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우진우 Sep 02. 2022

26. 최종 면접날인데 출근을 했다

다섯 번째 회사 : 광고회사 E사(6)

 회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장 일어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아닌가. 너무 기뻐서 뒷목 잡고 쓰러졌으려나. 어쨌건 이곳은 회사였고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던 나는 평정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메일함을 열었다. 합격 메일 전문에는 믿기지도 않게 내 원고를 칭찬하는 말로 일색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맨 하단에는 가계약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열어보니 상세한 계약 조건을 볼 수 있었다. 정산 비율, 계약 기간, 유의사항 등을 차례대로 확인한 나는 문득 갑과 을의 항목에 눈을 돌렸다. 을에는 출판사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갑 자리에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내 이름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가계약서 일부 캡쳐


 내가 갑이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A사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을이라도 되고 싶다고 울부짖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갑이 되어보았다.


운이란 건 없다고. 모든 건 명확한 인과 속에 놓여 있는 법이라고. 뇌종양을 진단받았을 때 그리 생각했건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토록 운이 좋을 수가 있나.


나의 이 보잘것없는 글에서 어느 한 출판사가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주는 경우도, 그리고 그 출판사가 내게 계약서를 주는 경우도 확률적으로 희박했다. 나는 믿지도 않은 신의 자비로움을 느꼈다. 메일 창을 닫고서 누구일지 모를 상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출판사와 몇 차례 대화를 주고받은 후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2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E사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순간이었다. 나는 슬슬 퇴사할 각을 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안 지나 전화가 왔다. F사 인사 담당자님, 그러니까 엔젤님한테서였다. 그는 2차 면접 결과의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어서 3차 면접 안내를 해주었다. 어느덧 F사 채용 전형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3차 최종 면접은 대면 면접이었다. 이번에는 F사에 직접 가야 했다. 화상으로 면접을 진행하지 않아 살짝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재 PT 건이 끝나서 팀 일정이 다소 널널해진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타이밍 좋게 팀장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간 고생했으니 쉬고 싶으면 쉬어도 괜찮다고. 이렇게나 연달아 운이 좋을 수 있나? 쾌재를 부르며 3차 면접이 잡힌 날에 휴가를 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E사 쉬는 날이자 F사 3차 면접날이 왔다. 늦은 오후에 면접이 잡힌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면접 준비를 천천히 시작했다. 예상 질문 리스트를 뽑아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예행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E사 메신저 알람이 떴다. 불길한 마음만 한가득 안고 내게 온 메시지를 읽었다.


 [진우씨! 이 배너, 수정해야 할 것 같아요. 광고주로부터 수정 요청이 왔어요. 급한 건인데 혹시 바로 수정본 받을 수 있을까요?]


 컨펌을 다 받고 이미 광고 집행에 들어간 배너였다. 그래서 더 수정요청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따로 파일을 챙겨오지 않았다. 곤란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해당 이미지가 복잡하고 어려운 디자인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새로 작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찌어찌 집에 있는 컴퓨터로 배너를 다시 작업했고 수정본을 전달했다. 그렇게 이 돌발 사건은 끝이 날 줄 알았으나 메신저 수신 알람은 계속해서 울렸다.


 [이 배너도 수정 요청이 왔어요!]


 나는 면접 준비를 멈추고 E사 업무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결국,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영상 수정 요청도 새로 왔어요.]


 해당 영상은 내일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 중으로 당장 수정본을 줘야 했고, 작업 파일은 회사에 있었으며, 다시 작업할 만큼 영상 구성이 단순하지도 않았다. 나 혼자서, 그것도 집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것이다. 현재 시각은 점심. 아직 F사 면접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얼마간 고민하던 나는 자리를 박차 일어났다. 정장을 챙겨 가방에 담고 화장을 급하게 하고 신발장 속 구두를 꺼내 신으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E사에 출근해야 했다. 아무리 오늘이 내 쉬는 날이어도, F사 면접 날이라 해도 광고는 무사히 송출해야 할 것이 아닌가.


 E사 사무실에 도착하고 나서 헐레벌떡 컴퓨터를 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나마 요청이 까다롭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문구 위치와 내용 변경 정도뿐이었다. 빨리 작업을 마치고 수정본을 기획팀에 넘겼다. 한숨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또 메신저가 왔다.


 [이것도 수정해달라네요.]


 시계를 쳐다보았다. F사 면접까지 2시간 남은 상태였다. 아직 시간이 괜찮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스스로 다독이며 의자 바깥으로 튀어나갈 듯한 자세를 바로 고쳤다.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작업하고 다시 수정본을 넘겼다. 그렇지만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소용없었다. 수정 요청은 또 날라 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요청을 준다는 건 광고주의 의견이 확고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보아하니 최대한 다양한 버전을 받아 그중에서 하나 선택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부디 광고주의 마음에 드는 버전이 한시 빨리 나오길 빌며 길 찾기 어플을 켰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면접 준비는 포기한 상태였다. 면접장에 멀쩡한 꼴로 제때 도착하기라도 바라며 경유 시간을 측정했다. 지하철보다는 택시가 더 빠르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바로 택시 호출 어플을 켰다. 미리 주소를 입력해두었다.


그다음 다시 작업에 집중했고 또 한 번 수정본을 넘겼다. 초조하게 광고주 답변을 기다렸다. 몇 십분이 흐른 후, 기획팀의 ''이 내 자리에 찾아왔다.


 “이대로 통과랍니다! 쉬는 날인데 수고하셨어요.”

 “정말이죠? 진짜죠?”


 나는 쉽게 믿지 못하고 거듭 물어보았다. 광고주의 연이은 요청에 경도 지쳤던 모양인지, 그의 안색에는 피로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요청이 드디어 끝남에 경도 기뻤던 모양인지, 그는 내 질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나는 즉시 택시 호출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을 벗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몇 분 뒤, 호출한 택시가 내가 지정한 곳 앞으로 왔다. 이제 F사 면접만 생각하면 됐다. 나는 택시에 탑승하자마자 가방에 넣어둔 면접 질문 예상지를 꺼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 면접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불현듯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종이에 가 있던 시선을 창 너머로 옮겼다.


여전히 저 멀리 E사 건물이 보였다. 아까부터 전혀 택시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하필이면 퇴근 시간대라 차량 정체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대로면 정말 늦을 것이다.


 어쩐지 요새 운수가 좋더니만.


 소설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처럼 제일 중요한 순간에 불행을 맞닥뜨리게 된 나는 잠시 자조 어린 생각을 가져보았다. 결국 도중에 택시에서 내렸다. 지하철 역사를 향해 뛰어갔다.


구두는 오랜만에 신어보았다. 운동화의 푹신함에 익숙해진 내 발은 뛸 때마다 자꾸 아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발뒤꿈치는 따끔거렸고 발바닥은 아렸다. 나중에 가서는 새끼발톱까지 욱신거렸다. 윽,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계속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어떻게 제시간에 F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시간이긴 했는데 너무나도 제시간이었다. 고작 5분 일찍 F사 건물에 도착한 것이다. 부디 이런 모습이 감점 요인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F사 엔젤님의 안내에 따라 면접장 안으로 들어갔다. 3차 최종 면접은 1시간 정도 소요됐다.


면접을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찬찬히 복기해보았다. 결과 당락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분위기가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도 알기 힘들었다. 최종 면접답게 어려운 질문이 많이 나왔고 나는 그 모든 물음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한 까닭이었다.


구두를 꺾어 신은 채로 뒤뚱뒤뚱 지하철에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뒤늦게 발뒤꿈치가 다 까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피가 난 자리에 반창고를 붙이고서는 다시 갸우뚱 걸음을 이어갔다. 아프긴 해도 마음은 흡족했다.


정말이었다. F사 면접은 내가 가장 잘 본 면접은 되지는 못했으나 내가 가장 간절하게 본 면접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그에 뿌듯함을 느꼈다. 설령 F사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전보다는 덜 후회하고 덜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일주일이 지났고 F사 3차 면접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이전 25화 25. 우당탕 작가 데뷔기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6번의 퇴사와 7번의 입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