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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Dec 29. 2023

찰나의 마음들

우리의 민낯

1. 

몇 해 전 여름,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의 행색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시그니엘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가던 참이었다. 노상방뇨를 하는 노숙자를 보고 놀란 아이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집에 안 가고 저기서 사는 거냐는 질문.  집이 없으면 친척집에 가면 되지 않느냐. 돈이 없으면 저기 있지 말고 직업을 가지면 된다는 아이들의 무해한 말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택시 안에서 그들의 삶을 그려보다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고개를 흔들지도, 눈을 질끈 감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쉽게 재단하는 오만은 품위가 없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사실 이 말은 잘못 알려진 것으로 실제론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한다고 한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사치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실제론 검소하고 빈민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를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문, 지금으로 치면 찌라시 정도 되겠다. 혁명파가 민중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소문을 더 부풀려 퍼뜨렸다고도 한다.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방편,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 에 대해 떠올렸다. [참회록 중]





2. 

예전에 한 끼 줍쇼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그런 말을 했다. 함께 있던 출연자가 길을 가던 한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조언해 주자, 옆에서 툭 던진다. 

"꼭 훌륭한 사람이 안돼도 괜찮아. 그냥 아무나 돼."


그 속에 품은 '아무나'는 꿈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며,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너 자체로 이미 훌륭하다고.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훌륭한 건 아니라고. 결과가 뚜렷해야만 반드시 성공한 인생은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정상만 목표로 걷다가는 얼어 죽는다. 주위를 둘러보고 음미해야지. 서두르지 말고 너의 오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마음에 평화가 오면 리듬이 생겨서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가던 길을 수월히 갈 수 있게 된다. 


요즘에는 아이를 위한 공부정서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좌절하더라도 지속적으로 해내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좋은 감정을 저장하는 긍정의 습관을 들이고 있다. 그 습관은 비단 아이만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표정과 반응에 기인한다. 학업의 결과로 나의 표정이 달라지면 아이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머뭇거리게 됨을 명심하려고 한다. 




3. 

청춘의 어느 말미부터였는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강한 멘털과 단단한 마음을 지닌 것도 아었다. 미련했던 시기가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거치게 마련인 아픈 이별은 지나고 보면 가당찮지만 그때는 절실했었다. 울고 또 울고 충분히 아프고 난 뒤 회복했다. 이후로 사랑에 의한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결혼식에도 울지 않았다. 축가를 부르는 신랑에게 감동하였으나 울지 않았다. 부모님과의 인사에도 눈물대신 미소 지었다. 눈물샘이 말라버렸나 싶었다. 

사랑은 늘 진부하고 알면서도 모르고 싶은 끝을 마주하기에 두려웠다. 끝이 없는 사랑을 꿈꾸었다. 


말라버린 눈물이 모습을 드러낸 건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었다. 잊지 못할 그 순간, 기진맥진한 내 귀에 들리던 아가의 우렁찬 울음소리, 쉴 새 없이 눈물샘이 터졌다. 흐르는 게 아니라 댐을 방류하듯 그리고 마주한 나의 엄마의 얼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다시 눈물방울이 주렁주렁 맺히고 목이 멘다. 마치 그날을 위해 모아두었다는 듯 쏟아졌던 마음의 별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망울 져 있던 마음들은 시간과 나의 사람들로 치유되어,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었다. 


사랑을 통해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잔잔히 흐르다가 바람이 불면 짐작 못했던 파도를 몰아오기도 하는 바다처럼 사랑은 힘은 가늠할 수가 없다. 



4. 

아들이 다섯 살 때,  단풍놀이를 하며 바사삭 낙엽을 밟으니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낙엽 밟지 마. 낙엽이 아파서 소리 내는 거야." 


말라서 떨어진 채 고개를 떨군 낙엽이지만 아름다웠다. 가까이 가서 보면 벌레 먹은 잎도 있고, 그러데이션이 환상적인 잎도 있고,  햇빛에 탄 건지 검은 점이 얼룩덜룩 못생긴 잎도 있었지만,  

모두 한여름을 견딘 푸르른 잎이었다. 


그리고 큰 아이가 네 살 때 했던 말. 


"엄마, 행복해."

"엄마도. 왜에?"


"왜냐면 억새풀이 웃고 있잖아 봐봐. 억새풀이야, 우리가 오니까 좋아? "


찰나의 마음과 말의 조각들을 기록해 놓고 이따금씩 꺼내어 야금야금 행복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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