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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14. 2021

가을밤에 든 생각 (1)


 힘겹게 또 오늘을 살았다. 버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침대에 누워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묵은내가 진동을 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조그마한 공간을 소리가 가득 채웠다. 그제야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들이 얼굴에 고깔을 쓴 채 코끼리코를 돌고 있었다. 고깔의 바늘구멍만 한 구멍에 의지한 채 목표물을 먼저 잡는 게임이었다. 구멍이 작아 맨 눈으로 보는 것보다 크게 보이는 탓에 쉽게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누워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두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무언가를 먹는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모자를 눌러쓰고는 슬리퍼를 직직 끌며 재빨리 밖을 나섰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졸고 있던 점원이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반쯤 감겨 있는 눈으로 나를 반쯤 쳐다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3일 동안 씻지 않은 나의 몰골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일순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냥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기민하게 가격이 가장 저렴한 도시락을 한 손에 들고 그 위에 가격이 가장 저렴한 컵라면을, 다른 쪽 손에는 소주 한 병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삑, 삑, 삑.


 주머니에 있던 구겨진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무표정한 얼굴로 바코드를 찍어대는 점원에게 내밀었다. 그는 손으로 돈을 하나씩 펴서 금고에 넣은 후 잔돈을 나에게 내밀었다.


 비닐봉지…….


 미리 말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말끝이 흐려졌다. 점원은 능숙한 손길로 봉지를 뜯어서는 물건들을 담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건네받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편의점 밖을 나섰다. 그는 멀어지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잠을 깨워서 조금 날카로운 것을 빼면 점원과 나의 관계는 매우 상보적이었다. 물건을 구매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 단순함은 나의 하루의 일과 중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사히 물건을 구매했다는, 아니 해냈다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집으로 향했다.


 원룸텔에 도착하자 도시락을 데워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공용 주방에 전자레인지가 있었지만 소음 때문에 한밤중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아쉬움에 짜증이 치밀었다.


 씨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방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살아있는 코끼리의 코를 돌리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광고가 끝난 지 한참 지난 모양이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것을 침대 위에 조심히 올려놓고는 컵라면을 집어 들었다. 면이 불면 국물이 줄어들기에 후루룩, 면발 한 젓가락 크게 입에 넣고는 소주를 마셨다. 쌉싸래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따갑게 쓸어 내려가자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데우지 못한 도시락의 밥알이 어색하게 입안을 맴돌았지만 컵라면의 국물과 함께 먹으니 제법 조화를 이루었다. 그렇게 새벽을 늘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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