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Szarkowski
이 책은 사진이 바라보는 것과 그들이 그 방법으로 보는 이유에 대한 연구이다. 그것은 사진의 스타일과 사진의 전통에 관련한다: 사진가가 오늘날 그의 작업에 전력하는 가능성들의 감각과 더불어.
사진의 발명은 급진적으로 새로운 picture-making 과정(process)—과정은 통합이 아니라 선택에 관해 근거했다—을 제공했다. 그 차이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림은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계획과 기술과 태도들의 보고(寶庫, storehouse)로부터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남자가 그 거리에 찍혀진 것처럼, 찍혀진다.
그 차이는 새로운 종류의 창조적인 이슈를 일으켰다: 이 기계적이고 부주의한 과정이 인간의 표현에서 의미심장한 그림들—명쾌함과 결합력과 관점이 있는 그림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대답은 오래된 형태를 너무 많이 좋아했던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곧 증명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주 크게 사진가는 오래된 예술적인 전통을 빼앗아갔다.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보들레르(Baudelaire)는 말했다: “이 산업은, 예술의 영토를 침략하는 것에 의해, 예술의 대부분의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인용문에서 보들레르는 반타작(half right)이었다; 확실히 새로운 매체는 오래된 표준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사진가는 그의 의미를 분명하게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이 새로운 방법들은 전통적인 픽토리얼 표준에 그들의 충성을 단념했던 사람들에 의해 발견될지도 모른다—또는 오래된 충성이 깨지지 않았던, 예술적으로 무지한 것에 의해 발견될지도 모른다. 후자의 종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있었다. 그것의 초기 이후, 사진은 어떤 일반적인 전통이나 훈련도 공유하지 않았던 수천의 사람들에 의해 숙련되었다, 그들은 훈련받았고 어떤 학교나 협회에 의해 갖추었다, 그들은 과학, 예술, 무역, 또는 오락으로서 그들의 매체를 다양하게 고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각각의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알지 못했다. 사진을 발명했던 사람들은 과학자이고 화가이었다, 그러나 그 전문적인 개업자들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에서 호손(Hawthorne)의 은판사진가(daguerreotypist) 영웅 홀그래이브(Holgrave)는 아마 전형적이었다:
“지금이지만 22년 전, 그는 이미 지역의 교사이었다; 지방 가게에서의 점원; 그리고 지역 신문의 정치적인 편집자. 그는 콜로뉴(cologne water)와 다른 향수의 판매인으로서 그 뒤에 여행했었다. 그는 공부했고 치의학을 훈련했다. 최근 아직도 더 그는 최면술(mesmerism)에 관한 공공 강사이었다, 그것의 과학에서 그는 매우 주목할 만한 재능을 가졌다. 은판사진가로서 그의 현재의 단계는 그 자신의 시선(view)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지만, 어떤 이전의 것보다, 아마도 더 영구적이 아니었다.”
새로운 매체의 거대한 인기는 수천의 사람들에 의해 전문가를 낳았다—은세공사, 수선인, 약제사, 대장장이와 인쇄공으로 전환시켰다. 만일 사진이 새로운 예술적인 문제이었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는 것의 이점이 있다. 그들 중에 그들은 이미지의 범람을 일으켰다. 1853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300만의 은판사진가들이 그 해를 만들고 있다라고 판단했다. 약간의 이 사진들은 지식과 기술과 감수성과 발명의 산물이었다; 대부분은 사고, 즉석, 오해와 경험적인 실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예술에 의해 또는 운에 의해 만들어지든, 각각의 사진은 보는 것의 우리의 전통적인 습관에 대한 큰 공격(assault)의 부분이었다.
19세기의 근래의 10년간 전문가와 진지한 아마추어들은 우연의 스냅 사진을 찍는 사람들 보다 더 큰 주인으로 참여했다. 80년대 초기에 건판은, 그것은 사용할 준비가 되었을 때(ready-to-use) 구입될 수 있었다, 성가신 습판 프로세스와 내화성(耐火性, refractory)을 바꿨다, 그 판(plate)이 감광유제가 마르기 전에 처리되었고 노출 전에 준비되었다. 건판은 핸드 카메라와 스냅 사진을 낳았다. 사진은 쉽게 되었다. 1893년에 영국의 작가는 새로운 상황을 한탄했다 “세계에서 대유행하는 사진가의 단체를 만들었다, 모든 종류, 크기와 형태들의 대상물을 사진찍었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그들 자신에게 끊임없이 요청하기 위해, 그러니저러니 예술적인가? …그들은 보기(view)를 몰래 조사한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카메라는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샷이 찍혀진다! 어떤 중지도 없다,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 벗어날지 모르지만 본질은 놓칠 수 없고, 시인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견해를 듣는다. 그들을 위해, 구성, 빛, 그늘, 형태와 질감은 매우 많은 표현을 포착한다…”
이 사진들(pictures)은, 수천의 확실한 솜씨를 가진 사람들과 취미에 아주 열심인 사람들에 의해 찍혀지고, 그들 앞에 어떤 사진들과도 달랐다. 그들의 이미지의 변화는 막대했다. 관점 또는 빛에서의 각각의 미묘한 변화, 각각의 우연한 순간, 프린트의 색조(tonality)에 있어서의 각 변화는, 새로운 사진을 만들었다. 훈련된 예술가는 다수의 원근법에서 머리 또는 손으로 그릴 수 있었다. 사진가는 손의 몸짓이 무한히 변화가 많았고, 햇빛이 비친 건물의 벽이 결코 다시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사진의 이 범람은 형태가 없고 우발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심지어 그것들의 이상함(strangeness)에서, 약간은 응집(coherence)을 이뤘다. 새로운 이미지들의 약간은 잊혀지지 않았고, 그들의 제한된 의지(intention)를 넘어 중요하게 보였다. 이 기억되고 있는 사진들은 그가 현실의 세계를 다시 보았던 것에 따라 가능성들에 대한 그 사람의 감각을 확장했다. 그것들이 기억되는 동안 그것들은, 재연하고 진전시키기 위해, 유기체처럼,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진이 새로웠던 것을 묘사했던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그것이 묘사하기로 선택했던 것이었다. 사진가들은 찍는다 “…모든 종류, 크기와 형태의 대상들… 그들 자신에게 끊임없이 요청하기 위해, 그러니저러니 예술적인가?” 그림은 어려웠고, 비쌌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라는 것을 알았던 것을 기록했다. 사진은 쉬웠고, 쌌고 도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것도 기록했었다: 상점 윈도우와 잔디 집과 가족 애완 동물과 증기 엔진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일단 객관적이고 영구적이다, 사진에 영원성을 주었다, 이 일상의 것들은 중요성을 띠었다. 세기말에, 역사상 처음으로, 심지어 가난한 사람은 그의 조상(ancestors)이 무엇처럼 보였는지 알았다.
사진가는 두 가지 방법을 배웠다: 첫 번째로, 그의 도구와 재료들(만일 그의 판plate이 구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늘을 고려하지 않고 아래로 카메라를 향했을 것이다)의 작업자의 깊은 이해에서;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다른 사진들로부터 배웠다, 그것은 끝이 없는 흐름(stream)에서 그것들 자신을 나타냈다. 그의 관심이 상업상이었든 예술적이었든, 그의 전통은 그의 의식에 그것들 자신을 인상지웠던 모든 사진에 의해 생겨났었다.
이 책에서 재현했던 사진들은 거의 1세기와 15년 이상 만들어졌다. 다른 관심과 다양한 재능의 사람들에 의해,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그들의 성공을 제외하고 공동으로 작업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표현형식은 공유되었다: 이 사진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사진들이다. 그들이 공유한 시각(vision)은 그 자체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학교도 또는 어떤 미적인 이론에 속하지 않고 있다. 사진의 잠재성의 그들의 인식이 성장했던 것처럼, 이 시각의 특성은 일하는 사진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매체에서 고유하게 보였던 문제들과 특징들의 사진가의 진보적인 인식에 관하여 매체의 역사를 고려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5가지의 그런 이슈는 아래에서 생각하고 있다.
이 이슈들은 작업의 추상적인 카테고리들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사진적인 전통의 대부분을 통하여 섹션 보기로서—하나의 문제의 상호 의존적인 측면으로 여겨질 수 있다. 보통 말하는[엄밀한 의미의] 그런, 그것은 그들이 더 충분히 사진의 유일한 현상에 반응하는 비판적인 원근법과 표현형식의 공식화에 공헌할지도 모르기를 바랬다.
The Thing Itself
사진가가 배웠던 첫 번째 것은 사진이 현실을 다루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그가 하지 않는 한, 사진은 그를 좌절시킬 것이다. 그 세계 자체가 가 비교할 수 없는 창의력이 풍부한 예술가이고, 그 최고의 작업과 순간을 인지하고, 그것들을 예상하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하고 그것들을 영원하게 하고, 민감하고 유연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는 배웠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진들의 사실성(factuality)이, 어떻게 하든 설득력 있고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그 리얼리티 그 자체보다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또한 배웠다. 리얼리티의 많은 것은 정적인 거의 흑백이 아닌 이미지에서 걸러내었다, 그리고 그것의 약간은 과장된 중요성, 부자연한 명쾌함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 주제와 사진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들이 그후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전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후자에 관해서 그의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스틸 사진을 보는 것이 사진가의 문제이었다.
이것은 예술적인 문제이었다,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대중들은 사진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것을 너무 믿었거나, 주장했었다면 사진가에게 그것은 더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우리 눈이 보았던 것이 환영(幻影, illusion)이었고, 카메라가 보았던 것은 진실이었다라고 주장할 것 같았다. 어려운 초상(portrait)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 호손(Hawthorne)의 홀그래이브(Holgrave)는 말했다: “우리는 [천국의 폭넓고 단순한 햇빛] 가장 단순한 표면을 단지 묘사하는 것에 대해 신뢰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어떤 화가도 결코 위험을 무릅쓰고 하지 않을 진실이 있는 비밀의 성격을 끌어낸다, 심지어 그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그 오리지널 의상들, 세상의 눈에서이다… 상당히 즐거운 표정, 자비심의 직설법, 마음의 개방성, 양지 바른 쾌활한 유머, 그리고 그 배역(cast)의 다른 칭찬할 만한 특성들. 태양(sun)은, 당신이 보는 것처럼, 아주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6명의 환자(patient)는 나의 일부를 빼앗으려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활하고, 미묘하고, 부지런하고, 거만하고, 그래도, 얼음처럼 차가운, 한 남자를 나타낸다.”
어느 정도 홀그래이브(Holgrave)는 그 자신의 눈에서보다 카메라 이미지에 더 많은 신뢰를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그 주제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기억되고 있는 리얼리티가 될 것이다. 아이빈스(William M. Ivins, Jr.)는 “어떤 주어졌던 순간에 받아들여진 이벤트의 기록은 그 이벤트보다 더 큰 중요성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상징적인 기록이고 구체적인 이벤트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말했다: “19세기는 합리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라고 믿으면서 시작했고 그것은 사진을 보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믿으면서 끝날 것이다.”
The Detail
사진가는 사물의 실제(facts)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사실(facts)을 끌어내는 것은 그의 문제이었다. 그는, 스튜디오의 밖에서, 진실을 배치할 수 없었다, 그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단지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고, 그것은 파편이 되었고 불명(不明)한 형태—스토리로서가 아니라, 산만하고 암시하는 단서로서—의 자연에서 발견되었다. 사진가는 일관성이 있는 이야기(narrative)로 이 단서를 모을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단편을 분리할 수 있었고,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약간의 특별한 의미, 단순한 묘사를 넘었던 의미를 주장한다. 강력한 명쾌함과 함께 사진은 그 주제가 결코 전에 정확히 보지 못했던 평범한 것(trivial)을 기록했었다, 그것은 사실 아마 평범한 것이 아니라, 발견되지 않는 의미로 가득 찼다. 만일 사진들이 스토리로서 읽을 수 없다면, 그것들은 상징으로서 읽힐 것이다.
지난 세기에서 내러티브 그림의 몰락은 사진의 상승에 큰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필요성에 대한 화가에게 “변화를 갖게 했다”. 사진이 결코 내러티브에 성공적이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기묘하다. 그것은 사실 좀처럼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었다. 정교한 19세기 로빈슨(Robinson)과 레일란더(Rejlander)의 몽타주들은, 몇 개의 연출된 네가티브들로부터 함께 애써서 완성하였고, 스토리들을 말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작업들은 허세를 부리는 실패로서 그들 자신의 시대에서 인지했었고 초기의 사진 잡지의 시도는 사진의 시퀀스들을 통하여 내러티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스토리들의 피상적인 일관성은 사진의 발견의 대가로 일반적으로 이뤄졌다. 브래디(Brady) 그룹에 의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적인 도큐멘테이션, 그리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큰 2차 세계대전의 사진의 기록은, 공통으로 이것이 있다: 설명하는 것 없이, 광범위한 캡션이 없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사진들의 기능은 스토리를 분명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사실이게 했다. 큰 전쟁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는 내러티브의 빈약과 사진의 상징적인 힘을 나타내었고 그가 말했을 때, “만일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좋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있지 않았다.”
The Frame
사진가의 사진이 기획되는(conceived)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므로, 그의 주제는 결코 정말로 분리되지 않고, 결코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되지 않는다. 그의 필름의 테두리(edges)는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의 경계를 정했지만, 그가 촬영했던 주제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4개의 방향에서 미친다. 만일 사진가의 프레임이 두 개의 형상(figures)들에 둘러싸였다면, 그들이 서 있었던 군중으로부터 그들을 분리하면서, 그것은 전에 존재하지 않고 있었던 그 두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었다.
사진의 주요한 행위(act), 선택하고 있고 제거하고 있는 것의 행위, 사진의 테두리—바깥으로부터 분리하는 선(line)—와 그것에 의해 만들어졌던 형태에서 집중을 끌어낸다.
처음 사진 생애의 반세기 동안, 사진들은 노출된 판과 같은 크기로 프린트되었다. 확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비실용적인 사진가가 암실에서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 크기를 따라서 줄이지 않고, 그의 사진의 단지 단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만일 그가 8×10인치 판(또는 더욱 나쁜, 그것을 준비했다면)을 구입했다면, 그의 백벤딩 로드(back-bending load)의 일부로서의 그것을 운반했고, 그것을 처리했었다, 그는 그 사이즈의 반을 사진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간소한 경제 감각은 사진가가 그 테두리에 사진을 채우려고 노력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그 사진의 테두리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았다. 형상이나 빌딩의 부분들 또는 풍경의 특징(features)들은 모서리를 잘라서 면(面)을 만들었다, 그 주제에서가 아니라, 그 이미지의, 적정(propriety), 균형(만일 사진이 좋은 것이었다면)에 속하고 있는 형태를 남기었다. 마치 그것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펼쳤었던, 앞으로 움직였던 프레임으로서 무한이 많은 크로핑—구성들—으로 나타냈던, 두루마리(scroll) 그림이었던 것처럼 사진가는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크로핑 계획(device)으로서 사진의 테두리의 느낌은 19세기 후반의 발명의 창의력이 풍부한 화가에 가장 흥미를 일으켰던 형태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사진에서 왔던 이 인지가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동양의 예술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여전히 연구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사진의 이미지의 유행이 일본 프린트의 평가에 근거를 갖게 하는 것을 도왔고, 또한 이 프린트의 구성의 태도가 두루마리(scroll)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던 것의 보기(seeing) 습관에서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Time
순간적인 사진으로서 그런 어떤 것도 사실상 없다. 모든 사진들은 더 짧거나 더 긴 노출의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각각은 분리된 한(parcel) 시간을 묘사한다. 이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그림(pictures)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사진은 그것이 만들어졌던 단지 시간의 그 기간을 묘사한다. 사진은 그 잔존하는 것(relics)을 통한 과거, 그 현재에 보이는 예언(prophecy)을 통한 미래, 그것이 그 현재에 존재하는 한 단지 과거와 미래를 언급한다.
저감도 필름과 저감도 렌즈 시대에, 사진들은 몇 초나 그 이상의 시간 단편을 묘사했다. 만일 주제가 움직였다면, 이미지들은 결코 전에 보았었던 것이 아니었다: 2개의 머리와 한 다발의 꼬리를 가진 개들, 특징이 없는 얼굴, 투명한 사람들, 판(plate)을 가로질러 그들의 엷은 물체의 반을 펼치고 있다. 이 사진들이 부분적인 실패로서 고려되었던(아무리 잘해도) 사실은 그것들이 양적으로 만들었었던 그 사실보다 덜 흥미로웠다; 그것들은 가족 포츄레이트들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애기들과 포즈를 취했던 모든 고객들에게 그리고 모든 사진가들에게 친숙해 있었다.
이 급진적인 이미지의 유행이 예술 역사가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놀랄 만하다. 1차 세계대전 전에 했던, 뒤샹(Duchamp)과 발라(Balla)의 타임랩스 그림은, 에저턴(Edgerton)과 밀리(Mili)와 같은 사진가에 의해 했던 작업과 비유된다, 그는 25년 후에 유사한 아이디어와 함께 의식적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19세기의 우연한 타임랩스 사진들은 무시했었다—아마 그것들이 우연적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의 재료들이 더 많이 민감해질 때, 렌즈와 셔터로 빠르게 움직이는 주제의 조사에 향했던 더 빠른 사진을 만들었다. 그 눈이 영화의 하나의 프레임을 기록할 수 없는 것처럼 일초당 24장의 비율로 스크린에 투영되었다, 그래서 삶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주제의 위치를 따라가는 것을 할 수 없다. 질주하는 말은 고전적인 예이다. 그리스인과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과 중국인에 의해 애정을 기울여 수천 번 그려진 것처럼, 그리고 집단 기마곡예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말이 한껏 뻗친 4 발이 달리게 했던 기독교도(Christendom)의 스포츠 프린트와 모든 전투 장면들에서. 1878년에 질주하는 말을 성공적으로 사진을 찍었던 머이브릿지(Muybridge)가 관습을 깰 때까지 아니었다. 그것은 새의 비행, 운동선수의 등의 근육의 동작, 보행자의 옷의 휘장과 인간의 얼굴의 즉흥적인 표정과 함께 또한 이 점이었다.
시간의 이 짧은 단편을 고정하는 것은 사진가에게 매혹을 지속하는 것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이 실험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일어나고 있었던 것과 거의 관련이 없었던 시간의 이 파편이 되는 것에서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움직임의 흐름 내에서 사전에 숨겨졌던 선(lines)과 형태를 순간적으로 패턴화하는 것을 보는 것과 오히려 관계가 있었다. 까르띠에 브레송(Cartier-Bresson)은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란 표현phrase과 함께 이 새로운 아름다움에 그의 실행(commitment)을 정의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제대로 이해 받지 못했다; 결정적 순간에 일어나는 것은 드라마틱한 정점(climax)가 아니라 시각적인 것이다. 그 결과는 스토리가 아니라 사진(picture)이다.
Vantage Point
많은 것은 사진의 명쾌함에 대해 말했었지만, 그 애매함(obscurity)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외의 시점(vantage point)에서 우리가 보길 가르쳤었던 사진이고, 그 내러티브 의미를 억누르는 동안, 그 장면(scene)의 느낌을 주는 사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필요성에서 사진가들은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옵션들로부터 선택한다, 그리고 종종 이것은 배우의 등을 보여주고 있는 무대(proscenium)의 다른 측면들로부터 사진들, 새의 시선이나 벌레의 시선으로부터의 사진들, 또는 극도의 원근법으로 그리는 것에 의해,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의해, 또는 익숙지 않은 빛의 패턴에 의해, 또는 행동이나 몸짓의 외관상의 애매함에 의해 주제가 왜곡했던 사진들을 의미한다.
아이빈스(Ivins)는 그런 사진들이 19세기의 시각에서 가졌던 효과의 드문 인식과 함께 썼다: “처음에는 대중들이 그것이 사진의 왜곡distortion이라 불리우는 것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사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 자신을 보기 위해 그것은 그들의 놀랐고 주장하고 있는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 사전에 사진을 찍었었다. 자연nature을 예술이 이전에 모방했었던 것처럼, 그래서 지금 그것은 카메라로 만들어지는 사진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1세기와 25년 이후, 리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도식화했던 개념들에 도전하고, 거절하는 사진의 능력은 아직도 새롭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 관한 그의 연구 논문에서, 로렌스 앨러웨이(Lawrence Alloway)는 그 화가에 대한 사진의 효과에 대해 말한다: “그의 이미지의 분명치 않은 성질은, 충격적이지만 분명치 않다, 사고 또는 잔인한 사진처럼, 시각적인 이미지들의 사진의 거대한 레퍼토리를 사용하는 것에 의해 도달하게 된다… 캡션이 없는 뉴스 사진들은, 예를 들면, 종종 중요하고 엄청나게 보이게 된다… 베이컨(Bacon)은 전통적인 그림에서 형상(figures)의 태도의 명쾌함을 파괴하기 위해 사진의 이 자산(property)을 사용했다.”
현대의 화가들(그리고 현대의 작가들)에 관한 사진의 영향력은 컸고 헤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사진이 또한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줬던 것을 기묘하게도, 잊기 더 쉽다. 위대한 사진가들에 의한 위대한 사진들뿐만 아니라, 사진—크게 차별받지 않고, 동종의 모든 것—은 예술가로서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사용했던 사람들을 위한 선생님이었고, 도서관이었고, 연구소이었다. 한 예술가는 삶의 리얼리티의 그의 감각을 정리하고 단순화하는 새로운 구조를 찾는 사람이다. 예술 사진가에게, 리얼리티(그의 사진이 착수했던)의 그의 감각에서 많은 것과 기능이나 구조(그의 사진이 완성했던)의 그의 감각에서 많은 것은 그 자체가 사진으로부터의 특징이 없고 추적할 수 없는 선물이다.
사진의 역사는 오히려 성장이 아니라 여행이었다. 그 움직임은 선형(linear)적이고 연속적이 아니었지만 원심력(centrifugal)이었다. 사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중심(center)으로부터의 펼쳤었다; 그것은, 주입(infusion)에 의해, 우리의 의식에 스며들었다. 유기체와 같이, 사진은 완전하게 태어났다. 그것은 그 역사가 있던 것의 우리의 진보적인 발견에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