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고, 나는 나야
소유는 부질없고, 경계는 필요하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식탁에 뒤돌아 앉아 있는 아이의 하얀 등판이 보였다.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본체만 체 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오늘 기분이 별로이니 그냥 두어야 됨을 알고 조용히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향했다. 몇 마디 조잘대는 소리가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내 "쿵'하는 파열음이 넓게 퍼졌다.
나는 경계가 불분명한 사람이다. 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다. 이런 성향은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짙어졌다. 내가 향유하는 모든 걸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아빠는 마음이 보슬대는 발라드 음악이 좋단다. 어릴 때부터 LG 트윈스 야구팬이었다. 너도 그 팀 응원할 거지. 영화는 뭐니 뭐니 해도 액션이 최고 아니겠니.
잘 따라오는 아이가 예뻤다. 밤늦도록 EPL 축구롤 보며 목이 터져라 손흥민을 응원하고 매년 개봉하는 마블 영화는 빠짐없이 챙겨 보았다. 너도 즐겁지. 네가 행복해 보여 나도 기뻐. 내일은 공원에 볼 차러 가자.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렀다. 아이의 머리가 내 허리, 가슴을 지나 턱 밑까지 차올랐다. 어느 날 아이가 방에서 이어폰까지 끼며 음악을 듣고 있다. 무슨 음악 들어. J팝. 웬일이야? 내가 좋아해. 그랬구나. 오늘 저녁에 토트넘 경기 볼 거지. 아니야 나 친구들이랑 메이저리그 보기로 했어. 야구 좋아하는지 몰랐네. 아빠는 아는 게 적어.
마지막 말이 폐부를 찌른다. 아이가 멀어져 감을 느끼며 애써 잡으려 한다. 너는 나고, 나는 너였잖아. 분신과도 같았던 네가 왜 그러니. 서운하다 서운해. 아니 솔직히 화가 나. 내가 해준 것이 어딘데 이제 와서 밀어내는 거야. 한 발자국 다가가면 두 발자국 뒤로 빠지고, 두 발자국 다가가면 세네 발자국 뒤로 빠졌다. 강한 서운함이 쿵하고 부딪치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는 절대 소유할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아이였고, 나는 나였다. 우리 사이의 경계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서운할 필요 없어. 돌이켜봐. 너도 그랬잖아. 머리가 트일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대로 나아갔다. 그때부터 아이가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할 대상이었다. 내 것만 강요할 순 없었다. 뭐 하자? 싫어. 알았어. 뭐 할래? 아니. 알았어. 뭐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됐어. 알았어. 이번엔 어때? 생각해 볼게. 꼭 하자는 건 아니고 같이 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알았어. 정말? 응.
매번 까이지만 도전한다. 그래 싫을 수 있다. 이해한다. 하고 싶은 건 나이니 당연히 물어야지. 아이를 만나고 부딪치고, 꺾이면서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소유한단 말이 얼마나 부질없나. 사람 사이엔 거리와 경계가 당연히 필요하지.
땀에 잔뜩 젖은 아이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뭐 했어? 친구랑 농구했어. 오. 잘하나 보네. 아빠 정도는 그냥 제치지. 뭐라? 과연 그럴까. 주말에 한 판 할까? 공이 없는데. 사면되지. 그래 그럼 하자. 알았어. 두고 봐.
얼른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농구공을 주문했다. 녀석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데 따로 연습이라도 해야하나. 히죽 히죽. 정말 오래간만에 아이 몸을 부딪치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변덕 대마왕이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안되면 다음에 하면 되지. 섣부른 기대는 내려 놓는다.
이렇게 아이를 통해 환희를 맛보고, 아이를 통해 고통을 느끼고, 아이를 통해 가치관이 변하고, 아이를 통해 한 뼘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