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퇴사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회사 : 광고회사 E사(7)
1안인 이직하기, 2안인 작가 데뷔하기. 어쩌다가 1개월 반만에 목표했던 계획안 2개를 이뤄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퇴사 통보였다.
늘 마지막 근무 날짜가 정해진 계약직 인생만 살아봐서 그런지, 상사에게 퇴사 의사를 밝히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멋지게 빡! 사직서가 든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야 하나? 혹은 비장한 얼굴로 ‘줄 게 있으니 휴게실로 따라오세요!’라고 어느 영화 주인공처럼 말해야 하나?
감을 영 못 잡겠어서 인터넷에 시도 때도 없이 ‘퇴사’를 검색해보았다. 퇴사 잘하는 법, 퇴사 인사말, 퇴사 메일 형식, 사직서 양식 등 다양한 제목의 퇴사 관련 콘텐츠가 나왔다. 참고할 건 많아 보였다. 심지어 퇴사 브이로그까지 심심찮게 있었다. 웬만한 건 다 감상해보았다. 나는 유쾌하게 퇴사하는 어느 유튜버의 모습 위로 내 모습을 덧대었다. 어쩐지 나도 저 사람처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품든 말든, 퇴사 각을 재는 건 쉽지 않았다. 근래 도저히 그만두겠단 말을 꺼내기가 힘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팀 일정이 (언제는 안 바빴냐만은) 평소보다 곱절은 더 바쁜 상태였다. 재 PT 가 끝나 여유로웠던 것도 잠시였다. 한 삼사일 정도 여유로웠던 것 같다.
그 뒤 바로 마감 기한이 급한 PT 건에 투입됐다. 더불어 다른 프로젝트의 촬영 일까지 겹쳐서 매일매일 팀원들 모두가 촬영장, 편집실, 녹음실 등 동분서주로 뛰어다녔다. 그런데 막내 사원인 내가 어떻게 퇴사 통보를 하겠는가. 나는 원고 투고 합격한 순간부터 말하기 적절한 날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그냥 질러버렸다. 가장 바쁘고 가장 번잡스러운 날에.
“잠깐 시간 되실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늦은 시간, 업무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을 때였다. 서로 수고했단 말이 오고 가는 와중에 내가 불쑥 마 팀장님께 건넨 요청은 정말이지, 상황에 적절치 못한 말이었다. 단숨에 사무실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일제히 쏠렸음이 느껴졌다. 벌써 내 뒷말을 짐작한 팀장님은 당혹스런 얼굴을 보였다.
“그래. 다른 곳에서 이야기 나누자.”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 팀장님과 단둘이 있게 됐다. 퇴사 관련해서 이것저것 읽어보고 조사해보고 그랬으나 막상 내가 그 상황에 처하게 되니 긴장으로 들러붙은 입술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얼마간 머뭇거리다가 본론에 겨우 들어갔다.
“E사를 퇴사하려고 합니다.”
이미 눈치챈 팀장님은 내 퇴사 통보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긴 한숨을 여러 차례 걸쳐 내쉴 뿐이었다. 한참 뒤에 팀장님은 퇴사 이후의 계획은 있느냐고 물었다.
지난날, 인터넷에서 퇴사 관련된 것들을 찾아봤을 때 이런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있었다. '퇴사할 때 굳이 자신의 사정을 다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저 일신상의 사유로 그만두게 되었다고 두루뭉술 말하거나 혹은 유학이나 대학원을 가게 되었다는 무난한 계획을 대는 편이 제일 좋다고들 했다.
나도 동의했다. 저 말들은 성의가 없거나 거짓말이 되어버리지만,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어쩐지 그 의견에 동의한 것과는 별개로 마 팀장님의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예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팀장님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광고는 더 안 해? 왜?”
왜냐고? 광고를 안 하려는 이유는 많았다. 광고대행사는 힘들어서, 야근이 많고 업무 난이도가 높아서, 나는 일보다는 내 일상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서, 글을 쓰고 싶은데 쓸 시간이 없어서, 더는 내 행복을 내려놓고 일하기는 싫어서, 이쪽에 별 재능이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결국 그것들은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광고를 마 팀장님을 포함해 E사의 사람들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광고 일을 더 할 생각도, 보다 잘하고 싶단 생각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광고인은 참 신기한 존재 같다. 능력도 재주도 경력도 출중한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그 많은 업계 중에서 하필 힘들기로 정평이 난 광고 업계에 자발적으로 들어와 제 모든 것을 불사르듯 투자한다.
한때는 어디서 그 열정이 발산되는 건가 궁금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건 그들의 사랑에서 오롯이 기인된 힘이었다. 나처럼 15초, 30초짜리의 영상에 잠시 매료되는 것만으로는 안 됐다. 흠뻑 빠져야 했다. 광고인이 가져야 할 자질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겠으나 그 절대적인 애정이야말로 가장 가져야 할 재능이었다.
나는 내 생각을 축약해서 답했다.
“제가 별로 광고 쪽에 어울리는 사람 같지는 않아서요. 열정이나 실력, 뭐, 여러 모로요.”
말한 뒤 머쓱한 기분이 들어 실없이 허허 웃었다. 반면 마 팀장님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슬금슬금 내려갔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팀장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여기와 어울려. 광고에 열정도, 재능도 있어. 앞으로 너와 어떤 광고를 함께 만들 수 있을지, 팀장으로서 난 기대했다.”
숨이 턱 막혔다. 너무나도 의외로운 말이었다. 찰나, B사에서 인턴을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20대 중반 어느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모두의 앞에서 발표했던 순간, 내 아이디어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를 바라며 집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아이패드를 들고 콘티를 무작정 그렸던 순간, 정답을 찾겠다며 남은 2개월을 오기 부리듯 버텼던 순간.
산발적으로 여러 기억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 팀장님 말에 알 수 없이 그때의 내가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냥 넌 새로 찾은 거야. 광고보다 더 좋아하고, 더 잘하는 걸 발견하게 된 것뿐이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 내 모습은 도망자나 다를 바 없다고 은연중 생각해왔는데 마 팀장님은 절대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광고대행사에서의 지난날은 힘겨웠다. E사 때는 일이 많아 힘들었고, B사 때는 광고 업무가 뭔지 잘 몰라 힘들었다. 하지만 괴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즐거움도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아이디어가 팔렸을 때의 희열, 몇 날 며칠 고생한 경쟁 PT를 결국 따냈을 때의 감동, 하나의 광고를 위해서 촬영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과 그들을 둘러보며 느꼈던 일체감... 그런 것들이 모여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F사 최종 면접 날 수정 요청이 왔다는 메시지를 못 본 척하지 않은 건, 아프다는 핑계를 쉽게 대지 않은 건, 끝내 E사에 곧이곧대로 출근한 건 그 즐거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게도 광고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떳떳하다 못해 유쾌한 태도로 퇴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팀장님 앞에서 보인 건 눈물이었다. 차오르는 물기를 닦아내느라 바빴다. 마 팀장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내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내 퇴사 통보는 예상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