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빈 교실에 혼자 앉아 반성문을 썼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고 할 만큼의 깡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물을 주고 살뜰히 키운 애벌레를 무지막지하게 씹어 삼켰지만, 학교에 대놓고 반기를 올릴 만큼의 난 놈은 아니었다. 내 몸속에는 이해타산적인 아빠의 피가 반쯤 흐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저희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실은 제 작년에 친누나가 사고로 죽었는데... ”
그래도 나는 절대 아빠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빠의 재빠른 셈법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다. 기본기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아빠의 약삭빠름을 이길 수 없다. 이번엔 학폭 피해자 학부모로 학교를 다시 방문한 검사 아저씨는 더 냉랭한 얼굴로 교무실을 장악했다. 그 앞에서 한없이 고개를 숙인 아빠는 죽은 누나를 방패 삼아 동정을 구걸했다. 다른 학교를 다니는 엄마도 함께 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죽고 싶었다. 진실로.
누나가 살아 있을 땐 그렇게 짐짝처럼 취급하더니, 이제 누나의 죽음은 아빠에게 더할 나위 없이 휘두르기 좋은 방패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든 간에 어린 딸을 앞세웠다는 명제는 그에게 유익한 할인권이 되어 주었다. 무슨 죗값이든 그것의 절반으로 시원하게 후려쳐 주었다. 그 뒤에 서 있는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쉬지 않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올라왔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는 죽기가 어렵다.
학폭위가 열렸고, 나는 곧바로 다른 반으로 분리되었다.
누나의 죽음 뒤에 숨어 나는 강전은 피했다.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3주짜리 진단서를 휘날리던 자들의 아들은 이틀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복도에서 나와 마주쳐도 더 이상 히죽거리지 않았다. 문성혁은 나를 정말로 미친놈으로 인정해주었다. 열 살의 오윤은 거기서 내심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캐터피를 씹어먹은 일의 결과는 그뿐일 줄 알았으니까.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나는 새로운 반에도 그럭저럭 적응했고, 캐터피라는 별명도 익숙해졌다. 오윤이라는 이름 외에 내가 얻게 된 새로운 이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고,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충동 조절 장애와 소아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집에서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졌다. 누나가 죽은 이후에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은 캐터피 사건 이후에 자주 큰 소리로 다투었다. 처음에는 나를 피해 주차장, 차 안에서 싸우더니 이제 거실, 식탁 위, 듀얼 모니터가 있는 서재방 어디서든 핏대를 세웠다.
“정말 못 살아. 진짜 징글징글하다. 어떻게 저게 인간이야...”
우당탕탕 소리에 잠이 깼는데 부엌 싱크대에 기대어 울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흐트러진 엄마의 뺨에 벌건 손자국이 있었다. 잠이 달아나고, 손끝이 찌릿했다. 쾅. 아파트가 무너져내린 줄 알고 뒤를 돌아보니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였다. 아빠가 나갔다. 서재방에는 어질러진 이불 위에 쏟아진 책들과 깨진 컵, 볼펜, 키보드 자판 알들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그동안 숨을 죽이고 발끝을 세우고 걸어야 했던 살얼음이 이제는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하나, 둘, 셋,,,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멀리서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가리기 위해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접었다.
아빠의 가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와 엄마는 부엌에서 같이 유부초밥도 만들어 먹고, 피코크 팝콘을 먹으며 나홀로 집 시리즈도 이어서 보았다. 주말에는 영재 센터도 같지 않았다. 아빠와 달리 내가 영재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엄마의 의견은 달랐다.
“ 윤아. 영재 센터 가고 싶나?”
“ 아니.”
“ 그래 젤로 중요한 건 니 마음이다.”
“ 응.”
“ 무슨 말인지 알제?”
“ 응.”
“ 그래. 됐다. 그럼.”
엄마의 말은 짧다. 그래서 좋다.
“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노.”
“ 응?”
“ 하나도 안 맞는데 뭐가 좋아서.”
“ 핏. 처음엔 잘해 줬다. 그리고 몰랐지. 그때는.”
키 큰 도둑이 전기가 흐르는 수전을 잡고 감전이 되어 뼈다귀가 보였다. 악악 소리를 내며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는데 우습기만 하고 무섭진 않았다. 엄마는 팝콘 가루가 묻은 손을 털어내고 커피를 들이켰다. 평화로운 일요일 저녁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집을 나간 아빠는 월요일 교실 TV 안에 들어 있었다. 방송 조례 때 아빠는 마이크 앞에 서서 지역별리그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형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 ... 자랑스러운 축구부 학생들은 우리 학교의 이름을 빛내고...”
운동 같은 거 해서 뭐하게. 개나 소나 손흥민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체대 나와봤자 사범이나 코치가 다지 뭐. 이래나저래나 이 나라에서는 공부해서 의사 되는 게 최고고, 안 되면 약사나 한의사라도 해야 어느 정도 레벨을 맞추며 사는 거다. 알겠나. 윤아. 너는 일단 기본 머리는 갖췄으니깐 노력만 하면...
끝이 없다. 끝이 없어.
주말마다 영재 센터 가는 길에 어김없이 나오던 질질질 레퍼토리가 떠올랐다. 그 주인공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6학년 형들의 어깨를 토닥였고, 이어서 교장 선생님이 한 명 한 명에게 목에 메달을 걸어주었다. 화면 끝에 다소곳하게 선 채로 메달 시상 수여를 돕고 있는 이수현 선생님의 얼굴이 반쯤 나왔다 사라졌다. 미래의 손흥민을 꿈꾸는 개나 소는 저 손의 진심을 알까 모르겠다.
방송 조례가 끝나고 나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짝인 주영이랑 함께 온도계와 위생장갑, 소독제가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보건실에 갖다주러 내려갔다. 1층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에 바구니를 제출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데 주영이가 찡그린 얼굴로 배를 감쌌다.
“ 오윤. 미안한데 니 먼저 갈래. 나는 화장실을 좀 가야겠다.”
“ 배 아프나. 그래. 알겠다.”
주영이는 급하게 1층 중앙 화장실로 뛰어갔고, 나는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1교시가 시작된 뒤라 주변은 조용했다. 1학년 교실 창문 틈 사이로 조막만한 아이들이 손에 색종이를 들고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중앙 계단으로 가려고 방향을 트는데 이상한 웃음소리가 얼핏 들렸다.
뭐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운동장 쪽에서 불어오는 9월의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다. 배가 많이 아팠던 건지 화장실에 들어간 주영이는 아직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겠다 싶어 고개를 돌리고 계단을 두어 개 올랐을 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쿵
이번에는 웃음소리는 아닌데 방향은 비슷했다. 무언가 흔들리다 쿵 하고 부딪힌 거 같기도 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는데 주변이 너무 고요해서인지 대단히 거슬렸다. 계단을 오르던 두 발이 아래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