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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Apr 22. 2024

선을 넘는 녀석

냄새 맡는 개 냄새 맡는 사람

다리가 저려온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커피를 내려 푸짐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딸 덕분에 은근히 기다려지는 주말이다. 백자는 우리가 아침을 먹기 시작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를 하며, 고개를 쳐들고 한 없이 기다린다. 사과 한 입, 양상추 한 입, 당근 한 입씩을 얻어먹고 바닥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백자를 안아 올렸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황사로 몸살을 앓았는데 시원한 빗줄기가 마냥 반갑다.

품에 안긴 백자는 겨드랑이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엄마 냄새와 창 밖의 비 씻겨져 내리는 소리 그리고 일제히 요동치며 빗물에 범벅이 된 녹색의 나무 향을 맡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나 보다.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한다.

그저 브런치를 마치고 잠시 안아 올린 것인데 짜식이 품에 안기더니 잠이 들어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다.

너무도 편하게 안겨 있는 백자를 보니 엉거주춤한 자세를 바로잡기가 힘들다.

등이 아파오고 다리에 쥐가 나려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딸아이가 쿠션 하나를 등에 받쳐 준다.

까치발을 하고 있는 발 사이로 묵직한 쿠션하나를 디밀어 준다.

훨씬 편해진다.


이 아침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냄새

냄새에 예민한 편이다.

한때 나는 냄새를 너무도 잘 맡아서 전생에 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만큼 비위가 약하고 까다롭기에 개를 키우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 중에 '냄새'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친구가 개를 키우면서 했던 말이 본인은 잘 모르겠는데 엄마가 집에 오시면 '개 냄새'가 난다고 하셨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개를 키울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흔히들 '개 비린내'라고 하는 것!


그렇지!

실내에서 똥과 오줌을 싸며 샤워를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동물 냄새가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개 냄새라니!




몇 해 전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해외에서 각종 상을 휩쓸며 대한민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영화를 영화관에서는 물론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보았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었다.


'냄새'는 선을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어 버린다. 추하고 불결하며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냄새는 두 부류를 구분 짓는 확실한 매체이다. (중략) 영화에서 '냄새'는 미추의 확실한 선을 그으며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이 되어간다. - 2020. 2. 14 글 "<기생충> 선, 냄새 그리고 무계획" 중-


유난히 냄새에 민감한 나는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그 '냄새'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경계를 허물고 주위를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비극의 시작은 두 부류에 서있는 아스라한 그‘냄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을 넘는 녀석


백자는 그 '냄새'의 선을 함부로 넘는다.

백자의 냄새는 경계도 조심성도 양해도 없이 나의 코를 압박하고 진동한다.

미추의 사각지대에서 이리저리 예고 없이 튀어나와 온 집안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더운 날 산책이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백자의 냄새는 더욱 강렬하다. 방금 싼 똥을 치울 때는 휴지로 감싼 그것의 냄새가 싱싱하다 못해, 방금 방앗간에서 뽑아 온 가래떡 같이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속이 편하구나!

소화가 잘 되었구나!

어제 먹은 사과와 당근의 양이 적절한 거 같다!

양상추를 처음 먹여 봤는데 괜찮은 거 같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며 뒷정리를 하고 백자의 똥구멍을 닦아 준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똥냄새를 맡으며.


냄새라는 매개체


백자가 목욕을 하고 나면 향긋한 샴푸향이 난다. 처음에는 방금 씻고 나온 백자의 향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진짜 백자의 냄새가 아닌 잠시 빌린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 향기는 얼마가지 못하고, 꼬순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킁킁거리며 백자의 발 냄새를 맡는다.

다섯 개의 검은 발도장을 가진 앙증맞은 것에서는 숲에서 부는 바람 냄새가 난다.

백자의 방귀에서는 새벽녘, 습기를 한 껏 머금은 나무 냄새가 난다.

개들이 처음 만나면 서로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가끔은 백자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정제되지 않은 백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백자와 나의 냄새는 겹쳐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백자는 나의 냄새를 맡고 나는 백자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심지어 백자를 잃어버렸다는 가정하에 나는 엉덩이 냄새만으로 백자를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얘기를 하면 식구들은 '드디어 미쳤구나! 백자한테 미쳤어!'라고 한다.

어쩜 나는 진짜로 미쳐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원래 사랑은 정신이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사랑 아닌가?

어디 한 군데 퓨즈가 나가고 몽롱한 기분에 구름 위를 떠다니는 상태, 그런 게 사랑 아니던가.


백자와 우리는 냄새의 선과 경계를 넘나들며 온기를 나누고 미추의 구분 없이, 서로 엉겨 붙은 새로운 냄새 하나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는 자꾸만 무던하고 무난한 사람이 되어간다.


갑자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모양으로.

처음으로 맛을 본 술에 취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 빛나던 대학 새내기 신입생처럼.



똥싸는 백자

너무도 잘 웃는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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