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외로운 거라고, 왜 아무도 말하지 않은 거야? 엄마는 결혼을 닦달만 했지, 힘들 수도 있다곤 안했어. 내가 비혼이라도 외칠까 봐 그랬을까? 원망스러웠어. 중매를 선 엄마도, 연애 경험없는 나도,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도, 다 밉기만 했어. 아이를 기르는 건 내 몫이었지. 술이 잔뜩 취해서는 어렵게 재운 아이를 깨울 때, 나는 바가지 긁는 걸 넘어 바가지로 뚝배기를 깨고 싶었지. 더 싫은 건 뭔지 아니?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식사를 내야 한다는 거야. 왜? 나는 전업주부니까.
어느 날은 엄마한테 소리쳤어. “나 이렇겐 못 살아. 결혼은 나 혼자 했어? 애기는 빽빽 울고, 집안은 엉망이고, 더는 못해. 갈라설 거야.” 귀한 막내딸이 엄포를 놓는데 엄마는 웃으면서 복숭아만 깎더라고. 어찌나 얄미운지, 우리 엄마한테 복숭아 알러지라도 하나 있었으면 싶더라니까. 엄마는 태평했어. “헤어지는 게 쉽다냐. 이것아.” 참고 사는 게 답이라기에 나는 공격력을 잃었지. 다른 타깃이 없을까.
술. 그래, 술이 문제지. 도대체 술이 뭐길래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 거야? 술을 입에도 대본 적 없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날이 온 거야. 사고 당일이.
밤이 늦어가는데 또 그이는 말없이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아. 옳다구나, 오늘이구나. 나는 거사를 앞둔 은행털이범처럼 걸어가서는 부엌 찬장에 모셔둔 위스키를 꺼냈어. 그이가 아끼고 아끼던 술이었지. 17년산인지, 21년산인지 알게 뭐야.
갓난 아기가 잘 자는지 확인하고는, 위스키를 열었어. 온더락인지 뭔지 알턱이 없는 나는 컵에 물 따르듯 술을 채웠단 말야. 목에 털어 넣기를 서너 번 했을까. 어디가 천장이고 어디가 바닥이야. 세상이 뺑뺑 돌면서 내가 걷는 건지, 거실 바닥이 나를 밀어내는 건지 좌우 분간이 흐려지기 시작했어. 남편이 늘 하듯 나도 갈지자로 걸으면서 푹 침대에 쓰러져 깔깔 웃었지. 이야, 이 좋은 걸 나만 몰랐구나. 답답함이 온데간데없고, 이리오너라! 외치면 온 동네 사람이 내 앞에 일렬종대로 설 것 같더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어.
얼마나 지났을까, 퇴근한 그이는 날 보고 기절초풍이었지. 담임선생님이 문제아 부르듯 남편 이름 석자를 외치면서 “이 좋은걸 여지껏 혼자 먹었냐!” 소리친 거야. 그는 겸연쩍게 웃기도 했던 것 같아. 늘 바가지만 긁던 부인이, 난데없이 바가지 위에 올라가 칼춤 추고 있으니 안 놀라고 배겨? 내가 순한 여자는 아니라는 걸 보여준 셈이지.
다음 날, 나는 마음으로 후회될 뿐 아니라 몸까지 힘들어서 하루 종일 지구를 등에 업고 태양 주위를 도는 듯 했어. 그런데 있잖아. 효과가 아주 없던 건 아냐. 그 이후로 남편 귀가시간이 좀 빨라진 거 아니겠어? 금성에서 온 여자는 이렇게 화성에서 온 남자를 놀래킨거지. 그러니까 집안의 누군가가 갑자기 술을 한 병 싹 비운다던지, 잘 내오던 밥그릇을 던지고 나간다던지, 전에 없던 일을 벌이면 그건 조심할 징조인 거야 큭큭.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