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의사를 밝히고 나서 며칠이 흘렀고 마침내 E사 근무 마지막 날이 왔다. 나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바쁜 하루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업무를 끝내니 저녁 9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같은 팀 사람들을 포함해 E사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친하게 지내던 E사 동료, ‘진’에게도 다가가 인사하려는데그가 문 너머로 손짓하며 물었다.
“잠시 테라스에 가서 이야기 나눌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퇴사 선물을 건넸다. 나는 감사하다고 답하며 받아들였다. 그다음 우리는 나란히 난간에 팔을 기대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진 지 오래라 하늘에는 온통 검푸른 색깔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사위가 밝았다. E사 사무실이 있는 층에 전부 불이 켜져 있는 까닭이었다.
가만히 야경을 보고 있는데, 진이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우님, 정말 잘 됐어요. 그동안 너무....”
말을 하다 말고 그는 제 입술 사이를 꾹 붙였다. 나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내가 울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너무 고생 많았어요.”
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랄게요.”
“진님도요. 꼭, 꼭 잘 지내셔야 해요.”
내 목소리도 떨려 있었다. 진과 나는 만난 지 오래된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는 E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경험을 솔직하게 공유해왔다. 슬플 때는 슬픔을 나눠 가졌고, 기쁠 때는 기쁨을 부풀렸고, 화날 때는 함께 욕해주며 분을 삭였다.
사실 그런 감정의 품앗이는 진뿐만 아니라 다른 E사의 동료와도 해왔다. E사는 일이 많은 회사였지만 동시에 정 있는 이도 많은 회사였다. 진과 나는 얼마간 같이 훌쩍이면서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그 뒤로, 진은 목청을 가다듬고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갔다. 지하철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늦은 저녁인데도 환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E사 건물.
나와 E사 동료들은 저 건물을 OO동의 등대라고 불렀다. 밤이든, 새벽이든 늘상 불이 켜져 있어, OO동 주민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농을 던지며 자조적으로만 바라봤던 저 건물이 지금은 다른 감상이 들었다.
물론 이 시간까지 일하는 행태는 잘못된 근무 방식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야근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과로를 당연시하는 풍토는 낡아빠진 관행의 답습에 불과하다. 새로운 근로기준법이 찾아왔으면 어떤 업계든, 어떤 회사든 지켜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저 건물 안 사무실에서 오늘도 밤을 새우며 일할 사람들의 열정까지 잘못되었다고 폄하하고 싶진 않았다.
‘광고란 무엇인지, 어떤 아이디어가 대체 좋은 건지, 왜 나는 좋은 광고인이 될 수 없는 건지.’
나는 아직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저들은 다를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 모든 답을 찾고야 말겠지. 떠나는 나는 이제 알 길이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답은 분명 눈이 부시도록 근사하리라.
응원합니다,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검푸른 하늘 아래 빛을 산란하고 있는 건물을 향해서 읊조렸다.
E사는 사실상 나의 첫 번째 직장이었다. 처음으로 팀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은 회사이며, 정규직으로서 그간 접하지 못한 업무를 제대로 경험한 곳이었다.
아마 나는 E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20대가 아니게 되고, 모든 기억이 퇴화하여 때가 묻은 추억으로 전락할지라도 나는 이 두 가지 일만큼은 계속해서 기억할 테다. 마 팀장님이 내게 해줬던 진심 어린 말과 진이 눈물을 흘리며 내 행복을 빌어주던 순간 말이다. 그건굳건히 나의 자부이자 원동력으로 남을것이다.
E사 퇴사로 깨달은 건 여러 가지지만 하나만 말하려고 한다. 나는 생각보다 광고 일을 꽤 잘했고 또 좋아했던 사람이다.
광고대행사 E사 정규직 후기
한 줄 평 : “굿바이, 멋진 사람들!”
-주변 식당 *** (식당이 많긴 했는데, 내 취향의 맛집은 별로 없었다.)
-시설 **** (좋았다.)
-복지 ** (야근이 점수를 다 깎아 먹었다.)
-장비 ***** (부족함이 없었다.)
-사내 분위기 **** (업무가 힘들었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E사를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