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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Sep 14. 2021

가을밤에 든 생각 (2)

  눈을 뜨니 먹다 남은 음식물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그것들을 한데 담아 변기에 버리고는 쓰레기를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이미 보관 중인 쓰레기들이 꽤 많은 탓에 쑤셔 넣어도 자꾸만 밖으로 밀려 나왔다. 슬슬 쓰레기를 버릴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나는 삐져나온 쓰레기를 방구석에 대충 던져 놓았다. 켜 둔 채로 잠이 들었던 텔레비전에서는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가 진지한 얼굴로 세상의 가장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들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사한 지 세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침이면 눈이 떠졌다. 오 년이란 세월 동안 일찍 일어나는 게 적응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거기에 아무런 계획 없이 지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의 일환까지 더해져 아무리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는 몸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하루는 길었지만 하는 일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종일 휴대폰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허리가 아프면 몸을 뒤집는 것 외에 움직임도 제한된 삶이었다. 햇빛 좋은 날 밖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도 읽고 싶었지만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서는 식당에서 밥도 못 먹는 내향적인 성격은 회사를 그만둔 뒤에 더욱 심해졌다. 다행히 밤은 괜찮았지만 낮에는 좁은 원룸텔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눈을 감는다는 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시간을 보니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긴 낮잠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따 다시 잠을 잘 수 있을까란 고민도 잠시, 허기가 밀려왔다. 그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모자를 대충 눌러쓰고 방을 나서려다 미간을 찌푸리던 점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을 보니 추레한 고깃덩어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미칠 듯한 허기짐에 그냥 갈까 고민도 됐지만 눈치를 보는 성격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샤워를 한 김에 쓰레기까지 비우고 밖을 나섰다. 뽀송한 살결 위로 선선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귓가에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입에서는 나도 몰래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원체 추위에 약한 탓에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야 되는 체질이었다. 그런 내가 가을이 왔다는 사실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순전히 밤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옷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총총 걸어갔다.


 편의점에 도착하니 예의 점원이 나를 향해 인사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맞인사를 하고는 가격이 가장 저렴한 도시락과 가격이 가장 저렴한 컵라면, 소주 한 병을 내밀었다. 점원은 그것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나는 목례와 함께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이제 집으로 간다면 평소와 같은 상보적인 일과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긴 낮잠 끝에 외출을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웠다. 오랜만에 샤워를 한 탓인지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 찾아온 탓인지 없던 용기가 샘솟아 밖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나는 음식을 조리해서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았다. 조그마한 일탈에 심장이 놀랐는지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주를 한 모금 털어 넣었다. 그래도 진정이 되는 거 같지 않아 다시 한 모금, 한 모금. 그렇게 반 병을 비우자 진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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