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던 맛

호박 범벅

by 봄비가을바람



그때는 몰랐던 맛




늘 있을 줄 알았고 늘 머물 줄 알았던 시간

나도 가고 너도 가는데

어찌 시간만 멈출 것인가.

가을걷이 끝나고

곡식 창고, 무 구덩, 고구마, 감자 상자 쌓기

찬바람 불고 흰 눈 날리기 전

붉은 손가락 호호 불어 김칫독 채웠다.

12월 언달 시작 무렵

가을부터 한쪽 주황색 얼굴로 오매불망

나설 날 기다리던 늙은 호박.

이때다. 강낭콩 더불어 한 발짝 나섰다.




미끄덩 큰 덩이 조심조심 툭 잘라

끈적끈적 실뭉치 걷어내고

누구 좋으라고 호박씨 골라 햇볕에 폈다.

아버지 숟가락으로 속을 깨끗이 목욕시키고

엄마손 닮은 두꺼운 껍질 벗겨 보들보들.

큰 솥 걸고 아궁이 불 댕겨

흐물흐물 속을 익혀

주걱으로 걸쭉하게 젓었다.

물 만난 강낭콩 포슬포슬.

가을 알밤 밤톨이도 합세.

찹쌀가루든 밀가루든 어울리면 그뿐.

용암 닮아 혀끝 데고

꿀벌 밥 닮아 다디단 호박 범벅.

이제는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엄마 손맛.

진작 좋다 할 걸.

진작 그립다할 걸.



<by 봄비가을바람 >









<동화, 풍성한 가을 채소밭 글/ 문영미 ,

그림/ 유진희 감수/ 고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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