" 나는 그 말에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른 채로 대화를 나눴다. 어느 하나 틀어지는 것들이 없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퍼즐 조각 하나가 이제야 나타나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날 쯤에는 해는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였다. 한산해진 곳을 지나 차에 올라탔다. "민지 씨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이렇게 멋진 곳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민지 씨는 나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다. 시골길을 벗어나 다시금 도시의 빌딩 숲 사이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남은 시간은 돌아올 한주를 위해 각자의 시간을 보내자는 말을 했다. 점점 내려야 할 위치가 가까워져 가자 나의 마음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친다. 혹시나 이런 심장박동 소리가 민지 씨에게 닿을까 몇 번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다.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애써 모른 척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당신에게 만나자는 말을 건네면 지금까지의 영상이 실제의 당신에게 전달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려드리면 되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재차 묻는 물음에 "아 네 맞아요."라는 말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민지 씨는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결단을 해야 했다. 실제상황이 아님에도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 같고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저기요. 민지 씨 제가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할 건데요. 이렇게 망설이는 모습이 정말 오랜만이라서 제 자신도 익숙하지가 않지만 그럼에도 민지 씨에게는 솔직해지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까지 남겨진 제 데이터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만나겠다고 선택을 한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저 정말 괜찮은 사람이고 이안에 비치는 모습들이 전부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실제로 만나보지 않을래요?"라고 말을 하는 순간 시야에는 알림 문구가 뜬다. '데이터가 전송됩니다. 확인을 하기까지는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며칠까지 소요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등록된 휴대폰으로 문자가 가게 됩니다. 그럼 실제로 만남이 성사될 수 있기를 마지막까지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지 씨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기화면으로 전환이 된다. 종료를 하지 못한 채로 삼십 분여를 그대로 보냈다. 가상현실을 종료하고 나온 것은 그 상태로 한 시간여를 더 지속하고 난 뒤였다. '종료'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다. 벽면의 시계를 바라보자 여전히 토요일. 그런 밤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고 해가 저물었을 뿐 변한 것은 없다. 

한편에 올려둔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자 주변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와있다. 그리고 가상 데이트 회사에서 보낸 문자메시지가 보인다. "회원님 안녕하세요. 상대방이 데이터를 확인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직 선택을 하지 않은 상태이니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닫고 조심스레 내려놨다. 이상태로 깨어있기는 힘들 것 같아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여전히 나의 정신은 또렷하다. 

이대로는 잠에 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뜨게 된 시간은 일요일 오전 열한 시를 막 넘어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휴대폰에서는 진동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뉴스 봤어? 지금 난리도 아니야." 졸린 눈을 비비며"뉴스? 일요일 오전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진다.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뉴스 기사 좀 확인해." 통화를 종료하고도 몇 분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라는 생각을 했을 뿐. 일어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기지개를 켜고 거실로 나아가 리모컨을 찾아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뉴스가 나오는 채널로 리모컨을 조정했다. 뉴스에서는 속보라는 이름을 달고 방송이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 나가 있는 김주헌 기자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주헌 기자." 화면이 전환된다. " 네. 현장에 나와 있는 김주헌 기자입니다. 제가 나와있는 곳은 가상 데이트 사업을 진행했던 회사의 외부 앞입니다. 이곳 앞에는 이미 소식을 접한 많은 회원들이 찾아와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건물이 굳게 닫혀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어젯밤입니다. 내부 임원에 의해 시스템 문제가 발생되었다는 것을 저희 방송사에서 단독으로 취재를 했었는데요. 들은 바에 의하면 시스템적인 문제에 의해 일부 회원의 데이터가 섞여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앵커의 질문이 이어진다. "데이터가 섞여버리는 사고라고 하셨는데 아직 상황을 접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이점에 대해 설명해드리기 전에 앞서 가상 데이트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입자는 회사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회원권을 구매하게 됩니다. 그런 뒤 자신의 정보를 등록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정보에 맞게 매칭 된 상대와 가상 데이트를 진행하며 실제로 만나게 될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게 된 비결은 바로 아주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을 통해 여러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이었습니다. 입소문을 통해 회원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실제로 연인이나 결혼으로 이어지는 등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늘어나는 회원 수만큼 서버가 확보되어야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회원수에 맞춰 서버를 늘려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그러므로 인해 문제가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신규 회원들에게는 고지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회원을 모으는 데에만 열중하게 되었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늘어난 회원들의 데이터만큼 서버가 따라가지 못해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데이터가 섞여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 회원들 간의 데이터가 섞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A회원의 외면의 모습과 B회원의 내면의 모습이 뒤섞여 C 회원에게 비치게 됩니다. 그럼 C 회원은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외면의 모습과 다른 한 사람의 내면을 모습이 섞여버린 데이트를 진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김주헌 기자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다시 스튜디오로 화면을 전환하겠습니다. 회사의 대표는 문제가 터지기 직전까지 회원들의 모집했고 가입비를 받아 해외로 도피를 했다는 소식까지 전해드렸는데요. 출국 전 특수 기술을 통해 변장을 하고 정보를 속인 덕분에 수사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멍하니 뉴스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일부 회원이라면 나는 그 일부에 포함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가 연속해서 온다. 

첫 번째 메시지를 눌러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이사태를 먼저 뉴스를 통해 접하신 회원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전달드립니다. 회사는 끝까지 수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저희를 믿고 기다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회원님. 확인 결과 회원님께 매칭 해드린 김민지 회원님의 데이터가 섞여버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김민지 회원님의 성격이나 정보 등은 그대로이나, 외형의 모습은 다른 회원님이 데이터가 덮이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를 누른다.

"야 뉴스 봤지? 일부 회원이라던데 너는 해당사항 없는 거지?" 


다음 날. 뜬눈으로 회사를 출근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너도 일부에 해당되는 거 아니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뉴스 기사를 확인하자 회사 측의 다른 문제점들이 발견돼 가상현실 사업은 사실상 잠정 중단된다는 기사가 나와있다.  


그 후로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얼마 전 뉴스에서는 회사 대표가 잡혀 국내로 곧 송환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제는 관련 없는 일일뿐이다. 나의 일상은 이전과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정부에서는 일 년 전의 사건을 계기로 가상현실을 이용한 데이트에 관련된 법을 개정했다. 

사실상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업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일 년 전의 일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기억 속 한편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까. 

이따금 민지 씨와 보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가상 데이트 회사의 모든 시스템이 멈추고 우리의 관계 역시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사건 이후로 며칠간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상대방이 사실상 다른 사람이었다는 게, 

처음에는 외모에 이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민지 씨의 행동이나 말들 속에서 외모만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바라보게 될 수 있게 된 덕분에 만나야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더 크다. 

다른 누군가를 만날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나의 마음은 고장 난 것인지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한다. 마음은 더 굳게 닫혀버린 채로.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서 민지 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우리가 보냈던 순간을 더듬어 직접 찾아 나서볼까도 했지만 사실상 민지 씨가 나를 만나야겠다고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의 행동은 실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마저도 섣불리 행동을 할 수가 없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민지 씨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미 서로를 지나쳐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민지 씨를 알아보지 못했고 민지 씨는 나를 그냥 지나쳐갔을지도. 

우리는 그렇게 같은 세계 안에 살아가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친구 중 한 명은 가상 데이트 진행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시도도 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나고 말았으니 그보다 시도라도 해본 나로서는 더 낫다고 말해야 할까 싶다. 

현실의 시간으로 반나절도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이대로 계속해서 시간이 흐른다면 분명 언젠가는 우리가 보냈던 아주 짧은 순간의 기억들은 잊히고 말 것이다. 

금요일 오후. 다들 분주함 움직임을 더해낸다. 저마다 주말의 계획들을 세우느라 바빠 보인다. 동료 중 한 명은 "요즘도 주말에 집에만 있어? 어디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그래."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좋아."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해가고 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힌다. 서두를 것도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일들 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뿐이다. 주차를 하고 편의점으로 향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점원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점원은 물건 정리를 하느라 곧바로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잠시 동안의 정리가 끝나자 뒤돌아 나를 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맥주를 고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즐거운 금요일 이잖아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우리는 마주 보며 웃음을 더했다. 계산을 하는 사이 점원은 "이것 보세요 예쁘게 생겼죠? 길고양이를 한 마리 더 대려왔어요.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야위어 보여서 지나칠 수가 없었거든요. 지금은 보시는 것처럼 아주 건강해져서 기분이 좋아요. 다행히 기존에 있던 고양이와도 큰 문제없이 잘 지내줘서 고마운 마음이에요"사진 속 고양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눈이 정말 예뻤다. "정말 예뻐요. 그리고 대단하시네요. 고양이를 돌볼 생각을 하시고"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뒤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익숙한 거리를 걸어 나아간다. '포도'가 사라진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마음을 주기만 하면 모두가 떠나가버리는 것 같다. 오래전 '젤리'도 그랬고 '포도'도 그랬으며 의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민지 씨 또한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가버렸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일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 단순히 당신에게 나의 마음을 전합니다. 받아주세요.라는 일들로 끝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 그런 마음을 지켜내는 일들이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쉽사리 마음을 주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따금 '포도'가 머물렀던 자리에 고양이 사료를 두고 간다. 미쳐 때어내지 못한 미련과 '포도'가 아니더라도 다른 길고양이들을 위해서.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한 번쯤은 나타나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해주면 좋을 텐데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집안 내부는 고요하다. 아침에 나갔던 모습 그대로이다. 맥주를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간식거리들은 식탁 위에 올려둔다. 곧바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이용해 노래를 재생시킨다. 거실의 불을 환하게 키고 TV를 켠다. 맛집을 찾아가는 방송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내고 마찬가지로 거울을 닦아낸다. 냉동실에 넣어둔 맥주를 꺼낸다. 간식과 함께 소파 앞으로 향한다. 방송에서는 지역별 백반 맛집을 찾아간다는 주제로 진행을 하고 있다. 타 지역 식당의 소개가 끝나고 난 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지명이 나오자 반가운 마음에 방송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나오는 식당 소개 앞에서 씁쓸한 웃음을 더해내고 말았다. 민지 씨와 밥을 먹으러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동네의 숨은 맛집으로 유명합니다. 말 그대로 아는 사람들만 찾아와 식사를 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요. 자 이제 식당 내부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익숙한 모습의 내부와 식당 주인인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집중해서 바라본 것 같다. 반가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겪었던 일들이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송이 끝나고 내일은 한번 용기를 내 식당에 찾아가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 보고 싶어 졌다. 가상현실 속에서 민지 씨를 만나던 그때의 순간처럼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이 밀려든다. 그 사이 맥주캔이 비워져 가고 밤은 깊어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 대충 세수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로 백반집으로 향해갔다. 민지 씨와 걷던 골목길을 지나 나아가자 드디어 백반집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은 한산한 모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이의 방문에 할머니는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더니 편한 곳에 앉으라는 말을 한다. 내적 친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 혼자 마음속으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가상현실 속에서 보았던 대로. 그리고 어제 방송에서 보았던 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민지 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맛있게 먹고 난 뒤 계산을 마치고 "잘 먹었습니다. 또 올게요"라는 말을 했다.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별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얕은 미소로 답을 해준다. "조심히 가고 또 와요." 인사를 하고 밖을 나서려고 할 때 마주쳐 들어오는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놀란 마음에 상대방을 바라볼 틈도 없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문틈 사이로 반가운 목소리가 오간다. "할머니 이동 네로 이사오니까. 이제 자주 올 수도 있고 정말 좋아요 할머니도 저 자주 보니까 좋죠?" 조용하던 실내가 웃음소리로 뒤섞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내 삐걱거리는 문이 닫혔다. 착각을 한 것 같다. 이 동네에 특히나 이 식당에 아는 사람이 올리가 없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 자주 가던 카페에 들러 음료를 사기로 했다. 지갑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지자 그제야 지갑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생각해보니 밥을 먹는 동안 테이블 위에 지갑을 올려두고 챙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식당을 나와버린 것이다. 서둘러 식당으로 다시 향해갔다.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는 나를 바라보더니 "젊은 사람이 칠칠맞지 못하게 지갑을 두고 다니면 어떡해. 잘 챙겨" 안도감의 웃음을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내부를 둘러봤을 때는 내가 나올 때 부딪힐 뻔했던 사람이 밥을 먹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문을 열고 나아가려고 할 때 할머니는 나를 불러 세운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식혜인데 한번 먹어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식혜를 마시는 동안 밥을 먹고 있던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속으로 '어'하는 외마디를 내뱉었다. 밤중에 단지에서 몇 번 마주쳤던 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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