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나는 방 안에서 잠시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고 깨어났다. 홀로 수업 자료를 들고서 문이 닫힌 교실들을 사이에 두고, 긴 복도를 끝없이 헤매는 꿈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발신인은 휴직 중인 K고교에서 상담 교사로 근무하는 선영이었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선영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요즘 소설책 읽기에 관심이 생겨 선생님께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연락처는 재윤 샘에게서 받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만나서 차 한 잔 같이 해요^^
내용을 확인하고서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K고교에 있던 2년 동안 그녀와 업무 외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교무실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였던 재윤이, 개인적으로 상담실을 자주 찾는다는 것만 알았다.
학교에 소설책을 추천해 줄 만한 선생님들은 차고 넘쳤다. 그녀가 갑작스레 나를 만나려 하는 데는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행위의 동기가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는 불분명했다. 의구심을 품은 채로 그날 저녁에 카페에서 선영과 만났다.
“아마 재작년 말쯤이었을 거예요. 복도를 지나다가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직관적으로 ‘저 사람이 지금 힘들어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최근에 재윤 샘과 대화를 나누다가 선생님 얘기가 나와서……. 아무래도 한번 연락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선영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나는 경계심의 빗장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연민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그런 시선이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도와주려 한다는 걸 알았기에 ‘괜찮다’는 거짓말은 내려두기로 했다.
그날 선영은 거의 두 시간이 넘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자기 비난의 언어들과 사회공포증, 사직 결심, 글을 쓰기로 결심한 데 이르기까지. 그녀는 나를 나약하다고 비웃는 대신 둥그런 눈동자를 몇 번이고 부풀리며,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 동안 재윤 샘이 얘기를 들어오면서, 선생님이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떠난다고 하니 너무 아쉽네요. 제 생각에는 당장 사직서를 내기보다는, 마음을 회복하면서 결정을 좀 보류했으면 좋겠어요.”
선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난하는 마음에 던져진 한 웅큼의 위로가, 내가 너무도 바랐던 말이어서. 그녀가 이어 말했다.
“선생님들이 학교를 떠나려고 하는 상황이, 너무 외로워요.”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 지쳐있다고 느꼈다.
대화의 말미에 선영은 내게 정신분석을 받아볼 것을 제안했다.
“제가 믿을 만한 선생님을 연결해줄 수 있어요.”
그 순간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절망으로부터 빛으로 연결된 다리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과거 복도에서의 우연한 마주침, 재윤을 사이에 둔 관계, 한낮의 문자 메시지, 에리히 프롬의 책과 갑작스럽게 찾아온 제의.
그녀는 다리의 입구에 서서 나를 향해 따스한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기로 선택했다.
“안 그래도 도움을 받을 데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학교에는 재차 휴직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병원 진단서를 첨부한 질병 휴직이었다. 선영과 나눈 대화와는 별개로 당시의 내 상태로는 교사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잃은 상태를 견뎌낼 수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 사회적 명함을 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는 것, 불확실한 꿈에 뛰어드는 것, 나로 인해 부모님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끝내 한 세계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나를 압도해 버렸다.
일 년 만에 다시 학교를 찾아가 교무 부장에게 진단서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온 날에, 나는 끔찍한 기분으로 한 줄의 문장을 일기에 적었다.
- 나, 아무 것도 아니어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기를.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표제 이미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