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보내는 나라가 되고!
초등학교 6학년 말이 되자 곧 중학생이 된다는 기대와 막연한 두려움을 함께 느끼던 시절, 저는 같은 울 안의 중학교에 배정되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머리도 깎고 제복과 같던 교복도 입던 기대감은 물론이고 훌쩍 늘어날 공부의 양, 처음 접하게 될 영어 같은 과목들, 그리고 과목마다 선생님이 달라진다는 신기함이 겹쳐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선배들의 틈에는 종종 젊은 외국인 선생님이 한 분씩 보였던 기억이 불현듯 났습니다. 졸업앨범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분들은 미국에서 온 평화봉사단 소속이라는 걸 알았고 2년마다 교대한다는 사실, 그리고 영어를 담당한다는 사실을 접합니다. 지방의 조그마한 학교까지 파견을 나오는구나. 싶어서, 게다가 외국인 선생님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입학식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3월 2일 입학식이 거행되던 강당에는 외국인의 모습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줄 서 계시던 자리에는 1학년 담당 선생님들만 서 계셨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무실에 계시나 둘러보아도 키 크고 하얀 피부의 선생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분명 저번 중학교 졸업앨범에는 미국인 선생님이 계셨는데?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듣게 된 소식에 따르면 작년부터 평화봉사단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외국인 선생님이 계신다 한들, 늘 내 옆에서 조곤조곤 영어를 가르쳐주실 것도 아니고 나 같은 평범한 아이에게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으셨겠지만 어린 마음에 신기함이나 자랑거리가 없어진 것 같아 내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평화봉사단의 일원이 지방의 소도시까지 파견된 걸 보면 당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도 상당수 자원하여 파견됐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자의 대부분은 20대의 청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자기의 조국과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타국에서의 생활은 굳이 묻지 않아도 불편했을 게 뻔합니다.
이제는 그때의 사실이 추억이 되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형편이 남을 도와줄 만한 여건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살펴보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 도움과 배려는 그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겠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눈에 보이고 쥘 수 있는 것보다 내 발걸음을 그곳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있는가?라는 질문이 늘 내 곁을 맴돕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뜻 손을 내밀며, 시간을 내며, 불편조차 감수하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삶에 지쳐 주위를 돌아볼 여유마저 뺏기고 산 듯하여 내내 슬프고 염치없었습니다.
부디 이 상황이 내 욕심만 채우려 생겨난 게 아니면 좋겠습니다. 사실 후원(後援)이라는 것이 금액이나 물품의 문제가 아니요,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누군가 그러시던데 그들의 눈에 사랑하는 마음이 비치지 않으면 억만금을 받는다 한들 전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라는 말은 이래서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