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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편안 Jan 01. 2021

뜬금없긴 한데, 어떻게 살고 싶어요?

<시에 인생을 담다_삶과 죽음>

어릴 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았다. 모든 것이 다 신기했고, 궁금했다. 가끔 지인들이 그래서 연구원이 된 게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그건 나의 실체를 모르는 소리다. 내가 생각하는 건 모두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쉽사리 지나치는 사소한 것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 학교로 가는 길과 돌아가는 길이 달랐다. 그때는 미세먼지와 코로나가 없어서 자유로이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킁킁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학교를 마치고 빙 둘러서 집으로 가곤 했다. 돌아가는 길은 한산한 차도였다. 차도에는 낡은 방지턱 하나가 있었다. 나는 걸어갈 때 노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네모난 장난감을 유심히 보았다. 처음 그 길에 들어서면 너무 멀어서 저게 방지턱인지 한 줄로 그려 놓은 것인지 헷갈렸지만, 걸어갈수록 점점 커져서 내 앞에 떡하니 '나는 방. 지. 턱이요.'라고 존재감을 뿜어댔다. 이제 나만 신기한 게 나온다. 지금보다 더 짧은 다리로 방지턱을 폴짝 넘자 자신을 뽐내던 방지턱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단지 매끈한 진회색 도로에 반듯이 자리 잡은 하얀색 직선만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만 안 보일 뿐 여전히 방지턱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선

노란색과 흰색을 뽐내는 네모

네모가 사라진 직선

여전히 내 뒤에 있는 네모


중학생 때, 문득 시계를 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분명 12개의 숫자에 따라 같은 속도로 분침과 초침이 이동하는데, 왜 내가 느끼는 시간은 다른 걸까. 시험 기간 일주일은 몸을 배배 꼴수록 느리게 가고, 정작 시험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간에는 연필을 얼마 쥐지 않았는데 끝난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1분을 초 단위로 세며 시곗바늘을 옮겨놓고 싶지만, 편안한 사람을 만나면 함께 더 있고 싶어서 일부러 시계를 안 보며 버티나 야속하게 시간은 휭 날아간다. 피하고 싶은 시간은 느리게 가고, 붙잡고 싶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다니. 이건 누가 억하심정을 가지고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지만 느끼는 것이든 생각해본다. 자잘한 사소한 생각을 하다 보면 마지막은 중요한 생각에 다다른다. 육체는 보이지만, 영혼은 보이지 않는데 왜 영혼이 떠나면 죽는 걸까. '사람은 어떻게 살 수 있는 걸까?' 심장이 있고,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이 있기에 사는 거지만, 이건 육체가 살아 있는 걸 말할 뿐이다. 내 주체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걸어갈 길을 계획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내가 말한 행동이란 꼭 움직이는 행위를 말하는 건 아니다. 마음의 행동을 말한다. 정반대의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빽빽한 일정을 잡고 젊음과 능력을 뽐내며 살지만, 정작 자기 마음을 볼 시간을 내지 않고, 주변 사람의 마음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삶은 몸은 바삐 움직여도 마음이 멈춘 것이기에 아름답지 않다. 반대로 다른 사람은 육체에 힘이 없어서 느긋한 일정으로 그저 살아가지만, 그 덕분에 늘어난 시간으로 자기 마음을 보고, 안에서 울고 있는 내면 아이의 상처를 토닥이다 보니 주변 사람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본다. 비록 몸은 멈춘 것 같아도 마음이 따뜻하게 움직이기에 삶이 아름답다.


어떻게 아름답게 살고 싶은가?

생각이 많은 나는 매번 내가 한 질문에 머리가 복잡해지면 반대로 질문해본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사실 모르겠다. 그저 편안하게 죽고 싶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 더 좋지만, 내가 표현한 '편안'이란 주변 사람 마음에 대못을 꽂지도 내가 박히지도 않은 채, 마음을 나누다가 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이다.


삶과 죽음을 어떤 이는 두 개가 아닌 하나라고 말한다.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죽을 때 모습이란다. 나는 이 말이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끔은 머리 아프게 고민해볼 만 하지 않은가.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다. 주변에서 혼날 때도 있지만, 앞으로도 많을 것 같다. 내가 계속 생각하는 건 조그마한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감당 안 되는 내 생각이 언젠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공감과 편안함을 줄 수도 있는 거니까. 그것이 내 몸에서 풍기는 모습이든, 입으로 나오는 말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혹은 죽고 싶은지,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진다.


"뜬금없긴 한데, 어떻게 살고 싶어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는 반응을 보이지만, 놀랍게도 잠깐 눈을 치켜뜨면서 고민을 한다. 다들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부끄럼쟁이들. 한 친구의 대답이 생각난다.


'난 죽어서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동안 이 대답은 내 마음을 휘젓고 다녔다. 그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쯤에 쓴 시는 죽음과 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많다.


이 시도 그중 하나이다. 화자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남편이다. 한 줌 재가 되어버린 아내의 함을 보며 남편은 자신의 눈과 귀, 입이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단 걸 깨닫는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해준 것이 없어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지만, 이내 좋은 추억이 떠올라서 웃고 만다. 더는 아내가 없지만, 남편의 기억 속에는 또렷이 살아있다. 어쩌면 내 친구도 이 아내처럼 살고 싶은 게 아닐까?


<널 위한 눈과 귀와 입>


겨우 서서

네가 있어야 할 옆자리를 보다

마른 눈물이 난다


눈은 보라고 태어났음에도

왜 너의 모습을 보지 못하나


귀는 들으라고 태어났음에도

왜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나


입은 말하라고 태어났음에도

왜 네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나


주저앉아

네가 없길 바라는 고운 함을 보다

젖은 웃음이 난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새해를 맞이하여 따뜻한 축복을 보내며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Happy New Year.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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