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사의 과제 합격 메일을 받은 뒤, 인사팀으로부터 1차 면접 안내 연락을 받았다. 평일 오후 5시에 화상으로 면접을 진행한다고 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대면이 아닌 모양이었다. F사에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줄었으나 잡힌 시간대가 애매했다. 오후 5시, 퇴근 이후에 보기에는 빠듯했다. 결국, 연차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낸 뒤, 마음이 무거워졌다. F사 면접 전형은 총 세 번이었고 다음에는 또 어떤 핑계를 대면 좋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골치가 아팠지만 우선 이번에도 나중의 일은 나중의 내게 맡기기로 했다. 곧 닥칠 1차 면접에만 집중했다.
1차 면접은 실무진 면접이었다. 전날까지 야근하느라 준비를 잘 못 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취업 준비를 하느라 그런지, 면접 도중 자꾸만 혀를 씹거나 말을 절거나 했다. 평소 쓰지도 않는 이상한 말투가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했다. 망했다.
그런데 모니터 속 면접관님들의 표정이 온화하기만 했다. 어째 나를 굉장히 좋게 봐주는 느낌이 들었다. 최악의 면접 TOP 10에 들어갈 면접이었으나 합격할 것 같다는 예감을 뻔뻔하게 가져보았다. 그리고 정말로 이틀 뒤에 1차 합격 메일을 받을 수 있었다.
F사는 전반적으로 결과가 빨랐다. 그게 어떤 지원자에게는 좋겠지만나 같이 일정 변동이 많고 빡빡한 회사에 다니는 지원자에게는 별로 좋지 못했다. 일주일 안으로 또 휴가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늘 바빴지만) 요새는 유달리 더 바쁜 시기라서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2차 면접 안내를 위해 전화를 준 F사 인사 담당자님에게 사정사정하며 빌었다.
“이른 아침에 면접을 볼 수는 없을까요?”
꼭, 꼭 부탁합니다!, 나는 통화를 끊기 직전까지도 간절히 매달렸다. 이게 그다지 도리에 맞는 행동이 아님을 알았다. 이렇게 지원자의 부탁대로 면접 시간을 잡아주는 경우도 별로 못 들어봤고. 어쩌면 2차 면접은 못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을 가지던 차에 놀랍게도 F사 인사 담당자님이 내 부탁을 들어줬다. 원래는 오후 중에 잡힐 예정이었는데 면접관에게 양해를 구해 이른 아침으로 면접 시간을 변경해준 것이다.
E사 출근 시간대와 겹치지 않아,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됐다. 더군다나 2차 면접 또한 화상으로 진행하기에 여러모로 여유로웠다. E사 근처 어딘가에서 화상 면접을 보고, 면접이 끝나면 바로 E사로 출근하면 됐다. F사 인사 담당자님이 천사처럼 느껴졌다. 난 이제부터 그를 엔젤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해와 같은 엔젤님의 은혜로 2차 면접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E사 근처 스터디룸에서 방을 빌려 면접을 봤던 나는 화상 프로그램 창을 닫자마자 정장을 벗었다. 자리를 빠르게 정리하고 E사로 달려나갔다. 그 결과, 평소 시간대에 무사히 E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E사 동료들에게 기분 좋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다녔다.
어쩌다 보니 세 가지 안중에서 1안인 ‘이직하기’를 가장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안들도 조금씩 진행하고는 있었다.
2안인 ‘작기 데뷔하기’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 상황에서 제대로 글을 쓸 시간이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이다. 이대로면 영영 2안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글을 다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원고를 한 파일에 정리하기만 했다. 그리고 여러 출판사를 탐색해, 메일 주소를 모아두기 시작했다. 추후, 내 작품을 투고하기 위함이었다.
3안인 ‘다시 프리랜서 일감 찾기’는 자료 조사 위주로 했다. 크몽 같은 외주 사이트에 들락날락하며 요즘 어떤 것이 유행하는지 파악했고, 그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업이 무엇이 있을지 미리 생각해두었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세 가지 계획안과 E사 업무를 어찌어찌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한 광고주로부터 재 PT를 하자는 요청이 온 것이다.
재 PT란 발표까지 끝낸 경쟁 PT 건을 다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광고주가 어떤 광고대행사를 선정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 혹은 어떤 제안도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제안도 받아보고 싶을 때 이런 요청을 주곤 한다. 이번 상황은 전자에 속하는 경우였다.
재 PT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팀의 관점에서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좋은 소식인 이유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나쁜 소식인 이유는 기회가 또 주어졌음에도 결국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떨어질 거면 처음부터 떨어지는 게 좋았다. 2배로 투자한 시간과 돈을 잃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내 입장으로만 따지자면 재 PT 소식은 당연히, 100% 나쁜 소식이었다. 재 PT란 경쟁 PT를 다시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야근을 또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고강도의 야근을 주로 하게 될 것이다!
야근이 야근이지, 왜 구태여 ‘고강도’라는 수식어를 붙이느냐고? 야근에도 레벨이 있다. E사의 야근에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가 있는데 난이도에 따라 그 종류를 나눠보겠다.
9시 전까지 하는 야근은 레벨 1, 별칭은 사랑스러운 야근이다. 레벨 1에 속하게 되는 날엔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자정까지 하는 야근은 레벨 2이다. 오묘한 야근이라고 부르고 싶다. 때에 따라 기분이 왔다 갔다 했다. 어떤 날에는 뭘 할 수도 없이 늦은 시간에 집에 와서 기분이 나빴고, 또 어떤 날에는 적어도 집에서 잠을 푹 잘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며 몸을 뉘었다.
새벽 3시 전까지 하는 야근은 레벌 3. 이 경우는 무조건 기분이 나쁜 야근이다. 나는 택시를 탄 순간부터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운 순간까지 E사를 향한 저주의 말을 내내 퍼붓다가 결국 지쳐 잠이 들곤 했다.
새벽 6시 전까지 하는 야근은 레벌 4, 별칭은 ‘E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을 퇴근길 택시 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정상적 사고가 불가해진 나는 일출 장면을 그저 허허 웃으면서 지켜보게 된다.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마음이라도 편해지고자 나는 내가 미쳐가는 게 아니라 일류가 되어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밤을 새우다 못해 24시간 이상을 근무하는 야근은 레벌 5다. 이때부터는 사고라는 걸, 감정이란 걸 감히 가질 수 없는 단계이다. 레벌 5에는 여러 변주가 있었다. 철야 작업 도중에 귀가를 허락해줘 집에서 1~2시간이라도 잤다면 레벨 5-1, 작업 도중에 회사 회의실에서 쪽잠을 잤다면 레벨 5-2, 도중에 조금도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고 그저 일만 계속했다면 레벨 5-3이다.
경쟁 PT를 진행하게 되면 대개 높은 레벨에 속하는 야근을 하게 된다. 한동안 밤을 새우겠구나 싶어, 미리 알아둔 여러 출판사에 한꺼번에 투고를 넣어버렸다. 지금 앞뒤 잴 때가 아니었다. 한시 빨리 야근 지옥에서 탈출해야 했다.
재 PT 프로젝트는 바로 착수에 들어갔다. 저번 경쟁 PT에 제안했던 내용을 다듬었다. 카피를 다시 짰고, 콘티를 다시 그렸고, 시뮬레이션 작업을 다시 했고, 시안 작업을 다시 했다. 예상과 한 치 다를 것 없는 일상이 펼쳐졌다. 매일매일 레벨 3, 4, 5급의 야근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끔찍했다.
더 끔찍한 건 출판사 투고 결과가 속속히 나오고 있었고, 그 결과가 전부 탈락이라는 사실이었다. 탈락 메일에는 갖가지의 투고 거절 사유가 적혀 있었다. 소재가 진부해서, 전개가 진부해서, 표현이 진부해서, 캐릭터 설정이 진부해서, 감정선이 진부해서... 등. 그러니까 내 소설이 재미 더럽게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메일 수신 알람이 뜰 때마다 심호흡했다.
오늘은 어떤 메일이 날 울리게 할까. 이번에 과연 어떤 거절 사유가 적혀 있을까.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와중, F사 2차 면접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당탕 어리둥절 빙글빙글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라고 해야 할지, 기어이라고 해야 할지. 하여간 재 PT 마감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감 전에 밤샘 작업을 또 한 나는 아침 해가 떴음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사무실을 번견처럼 지키고 있었다. 이제 E사가 내 집인지, 내 집이 E사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일하는 척 남몰래 멍을 때리고 있었다. 초점이 나간 시야로 모니터 너머의 허공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원이 켜니 메일 알람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 틈도, 가슴 조일 틈도 없었다. 미리 보기 창에서 보이는 메일 제목에는 또박또박 그 출처와 본론이 적혀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