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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May 28. 2021

함께 익어가기

김치를 함께 담그는 친구

난 혼자서는 김치 안(못) 담근다. 혼자서는 하기 싫다. 생각만 해도 개피곤. 근데 같이 하는 건 좋다. 같이 해도 고되긴 마찬가진데 그걸 상쇄하고 남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한테 김치는 엄마한테 얻어먹는 김치와 친구와 함께 담그는 김치가 있는 셈.


근데 그게 친하다고 무조건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 김치를 담그려면 여러 가지 합이 잘 맞아야 한다.


일단 입맛. 특히 간이 맞아야 한다. 액젓, 젓갈을 쓰는 방식도 맞아야 한다. 누군 간간한 걸 좋아하고 누군 심심한 걸 좋아하고, 누군 젓갈을 많이 쓰고, 누군 젓갈 냄새를 싫어하고, 누군 맵고 칼칼하게 누군 시원하게, 누군 달달하게 누군 담백하게, 입맛이라는 게 천차만별이다. 이 취향이 완전히 같을 순 없어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가야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다.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핵심은 역할 분담이나 협업 방식이다. 김치는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고난도의 음식이다. 장을 보는 것에서부터 재료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양념 만들어서 버무리는 것까지 단계도 많고 할 일도 많다. 근데 일이라는 게 모두가 잘하는 게 아니고 일을 똑같이 분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단계에 우르르 몰려다닐 순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더 하게 되거나 덜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불균형적인 노동구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수하거나 잘 못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 김치 친구 하나는 채소를 못 썰고 느려 터졌다. 근데 못한다고 놀리면서 하는 게 너무 즐겁다.


결과에 쿨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재료로 최선을 다해 김치를 담갔는데 맛없다면 우리가 아니라 하늘이 잘못한 거다.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에 목을 매면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없다. 누군가를 탓하는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다. 김치를 담그다 보면 더 많은 경험이 있거나 혹은 더 용감한사람,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져서는 안 된다. 폭망 해도 본전 생각나지 않아야만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래 사귀어서 서로 잘 아는 찐친이라야 가능하다. 서로 입맛도 알고, 취향이 비슷한 취향 공동체이면서 서로 신뢰하고 좋아하고, 실패도 즐거워할 수 있는 친구라야 김치를 함께 담글 수 있다. 모든 친구들과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관계라면 특별한 친구인 것이다. 그것도 여러 해를 거듭해서 하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나에겐 김치를 함께 담그는 두 무리의 친구들에 있는데 한 팀은 원래 친한 친구들이었고, 한 그룹은 김치를 담그다가 친해진 케이스다. 우연히 함께 김치를 담가보니 서로 잘 맞는 것을 확인하고 친해진 케이스다.


갑자기 열무가 생겼다


어제 갑자기 열무가 생겼다. 우리 집 가까이에서 텃밭 농사를 짓는 친구가 열무를 뽑아가라고 했다. (그 친구는 열무는 나눠주지만 함께 김치를 담글 정도의 관계는 아닌 것) 친구들에게 함께 열무김치를 담글 거면 뽑아오겠다고 했더니 함께 담그자고 한다. 한 친구는 그냥 열무김치, 한 친구는 물김치를 담그자고 해서, 둘 다 담그기로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된다. 나는 열무랑 얼갈이를 뽑아와서 다듬고 찹쌀풀을 미리 쑤어두었고, 한 친구가 나머지 재료들을 사 왔다. 나머지 한 친구는 김치 담그면서 먹을 양식을 챙겨 왔다. 그렇게 모여서 함께 담근 열무김치가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중이다. 김치를 담글수록 우리 관계도 익어가는 느낌이 든다. 함께 담그면 함께 익어가는 건가 보다.


열무얼갈이김치
열무물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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