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8일
결혼에 관해 물어보시는 분이 있어서. 결혼과 남자와 페미니즘.
(늘 하는 말이지만) 내가 머리털 나고 제일 잘 한 게 결혼이다. 인간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남편이고, 제일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이 남편이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 베프도 남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남편이 잘생기기도 했고 (퍽!)) 뭐 그렇다고 남편이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고 금이야 옥이야 싸고도냐 하면 그런 건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좋은 친구 관계가 주가 된 것 같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아끼는 친구 둘. 남편이 인간적으로 완벽한 것도 당연히 아니다. 난 남편과는 한 번도 안 싸우고 잘살고 있지만 전 남친과는 하루에 세 번도 싸웠다. 그렇다고 남편의 전 여친과 내 전 남친이 나쁜 사람이냐 하면 그도 그렇지 않다. 전 여친은 똑똑하고 야무지고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고, 내 전 남친은 솔직히 비교하자면 남편보다 나에게 훨씬 더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도 잘 맞고 좋은 친구들끼리의 관계는 더 오래 간다. 좋은 직장 동료와도 그리 크게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서로 어느 정도 배려하고, 거리 둬야 할 때는 두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해 주면서 십 년, 이십년 가는 우정 많다. 그런데 연인 관계는 이상하게도 그게 힘들다. 나 역시 전 남친과 그게 힘들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90년대니까 정말 지난 세기 얘기긴 하지만 -_-).
전 남친은 뭐든지 같이 하는 게 중요했다. 서로 다른 영화 보고 싶어도 같이 보고, 난 선물 싫다 해도 작은 선물 사 나르고, 난 됐다고 해도 몇 시간을 걸어서 보러 오고, 직장보다 자신을 우선해주기를 바라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확인시켜주려 했다. 내가 연락을 잘 안 해서 섭섭해했고 사랑 고백과 선물에 감동을 하지 않아 서운해했다.
근데 난 그냥 그런 게 싫어. 아주 싫어.
남편의 여친도 아마 남편 욕 엄청 할 거다. 남편은 정리 정돈 잘 못하고 (하긴 하는데 겉으로 보면 어수선하다), 옷 잘 못입고, (남아공 기준으로) 못생겼고, 입에 발린 말 잘 못하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 잘 못 챙겨준다. 많은 여자들이 바라는 카리스마나 상남자스러운 태도 하나도 없다. "오빠만 믿어" 스타일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너는 어떻게 할래? 난 이렇게 생각해" 스타일이다. 차갑게 느껴질 수 있고 자기 일에 푹 빠진다. 다른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린다. 사람들과의 모임 기피한다. 싫지만 여자가 좋다니까 좋아하는 척해주고 그런 거 없다. '이 정도 맞춰주고 좀 싹싹하게 말해주면 안 돼?' 이런 거 없다. 여자가 세심하게 챙겨주고 보살피고 하는 거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한다. 애교 스타일도 딱 질색.
그런 남편과 전 여친은 안 맞았던 거고. 나랑은 다행히 성격이 잘 맞는 거고.
(물론 서로 끌리니까 사귀기 시작했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겠지만)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난 그냥 우리 둘이 한 집에 같이 사는 하우스 메이트로서 정말 잘 맞는다고 본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산다고 할 때, 어느 정도 단체 생활 해 봤고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몫 잘 맡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먹은 거 자기가 치우고, 다른 사람이 치워줬으면 다음에는 내가 치우고, 쓰레기통도 다 찼으면 버리고, 문제 있으면 서로 얘기해서 조율하고 등등. 우리 부부관계의 평화의 비밀은 그냥 그게 다다. 애 낳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사정 대강 보고 좀 더 해 줄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도움을 청하고.
그렇게 거진 20년을 같이 살면서 난 남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사리분별 확실하고, 생색 하나 없이 자기가 좀 더 해 줄 수 있는 건 하고, 무엇이든 차분하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사람. 대신 아재 개그...이긴 하지만 농담 센스 확실한 사람. 자기 구역 확실하고 자기 취미 있고, 늘 배우는 사람. 딱히 나를 너무 사랑해서 아껴서 집안일을 챙기는 게 아니라, 그건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고, 남자 여자 성역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
그래서 나에게 '페미니스트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물으면 난감했다. 왜 안 되지? 좋아하는 사람과, 친구와, 동반자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데.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그거랑 페미니즘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 그냥 나를 동등하게 보고 서로 배려해줄 수 있는 상대면 되는 거 아닌가.
웬만한 사람은 (성격이 맞는다는 가정 하에) 그런 정도의 배려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친구들과 보통 다 그렇고, 직장에서도 다들 어느 정도 맞춰서 살아남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연인 관계라 하면 갑작스레 다이나믹이 많이 틀어진다. 기대가 달라진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라는 사회의 압박. 주위의 시선. 네 남친이 정말 널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할 거라는 편견. 이 정도도 안 받으면 네가 손해라는 이들. 저 정도도 안 하면 앞으로는 더 망할 거라는 저주.
이런 경우는 그 사회와 주변인들을 벗어나면 많이 나아진다. 두 사람이 오롯이 사막을 걷고 있다고 하자. 각자 들 수 있는 만큼 들고, 둘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가면 된다. 먼 길 둘이서 가는데 남자라서 계속 다 들 필요 없고, 여자라서 맨날 밥할 필요 없는 것처럼.
아니면 단순하게 '아내'를 '사촌'으로 치환해도 쉽다. 사촌과 둘이서 서울에서 자취한다. 둘은 동갑이다. 누가 밥을 하는가? 작은어머니는 음식을 더 잘하시니까 사촌이 해야 하나? 내가 빨래를 해서 다려줘야 하나? 사촌은 나를 존중하니까 내가 더럽게 쓴 화장실도 청소해야 하나?
'여자'라는 프레임만 없으면 갑작스레 남자들도 훨씬 사람다워진다. 동료와 같이 자취하면서 양말 아무 데나 던져둘 건가? 상사와 같이 화장실 쓰면서, 누가 했는지 뻔히 아는데 오줌 튀겨놓고 그냥 나가고 먹은 그릇 더럽게 며칠이고 쌓아놓을 건가? 자기는 하나도 안 치우면서 왜 집안 꼴이 이러냐고 잔소리 할 건가?
- 좋아하는 사람과 인생 함께 하는 것은 축복이죠. 할 수 있으면 하라고 권유합니다. 주위에 보면 행복한 커플 참 많습니다. 한국 남자는 다 안 돼 라는 분들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전 괜찮은 분들 행복한 한국 부부도 .. 흠. 그런데 속사정은 모르는 걸까요. 뭐 어쨌든.
- 그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이제까지 쌓아온 남녀에 대한 선입견, 상대에 대한 기대, 주위의 시선, 사회의 편견, 부모님의 개입 등이죠. 아주 간단하게 같은 집에 사는 두 사람으로 생각하면 많이 단순해집니다.
- 그런데 남편이 젠더 감수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요. 이거 좀 예민한데, 실제로는 남자가 리드를 하고 여자는 따라가는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래요. 이 모델 자체가 가부장제도에 기반한 거라서, 당찬 여자라고 해도 남편이 더 벌기를 바랄 수 있고, 당찬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역시 여자에게서 보살핌을 받기를 원할 때 있죠. 하지만 내가 좋은 것만 취할 수는 없고, 그 모델은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적인 여혐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오빠가 알아서 할 게"만 취하고 시댁에서는 대접받고 그러긴 힘들어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들여다보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남편은 적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의 여혐 때문에 그렇게 될 때가 있죠. 저는 솔직히 사람은 고쳐서 쓰는 거 아니라 주의라서,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게 낫다고 봅니다만 이미 아이 낳고 사는 경우는 참 그게 말이 쉽지 간단하지 않다는 거 잘 압니다. 늘 내가 더 손해 보는 건 아닌지 계산하고 재는 것 역시 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죠. 그래서 방법이 뭐냐 하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변하면 훨씬 더 빨리 변한다는 건 압니다. 판에서 '와 이딴 남편도 있어!'라고 욕먹는 거 보면 자기도 슬그머니 조금 눈치 보기 시작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분위기 조성으로 다시 돌아오네요. 더 크게 말하고, 더 크게 따지고, 그렇게 한마디 하는 것이 그 날 집에 들어가는 사람의 행동을 조금 바꿀지도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결론은 남편님 만세. 다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세요! 완전 좋아요! <- 이상 남편빠 양파
앗 마지막으로. 그러면 한국남자는 망했나요 무조건 서구 남자와 결혼해야 하나요 물으신다면
자상한 외국 남편의 실상 & 탈조센하여 비한국남과 결혼하면 꽃길만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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