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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잘 자르는 법.

by 단어

오늘도 카톡이 울린다. 알바생들이 모여있는 카톡방이다. 처음에는 사무적인 얘기들만 오고 가다가 좀 친해진 이후로는 우리들의 메모장이 되어버렸다. 알바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자신의 통장잔고 이야기와 점심으로 학식을 먹었다는 등의 사소한 이야기들까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들이 이 카톡방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 안에서 알지만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다. 글을 쓰는 나와 휴학생인 나와 교회를 다니는 나는 이 안에서 그냥 알바생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은 숨긴 채로, 이 카톡방안에서는 그냥 알바생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하루는 하라무와 둘이 일을 하다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 같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봤고, 하라무는 너무 친절하게 대하다가 언젠가부터 지쳐버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하는 하라무의 얼굴이 조금은 슬퍼 보여서,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서 더 자세하게 묻지 못하고 "아무래도 그렇긴 하지."라고 말하며 동시에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복이와 너굴맨. 이 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기에 쓸데없이 다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복이는 처음 봤을 때는 작고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툭툭-던지듯이 말하고 인사도 시크하게 받아주며 그 와중에 일은 민첩하게 잘했기 때문이다. 알바생들 중에 여기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기도 하니 밉보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두 번째 날이었나 오는 길에 크로와상을 한 봉지 사 와서는 같이 먹자며 건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시크하게.


"헐 언니 이거 뭐야?"

(사실 세복이는 나보다 언니다.)

"크로와상. 오는 길에 있어서 사 왔어."

"맛있겠다! 엄청 많이 사 왔네?"

"여기 별로 안 비싸. 한 봉지는 내 친구 줄거고, 한 봉지는 우리 같이 먹자."


나는 바삭하고 부드러운 크로와상을 먹으며 꼭 세복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티 내지 않고 생색내지 않지만 마음은 따듯한 사람, 말은 툭툭 던지듯이 말해도 그 안에 다정함이 들어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복이도 그런 사람이구나. 겉은 말랑말랑한 푸딩처럼 보여도 속에는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크로와상 같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기에 세복이가 더 좋아진다. 이후로도 세복이는 알바생들의 붕어빵 취향을 물어보고, 팥붕파와 슈붕파를 잘 정리한 뒤 각자의 취향을 담은 붕어빵을 사 온다. 역시나 시크하게 사 와서 시크하게 건넨다. 나는 그런 세복이의 무심한 듯한 애정이 좋다. (아마 나였다면 내가 붕어빵을 사 왔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너굴맨은 우리 매장의 매니저이다. 매니저이자, 기술자이자, 테마 개발자이자, 회계이자..... 그냥 다 한다. 못하는 것 빼고 다한다. 아니 못하는 것도 어찌어찌해낸다. 내 기준 세상에서 할 줄 아는 게 가장 많은 사람이다. 평일에는 매장에 손님이 별로 없기에 나는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너굴맨을 돕는다. 초등학교 종이접기 방과 후 시간 이후로는 종이를 섬세하게 잘라본 적도, 깔끔하게 코팅을 해본 적도 없는 나이기에 아주 쉬운 일도 아주 어렵게 해낸다. 종이는 왜 자꾸 미끄러지는지, 커터칼은 왜 일자로 가지 않고 자꾸만 자를 벗어나는지, 자를 고정하는 내 손은 왜 이리 작은지. 한 번에 깔끔하게 자르지 못하고 또 프린터 하고, 또다시 프린터 하고. 내가 봐도 답답하다. 하지만 이런 나를 바라보는 너굴맨은 나에게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다. 잘 자르다가도 한 귀퉁이가 삐뚤어져 쓸 수 없게 된 종이를 보며 한숨 쉬는 나에게 언제나 괜찮다며, 다시 뽑아서 자르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종이를 예쁘게 한 번에 잘 자르는 방법을 알려준다. 종이 자르는 것도 기술이라고, 지금 배워두면 분명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거라고 말하며 자세하게 하나씩 알려준다. 나는 너굴맨에게 종이 잘 자르는 법, 코팅 깔끔하게 하는 법, 시트지 붙이는 법 등등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필요할 지식들을 배운다. 그리고 지켜봐 주는 법을 배운다. 너굴맨은 언제나 똑같이 말한다.


"지금 내가 하는 거 잘 봐 뒀다가, 다음에 잘하면 되는 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최고야 최고."


나는 이제 종이를 잘 자른다. 판 위에 종이를 놓고, 긴 자를 손으로 세게 고정한 다음, 칼을 자에 딱 붙여서 일자로 주욱 그어 내리면 된다. 한번 실수해도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나에게는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곧 세복이와 너굴맨 둘 다 이 매장을 떠난다. 세복이는 작고 가끔은 덤벙대지만 언제나 꼼꼼한 간호사가 되어 병원으로 출근할 것이고, 너굴맨은 또 새로운 직장을 찾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밝고 씩씩하게 웃으며 일할 것이다. 나는 이들의 다정이 쓸데 있는 다정함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의 다정 덕분에 나는 나의 하루가 더 좋아졌고, 실수해도 다시 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당신들 덕에 나도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한 사람을 바꾸는 다정은 온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니까.

조금은 지쳐있는 하라무에게도, 작고 시크하고 귀여운 세복이에게도, 언제나 단단한 웃음을 짓고 있는 너굴맨에게도 내가 받은 다정과 내가 들은 응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세상이 친절함과 다정함을 가져가려 할 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거라고, 네가 최고라고. 따듯한 붕어빵을 건네며 말해주고 싶다. 나는 이들의 지난 이야기들은 알지 못한다. 어떤 시간을 거쳐서 여기에 왔고 그 시간 동안 울었는지 웃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정함 속에 담긴 사연들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들은 알 수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종이를 자르면 자를수록 더 잘 자르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다정한 인생이 다가오기를. 앞으로의 나날들은 더 따듯하기를 바라며 이들을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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