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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May 11. 2024

연재를 마치며

못다 한 이야기

꼬리


네발 달린 짐승에게

꼬리가 있는 이유는


좋은 풍경 앞에서

다리 네 개를 잠시 접고

꼬리라도 깔고 앉아 풍경이라도 보라는 이유


네발 있는 동물에게

꼬리가 달린 이유는


다급히 기다리는 것이 있을 때

날개 삼아 꼬리를 펼쳐놓고

기다림을 기다리라는 이유


양지바른 자리에

천 리를 깔고 앉아

만 리를 기다리는 운명을 명심하라는 이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연재라는 미끼


우울이라는 돌덩이를 가슴에 이고 지고 살다 보니 때때로 변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다. 브런치 역시 기분에 따라 들락날락거리며 커다란 사명 감 없이 글을 쓰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자와 살면서 내 기준에서는 참으로 희한하고 신기한 일들이 많았기에 언젠가 꼭 글로 남겨야지! 하는 바람은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브런치 북 '연재'는 참으로 나에게 안성맞춤인 프로그램이었다.

마침내 미끼를 문 것이다!

모든 에피소드가 완성이 되어야 브런치북을 펴 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중간에 힘 빠지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최고의 연습장? 이 생긴 느낌이었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일 수 있으나 '연재'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쓰게 하는 힘이 분명히 있는 듯하다.

마감에 쫓기는 약간의 짜릿함을 선물하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사랑을 받은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작가의 새로운 신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란 시집을 읽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가는 '꼬리'라는 시에서 나를 울리고 말았다. 아마도 백자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동물에게 꼬리가 있는 이유는 기다림을 위한 지지대로 쓰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네발로 멈춤 없이 앞으로만 달릴까 봐 잠시 꼬리를 펼치고 풍경을 보며 기다리라 말한다.

그리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아름답지만 너무도 잔인한 시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백자는 항상 기다린다.


집 나간 식구들이 돌아오길.

산책을 나가주길.

밥을 주길.

놀아주길.

목이 마르다는 것을 알아주길.

춥다는 것을, 덥다는 것을 알아주길.

어딘가에 맡겨지면 어서 데리러 와주길.

아프다는 걸 알아주길.

바깥세상의 소음이 어서 멈춰주길.

엄마의 눈물과 한숨이 그만두길.

나를 더 사랑해 주길.

그리고

변하지 않길.


이토록 기다림의 연속인 백자를 보고 있자면 말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자신이 버려질 까 노심초사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뉴스를 알아듣는 것인지 이 세상 그 어떠한 위험에 노출이 될까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없이는 한 발자국도 세상에 나아갈 수 없다는 불안.

오늘도 회색과 갈색의 눈망울은 꾸준히 나를 따라다니고, 그것은 때론 기쁘게 때론 슬프게 보인다.

얼마나 더 사랑을 해줘야 저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천 리를 깔고 앉아 만 리를 기다리라는 운명을 아직 명심하지 못해서인가.



백자와 같이 산지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웬만한 것은 눈치로 다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

그것은 백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눈으로 몸으로 소통을 하며 깊이 사랑하고 있다. 어떤 때는 백자가 개라는 생각을 잊는다. 아니 개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듯하다.  

나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 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책임감 없는 생각이었는지 백자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백자는 어떠한 일에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 만으로 소중한 생명체!

이제 백자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백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언제였던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사랑을 받은 적이 또 언제였던가.


나의 우울과 주변의 불편한 상황들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계속 어려울 것이고 그러면서 삶은 흔들릴 것이다.

오늘도 뉴스에서는 정신 나간 사람들 이야기, 믿기 힘든 사건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웃음 띤 얼굴, 와중에 자신의 키우던 개를 창 밖으로 집어던졌다는 이야기.

꼭 이런저런 기사를 보아서가 아니라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그만하는 이유는,

네발 달리고 꼬리가 달린 짐승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두 발로 걷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때때로 혼자 남겨두는 나란 인간을, 저 동물은 이토록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토록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도 백자는 힘차게 꼬리를 흔든다.

백자가 꼬리를 가진 이유는,

사랑이라는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중심을 잡고 지탱할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공작새처럼 꼬리를 활짝 펼치고 세상의 아스라한 경계의 끝에서 이토록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백자야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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