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낯선 세상

그럼에도 적응해야만 하는

by 봉필


"그런 일이 있었나."


우리 가족은 시흥으로의 이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나는, 중학교 교과서를 받으러 입학일 전에 먼저 학교를 다녀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집을 나섰다. 아마도 나의 중학교 입학이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에 비해 늦어진 탓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사복 차림이었고 학교에는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로 북적였다. 2월 초였으니, 2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교복을 입고 있는 형님 누나들 사이를 유유히 헤쳐 지나가며 교무실로 향했다. 얘는 뭐지? 하는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면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겪었던 첫 전학의 순간을 떠올렸던 듯도 하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낯선 아이. 어린 나이에 나 홀로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성하여 학교를 걸어 다니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상상 이상의 용기까지는 갖추지 못했었고, 그렇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무사히 교과서 십여 권을 가방에 한가득 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도착하자마자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까지 뚜렷하게 나의 울음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 언제나 나만 그런 상황들에 처해야 했는지 많이 억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나름의 방어기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적절히 기억을 지워가면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돌이켜 보면, 어린 나이에 감당 못할 만한 일들을 참 많이도 겪어왔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기는 한다.


본디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약한지 강인한지에 대해서 누구든지 논한다면, 당연히 나약함 쪽으로 손을 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 않은가. 어린 날의 나는,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한참은 더 연약한 존재였을 것이 분명하다. 생채기는 덧대어질수록 더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인식하는 스스로를 무뎌지게도 하는 법이다. 일일이 언제 어디서 생겨난 생채기인지 모를 정도로 수없이 겹쳐지면, 애초에 원래부터 생채기와 한 몸이었던 듯 살아갈 수도 있는 인생이다. 어쩌면 인생 속에서 고통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수없이 쌓아가며 무뎌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또래 친구들과 입학 일자는 같았지만 나의 출석 번호는 40번대였다. 정상적으로 입학 처리가 되었다면 가나다 순으로 배정받는 출석번호이기에 10번대나 20번대 초반이었어야 하지만(나의 성은 '신'씨이다), 뒤늦게 입학 처리가 된 탓에 전학생의 번호와 다를 바 없는 가장 끝번호를 떠안게 된 것이었다. 숱한 전학으로 얼룩져 있었던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전학생 타이틀을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런 이방인으로서의 족쇄는 좀처럼 나로부터 멀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좋은 분이었다. 항상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내뿜던 체육 선생님이었는데, 덕분에 생경한 감상들로 떠나보냈을지도 몰랐을 1학년 시절을 아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지난날들 속에서 쌓아온 인생 노하우를 바탕으로 학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선생님의 두터운 신망을 쌓아나갈 수 있었고, 수업 태도나 학습 습관이 어느 정도 잡혀있어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40명 남짓되는 학급 내에서 5등 정도의 등수를 어렵지 않게 유지할 수 있었다. 성실한 이미지를 잘 구축해 나가면서 학급 임원은 되도록 맡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들 앞에 섣불리 나서는 행위가 나름대로 치명적인 리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지난 경험들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양날의 검은 애초부터 쥐지 않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던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 시절에 꽤나 절친한 친구들도 여럿 사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연락하고 지내는 16년 지기 친구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나의 (다소) 독특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변덕스럽고, 또 뭐 하나 꾸준히 못하는 성미를 지닌 사람을 옆에서 참아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낯선 환경들에 적응하느라 때때로 움츠러들 때도 있었지만, 1학년 때만 해도 천진난만함을 나름대로 장착하고 있었던 터라, 많은 친구들에게 주저 없이 먼저 다가가곤 했었다. 대부분이 근처에 위치한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쁜 와중에, 혼자 한가로이 쉬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기에, 나는 우선적으로 그런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홀로 된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단축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달까.


"넌 이름이 뭐야?"


초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중학교는 한 곳에서 입학과 졸업을 함께할 수 있었다. 기실, 언제든 전학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한 나날들이기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기에 다행히 이전에는 없던 안정감을 생활 속에 더해갈 수가 있었더랬다. 다년간 친구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과, 한 학교에서 3년 동안을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비교적 안정적인 학교 생활을 보낼 수가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과격한 일들은 그 기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무탈, 그 두 글자가 참 잘 어울리는 나날들이었지.


중학교 2학년까지는 그렇게 평범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공부 습관이 자리를 잡으면서 성적도 지속적으로 향상해 나갈 수 있었다. 어느새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역시 좋은 분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나를 특히나 아껴주었고, 나 역시 늘 시험 성적으로 그 마음에 보답했었다. 어느새 나는 학급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의 성적을 내고 있었다. 특별히 학원을 다닌다거나 과외 같은 것들을 하지 않았지만(애초에 그럴 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수업 시간의 학습 태도, 그리고 언젠가부터 몸에 익은 예습과 복습을 바탕으로 상상 이상의 성과를 낼 수가 있었다.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통해 접했었던,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 '교과서 위주의 공부'와 같은 당연한 비법들을 줄줄이 뱉어대는 수능 만점자의 인터뷰에 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가 있었다고. 나 역시도 만일 지난날 수능에서 만점을 받았더라면, 그런 식의 뻔한 인터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공부 자체에 자신감도 붙었고, 웬만해서 학교 수업 중에 이해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했었던 나는 다가오는 겨울방학에 예상치 못했던 폭풍에 휩쓸리고 만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도 커다란 방점을 찍게 만든 커다란 폭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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