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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14. 2024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  1981년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enant's Woman)는 영국에서 제작된 카렐 라이즈 감독의 1981년 드라마, 멜로/로맨스 영화이다. 메릴 스트립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찰스 스미스선과 사라 우드러프의 비극적이면서도 복잡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찰스는 부유한 젠틀맨이지만, 전통적인 가치와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한편, 사라는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여성으로, 당시 사회의 억압적인 도덕 규범에 도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1]

모든 해방은 인간 세계의 회복이며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관계의 회복이다.

-카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1844) 

    

영국 남서쪽으로 다리를 뻗은 돌출부의 아래쪽에 한 입 크게 물어뜯은 듯 휘어 들어가 있는 라임 만, 이곳에서 가장 불쾌한 바람은 샛바람이다.

1867년 3월 말, 춥고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아침, 별로 크지는 않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라임 읍 — 라임 만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 에서 한 쌍의 남녀가 안벽(안벽)을 따라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보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당장에 그럴듯한 몇 가지 상상을 떠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P9)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스에게는 그녀가 자기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첫 만남 이후 찰스의 기억에 또렷이 남은 것은,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 있던 특징 따위가 아니라,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괜찮은 여성이라면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다소곳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남의 땅에 불법 침입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코브가 라임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소유지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어니스티나처럼 곱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슬픔이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꾸밈도, 위선도, 발작도, 가면도 없었다. 더욱이 광기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광기는 오히려 저 텅 빈 바다, 텅 빈 수평선,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에 있었다. 샘 자체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사막에서 솟아 나오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았다. 

그 후 찰스는 그녀의 시선이 기억날 때마다 하나의 창(槍)을 떠올리곤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묘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효과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들때면, 찰스는 자신이 그 창에 마땅히 찔려 죽어야 할 부정한 적이라고 느꼈다.               (P19-20)   

  

찰스는 젊은 과학도로 자처하기를 좋아했던 만큼, 미래에 생겨날 비행기라든가 제트 엔진, 텔레비전, 레이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놀라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았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는 시간 부족이다. 과학에 대한 사심없는 열정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에 대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독창성과 사회이 소득 가운데 큰 몫을, 일을 보다 신속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찾는데 투자하고 있다. 마치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 완전한 인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번갯불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찰스에게, 또한 시대-사회적으로 그의 동료였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존재하는 시간의 박자는 분명 <아다지오>였다. 문제는 한정된 시간 속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남아도는 여가의 드넓은 광장을 채우기 위해 일을 일부러 질질 끄는 것이었다.          (P22)    

 

찰스는 언덕의 굽이진 가장자리를 돌아서, 잠든 여자의 얼굴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바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였다. 머리카락은 풀어져서 뺨을 반쯤 덮고 있었다. 코브에서 보았을 때는 그 머리카락이 어두운 갈색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것은 따뜻한 느낌의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당시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바르고 다녔던 머릿기름의 번지르르한 광택도 없었다.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나 있는 살결은 석양 아래서 거의 붉게 보일 정도로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에 유행하던 창백한 안색보다는 건강한 안색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오똑한 콧날과 짙은 눈썹.... 입술..... 그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지형 때문에 적당한 각도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얘기치 않은 만남에 넋을 잃고, 야릇한 — 관능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오빠나 아버지가 된 듯한 — 감정에 휩싸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결백한데도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배척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과 생각은 그가 그녀의 지독한 고독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여성들은 반쯤 집 안에 갇혀 있으면서, 늘 수줍고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고, 또 육체 활동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녀를 이 황량한 곳까지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이 절망감일 거라고 짐작했다.                (P103-104)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주인공들의 마음과 깊은 생각까지 아는 척 해왔다면, 그것은 내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된 관행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행이란, 소설가는 신에 버금가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는 체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알랭 로브그리예와 롤랑 바르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 해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소설일 수는 없다.                 (P136)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들은 글을 쓸 때 나름대로 설정된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제1장에서 예견된 미래는 언제나 정확한 경로를 밟아 제13장에 이르러 실현될 것이라고. 그러나 소설가들은 저마다 다른 숱한 이유들 때문에 글을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애인들을 위해, 허영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즐거움 때문에. 목수들이 가구 만들기를 즐기듯, 술꾼들이 술을 즐기듯, 판사들이 판결을 즐기듯, 시칠리아 사람들이 복수의 충격을 즐기듯. 그 갖가지 사연들만 가지고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진실일 것이다. 모두의 진실은 아닐지라도. 우리를 소설가에게 공통된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 <우리는 실재하는(또는 실재했던) 세계만큼이나 사실적인, 그러나 그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이것이 우리가 미리 설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창조된 세계는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순수하게 창조된 세계는 그 창조자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계된 세계 — 그 형태와 구조를 평면도에 미리 드러낸 세계 —는 이미 죽은 세계다. 우리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우리에게 반항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찰스가 사라를 벼랑 끝에 남겨 두고 떠났을 때, 나는 그에게 곧장 라임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까닭 없이 방향을 돌려 낙농장으로 내려갔다.

아아, 하지만 여러분은 나한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글을 쓰는 도중에 문득 찰스로 하여금 우유를 마시게 하고, 낙농장 아낙과 잡담을 나누게 하고, 사라를 다시 만나게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냐고. 이것은 분명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발상은 내가 아니라 찰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 자율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의 자율성을 존종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고 싶으면, 내가 신과 비슷한 입장에서 그를 위해 세워 놓았던 모든 계획을 무시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는 찰스만이 아니라 티나와 사라, 심지어 저 밉살스러운 폴트니 부인에게도 각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신에 대한 좋은 정의가 하나 있다. -- <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도록 하는 자유>. 나는 이 정의에 따라야 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하나의 신이다. 소설가는 창조하기 때문이다(가장 전위적인 현대 소설조차 작가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소설가가 더 이상 빅토리아 시대적인 이미지, 즉 전지전능한 이미지를 지닌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가는 권위가 아니라 자유를 제일 원칙으로 삼은 새로운 신학적 이미지를 지닌 신이다.

내가 환상을 깨뜨려 버린 것일까? 아니다. 나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내가 방금 깨뜨려 버린 환상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꼭 그만큼의 사실적인 현실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2천5백 년 전에 그리스 인들이 깨달았듯이. 모든 것 속에는 허구가 꿰맞춰져 있다. 내 생각에는 이 새로운 현실성(또는 비현실성)이 더 타당하다. 여러분이 현대판 폴트니 부인 같은 사람이라서 당신의 자녀와 동료, 친구, 또는 당신 자신을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나 역시 내 마음속의 인물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러분도 이런 나의 인식에 공감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늬없는 말일까? 등장인물은 <사실적>인가, <상상적>인가? 여러분이 나의 이런 견해를 <위선자의 강연>쯤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조차 그것을 실재했던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것을 치장하고, 금박이나 옻칠을 바르고, 검열하고, 땜질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소설화하고, 선반 위에 — 여러분의 책, 여러분이 지어낸 자서전 속에 — 집어 넣는다. 우리는 모두 실제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의 기본 정의다.

그러므로 이 불길한(그러고 보니 여기는 하필 <13>장이다) 탈선이 여러분의 시대와 진보, 사회, 진화, 그 밖에 이 책의 장면들 뒤에서 쇠사슬을 덜거덕거리고 있는 온갖 유령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하지만 여러분이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심스럽다.                   (P138-139) 

    

그녀의 검은 눈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 시선이 찰스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눈빛은 결코 영국적인 것이 아니었다. 찰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외국 여자 — 솔직히 말하면(그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외국 침대 —를 연상했다. 이런 인상은 사라에 대한 새로운 단계의 인식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지금까지는 겉보기보다 지성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녀의 기질 속에 어두운 구석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다.

당시의 영국인들은 대부분 사라의 그런 본성을 느끼면 혐오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사실 찰스도 가벼운 혐오감 — 적어도 충격 —을 느꼈다. 그 또한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형태의 관능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초자아의 명령에 따라 일어나는 엄격한 동일화로 말미암아, 그런 본성을 타고난 책임을 사라에게 뒤집어 씌웠겠지만, 찰스는 그러지 않았다. 다윈 반대자들 중에서도 좀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깨달았지만, 진화론은 단순히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성서의 설명을 간접적으로 공격할 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각한 주장에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진화론의 핵심에는 결정론과 행동주의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함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진화론은 도덕성을 위선으로 격하시키고 의무를 폭풍 속의 밀짚 모자처럼 날려 보내는 철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찰스가 사라의 책임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라가 상상했던 만큼은 그녀를 탓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그의 과학적인 취미 탓일 테지만, 찰스는 10년 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을 읽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외설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에 아주 은밀히 읽어야 했던 그 소설은 저 유명한 [보봐리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곁에 서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문득 어디선지 모르게, 엠마 보봐리라는 이름이 그의 마음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런 암시들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유혹적이었다. 그가 작별을 고하고 물러가지 않은 것은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P169-170)   

  

그는 영국 사회가 너무 완고하고, 영국의 점잖음이 너무 격식에 치우쳐 있고, 영국의 사고방식이 너무 도덕주의적이고, 영국의 종교가 너무 편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P183)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이 왜 나한테..... 그런 비밀까지 털어놓았는지.....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사라는 그런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연설을 되풀이하거나 달달 외고 있는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여행을 많이 다녔으니까요. 교육도 많이 받으셨고, 또 신사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글쎄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전 친절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은 가장 잔인한 야만인들보다도 잔인하고, 가장 어리석은 동물들보다도 어리석을 뿐이에요. 그들에게서는 진실을 볼 수 없어요. 그들의 생활에는 이해심도 없고 동정심도 없어요. 제가 무엇을 괴로워하고 있는지, 또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관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그토록 고통받아야 한다는 건 옳은 처사가 아니에요.”         (P198-199)     

“박사님도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찰스가 말했다. “라이엘의 발견은 발견 자체의 중요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래도 성직자들은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중간에 끼어들어 한마디 보태자면, 찰스 라이엘은 근대 지질학의 아버지였다. 물론 라이엘 이전에도 뷔퐁이 저 유명한 [자연의 각 시대]에서, 17세기에 어셔 대주교에 의해서 창작되고 [흠정역 성서]에까지 엄숙하게 기록된 신화 — 세계는 기원전 4004년 10월 16일 아홉시에 창조되었다 — 의 허구성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프랑스의 박물학자조차 감히 지구의 기원을 그보다 7만 5천년 더 이전으로 밀어 붙이지 못했다. 그것을 다시 수백만 년 전으로 밀어붙인 것이 바로 1830~1833년에 출판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다. 그의 이름은,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아주 중요한 이름이다. 그는 자기 시대와 다른 분야의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발견은 한편으로는 비겁한 자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 있는 자들을 격려하면서, 19세기의 진부한 형이상학적 통로를 통하여 거대한 바람을 몰고 왔다. 그러나 당시에는 라이엘의 걸작에 대해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드물었고, 그의 이론을 신봉한 사람은 더욱 드물었으며, 거기에 함축된 진실을 수용한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창세기]는 위대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시이기도 하다. 6천 년 묵은 자궁은 20억 년 묵은 자궁보다 훨씬 따뜻하다.           (P225-226)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으실 거예요. 왜냐하면 여자가 아니니까요. 농부의 마누라가 될 팔자로 태어났으면서도 무언가 다른.....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교육받은 여자가 아니니까요. 전 여러 번 청혼을 받았답니다. 도체스터에 있을 때는 어떤 돈 많은 목장 주인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은 지성과 아름다움과 배움에 타고난 존경심이랄까, 사랑이랄까, 그런 걸 가진 여자로 태어나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런 것들을 바랄 권리가 전혀 없어요. 그런데 제 가슴은 그것을 갈망하고 있고, 그게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정교사 노릇도 해보지 않았어요. 자식도 없는 젊은 여자가 남의 아이들을 돌봐 주고 보수를 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선생님은 모르세요. 사람들이 친절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심해진다는 걸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어요. 제가 시기심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전 어린 폴과 버지니아를 사랑했고, 탤벗 부인에게는 감사와 존경을 느꼈답니다. 그분이나 그 집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부, 귀여운 아이들을 그토록 가까이서 보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탤벗 부인은 저와 동갑이에요..... 그건 마치 낙원에 살도록 허락을 받았으면서도 그걸 즐기는 건 금지된 것 같았어요.”

“그러나 당신이 말한 그런 상실감은 우리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있는 그런 게 아니겠소?” 그녀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자기가 그녀의 심중에 깊이 자리 잡은 어떤 감정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난 다만 사회적 특권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그녀가 또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최소한의 행복이나마 가능한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 사이에는 닮은 점이 전혀 없어요.”              (P239)     

“알아요,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께 이해해 달라고 간청하는 건, 제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왜 그런 짓을 했느냐 하는 거예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는 손을 뺨에 갖다 댔다. “그래요. 전 똑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으려고 그런 짓을 했어요. 사람들이 절 손가락질하면서 저기 프랑스 중위의 창녀가 간다고 말하게 하려고...... 그래요, 그런 말이 나오게 하려고 그런 짓을 했어요. 이 땅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저도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하려고요. 전 그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전 수치와 결혼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때 제가 제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거나, 자기 뜻대로 하도록 저를 바르귀엔에게 내맡겼을 때 제 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때는 저 자신을 벼랑 아래로 내던지거나 제 심장에 스스로 칼을 꽂는 기분이었어요. 일종의 자살이었죠. 절망에서 나온 행위였어요. 사악한 신성 모독이었다는 건 알지만, 그것 말고는 그때의 저 자신한테서 벗어날 길을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방에서 나와 버렸다면, 그래서 탤벗 부인 댁으로 돌아와 이전의 저 자신을 회복했다면, 지금쯤은 아마 죽어 버렸을 거예요. 그것도 제 손으로.....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수치심과,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자각이에요. 전 다른 여자들이 갖는 남편이나 자식, 그리고 순결한 행복 따위는 결코 갖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자기가 말한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이해한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 “가끔 저는 그들을 동정해요. 전 그들이 갖지 못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모욕이나 비난도 저를 자극할 수는 없어요.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저 자신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전 아무것도 아니고, 이젠 더 이상 인간도 아니에요. 그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일뿐......”                 (P246-247)    

 

찰스는 방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발견해서 어니스티나에게 갖다준 청회석에 기록된 고대의 재난이 문득 마음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랐다. 한때 바다였다가 지금은 물이 빠져나가 버린 곳에서 주운 암모나이트 화석에는, 9천 만 년 전의 지각 변동이 극도로 압축되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검은 번갯불처럼 생생한 통찰 속에서, 그는 모든 생명의 대등함을 깨달았다. 진화는 완전함을 향한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수평적 이동이다. 시간은 중대한 오류였다. 존재에는 역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이고, 언제나 같은 악마적 기계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이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인간이 세운 그 화려한 장막들 — 역사, 종교, 의무, 사회적 지위 — 은 모두 환상, 아편에 중독되었을 때 보이는 환각에 불과하다.              (P287-288)   

  

찰스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니스티나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생각 — 그녀는 앞으로도 결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확신 —을 의사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성이 이제야 바로 서고 있음을 느꼈다. 그 지성은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에서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좀 더 후세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찰스는 이상(理想)의 영향을 받으며 일생을 살아갈 터였다. 아내보다 못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아내보다 잘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다. 찰스는 이제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한 남자인지를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P315-316)     

[2]

그녀에게는 야성적인 면이 있었다. 그것은 광기나 히스테리에서 오는 야성 — 찰스는 굴뚝새의 울음소리에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 이 아니라..... 순수함, 아니 간절한 열망에서 나오는 야성이었다. 그리고 그 새벽 산책이 이렇게 급진적 타락한 것이 그의 진지한 자기성찰에서 나온 우울함을 반박하는 동시에 더욱 악화시켰듯이, 그 강렬하고 직관적인 사라의 얼굴은 마테이와 그로건 같은 뛰어난 의사들이 찰스의 마음속에 심어 준 온갖 임상학적 공포를 반박하는 동시에 더욱 악화시켰다. 헤겔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는 변증법적 정신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생각하지 않았고, 긍정과 부정을 동일한 전체의 양면으로 생각지 않았다. 역설은 그들에게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실존주의적 계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사슬을 추구하는 사람들, 신중한 연구와 면밀한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이론을 세우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짓고 세우느라 바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부수는 데 바빴기 때문에, 이제는 건설이라면 풍선껌을 부는 것처럼 덧없는 활동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찰스는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해한 존재였다. 그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는 미소였다.             (P345-346)     


그대를 볼 때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내 혀는 비틀거리고,

가느다란 불길이 내 팔다리에 스며들고,

내면의 천둥소리가 내 귀를 멀게 하고,

내면의 어둠이 내 눈을 멀게 한다.

이것은 카툴루스가 사포의 시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사포의 시는 유럽 의학에서 지금도 여전히 사랑을 임상학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것으로 꼽힌다.           (P348)    

 

나는 어니스티나를 그대지 좋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은 상황의 희생자, 즉 편협한 환경의 희생자였다. 물론 중산층을 이스트와 밀라루 반죽의 독특한 혼합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신 분열증적인 그들의 사회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산층이 언제나 가장 위대한 혁명적 계급이었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스트보다는 밀가루 반죽만 너무 과장하여, 부르주아지를 반동의 중핵지대, 모든 대상을 모욕하면서도 영원히 이기적이며 순응적인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야누스 같은 그들의 특징은 바로 그 계급의 유일한 미덕에서 나온다. 그 미덕은 자신에 대한 멸시다. 사회를 크게 세 계층 — 귀족,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 — 으로 나눌 때, 오직 그들만이 진지하게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멸시한다. 이 점에서는 어니스티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달갑지 않은 신랄함을 느낀 것은 찰스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이것은 아직도 어디에나 존재한다)은 자기멸시라는 이 값진 천부적 재능을 남용하여, 자신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신념이 부족한 것은 중산층의 결점이었다. 그녀는 중산층의 이런 결점을 계급 구조 전체에 저항해야 할 이유로 여기는 대신, 더 놓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로 생각했다. 물론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녀는 사회를 사다리에 걸쳐진 수많은 가로대와 같은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회관이 바뀔 가망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밟고 있는 가로대는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하나의 계단에 불과했다.             (P351-352)     


잠시 후 두 남자는 널따란 복도를 지나, 이 저택의 중앙 홀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층계참으로 걸어갔다. 이 집에 있는 것 가운데 당대의 최고품이 아닌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층계참을 돌아서 하인 쪽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찰스는 문득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 듯한 — 우리에 갇힌 사자 같은 — 기분을 느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윈즈야트에 대한 애정이 가슴에 저몄다. 윈즈야트를 채우고 있는 그 <형편없는> 낡은 그림들과 가구들, 윈즈야트의 연륜, 안도감, 품위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이 문득 마음을 스쳤다. 진화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는, 그들이 막 들어가려는 방의 문틀을 이루고 있는 코린트식 원주처럼, 겉치레의 속물근성으로 얼룩져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문턱 위에서, 그와 그의 고문자는 새로 금도금한 문기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기전에 잠깐 — “찰스 스미스선 씨께서 오셨습니다. 마님!” — 걸음을 엄췄다.          (P401-402)     

이런 딜레마가 여러분에게는 역사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1867년 4월의 어느 날 저녁에 찰스는 비관적인 상상력으로 <신사>라는 족속의 멸종을 예견했지만, 1969년인 지금 <신사>의 멸종 정도는 찰스가 예견했던 것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나는 멸종 위기에 놓인 <신사>라는 족속을 특별히 변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만물의 본질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만물의 본질 그 자체다. 그러나 죽는 것은 형태일 뿐, 그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질료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 대체된 형태의 연속체를 통해 이어지는 것, 우리는 그것을 실존, 일종의 내세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가 지녔던 가장 훌륭한 자질들은 중세의 기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따라 그 자질을 뒤쫓아 보면, 현대의 신사에까지 내려올 수 있다. 그 족속을 우리는 과학자라고 부른다. 과학자야말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그 자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문화 — 아무리 비민주적인 문화도, 아무리 평등주의적인 문화도 — 는 어떤 행동 규범에 얽매여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윤리적인 엘리트를 필요로 한다. 이 행동 규범의 일부는 대단히 비윤리적일 수도 있고, 따라서 형태의 궁극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 규범에는 역사에서 그들이 맡고 있는 기능이 좀 더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도록 체계를 강화하거나 대행하려는 좋은 의도가 숨어 있다.

중세에 프랑스에서 새로 생겨난 순결의 개념을 가지고 성배를 찾아 나섰던 1267년의 찰스, 상업을 혐오하는 1867년의 찰스, 그리고 자신들의 잉여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나약한 휴머니스트들의 절규를 들으려 하지 않는 오늘날의 컴퓨터 과학자 찰스 — 이 세 종류의 찰스는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여성의 육체를 추구했든, 높은 이윤을 추구했든, 진보의 속도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했든, 그 추구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는 생각을 거부했거나 거부하고 있다. 과학자는 또 하나의 형태일 뿐이며, 그것은 곧 다른 형태로 대치될 것이다.              (P411-412)   

  

그러나 찰스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만물의 기본 원리라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라임에서 그날 밤 그로건 박사와 낙천주의에 물든 토론을 벌일 때 이야기한 바 있는 적자생존의 한 측면 —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자기 분석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독특한 특권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두 사람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는 증거를 보았다. 프리먼씨조차 동의 했듯이, 인간은 생존을 위해 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이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이제 찰스에게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는 실제는 이론과는 달랐다.

그는 덫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실제로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P413)    

 

그는 씩 웃었다. 왜냐하면 어린애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감상적인 애정이기보다 오히려 냉소적인 의식 —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일종의 신뢰감 — 의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콤 경의 사륜마차를 타고 있던 초저녁 때만 해도 그는 자기가 현재에만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졌었다. 그때 과거와 미래를 부인했던 것은 무책임한 망각 속으로 뛰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위대한 환상에 대해 훨씬 심오하고 진정한 직관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의 현실은 진리가 아니라 길의 현실과 마찬가지여서, 그 길 위에서 인간은 자신이 전에 어디에 있었으며 또 앞으로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를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시간은 방과 마찬가지다. 현재는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는 대개 그것을 보지 못한다.

찰스의 경험은 사르트르의 경험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주위에 있는 소박한 가구와 옆방에서 흘러드는 따뜻한 불빛, 초라한 그림자들, 무엇보다도 그가 무릎에 올려놓고 있는 그 작고 가벼운 존재, 어미(그녀에 대해서는 이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의 무게를 느낀 뒤라서 실체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존재 — 이것들은 이제 그를 침해하는 적대적인 대상들이 아니라, 그를 이루고 있는 우호적인 대상들이었다. 궁극의 지옥은 끝도 없이 텅 빈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주위에 있는 것들은 그 지옥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는 문득 아무것도 없는 무서운 공간의 한 형태에 불과한 자신의 미래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지분을 느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런 순간들은 되풀이 될 것이다. 그는 그런 순간들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445-446)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개인과는 다르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활동일 뿐이다.

-- 카를 마르크스, 신성한 가족(1845)               (P448)     

마차는 사형수 호송차처럼 애처롭게 흔들릴 때마다 느슨해진 용수철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속 굴러갔다. 저녁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가랑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 마차를 타고 여행할 때면, 찰스는 으레 샘을 불러서 마차 안에 앉아 가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샘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는 고독한 시간을 갖기 힘들 터였다. 남아 있는 짧은 순간이나마 즐기고 싶었다. 그는 엑서터에 남겨 두고 온 여인을 다시 생각했다. 물론 그녀를 어니스티나와 대등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또 마음만 고쳐먹으면 어니스티나 대신 결혼할 수도 있는 상대로 생각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반드시 사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의 잃어버린 가능성, 사라진 자유, 다시는 떠나지 못할 여행을 모두 합쳐서, 그 상실감을 더욱 부풀려 주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인생에 희생된 제물의 하나였고,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갇혀 이제는 영원히 오도가도 못하고, 결국 하나의 화석으로 변하게 될 또 하나의 암모나이트였다. 

잠시 후 그는 궁극적인 나약함을 보여 주었다.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P462-463)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면, 보다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그림자 속에 묻혀 버린다.             (P468)    

 

나는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우리들 가운데 시를 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며 소설가라고.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을 소설 속의 주인공보다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많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허구적인 미래를 써보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을 마음속의 스크린에 비추어 본다. 그리고 이 소설 같은, 또는 영화 같은 가정들은, 미래가 정말로 현재가 되었을 때, 우리의 실제 행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P471)  

   

빅토리아 시대에는, 극소수의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뿌리 깊은 배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등지고 자기만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는 재능이었다. 같은 종파에 속한 신자들끼리도 교회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무기력한 교회의 파벌 싸움과 사치에 물든 주교들, 음모를 일삼는 참사회원들, 걸핏하면 자리를 비우는 교구 목사들, 급료가 낮은 부목사들, 낡은 교리 따위를 조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전히 예외로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에게 비치는 완전히 세속화된 모습 — 즉, 은유를 사용하는 데, 인간적 신화를 창조하는 데,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데 놀라운 재능을 가졌던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간의 모습 — 으로는 비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신성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질책은 더욱 강해졌다. 우리 현대인은 우리 시대의 잔인함과 우리의 죄의식 사이에 공공복지라는 거대한 건조물을 세웠다. 자선 사업은 완전히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그 잔인성과 훨씬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다. 지성적이고 민감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훨씬 더 많은 책임감을 느꼈다. 따라서 어려운 시기에는 동정의 보편적 상징인 그리스도를 거부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찰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가지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신앙을 필요로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앙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기꺼이 터득했다. 그리고 라이엘과 다윈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이성은 종교적 교리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교회에 와 있었고, 사라 때문이 아니라, 신과 소통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어두운 교회 안에서, 그는 신과의 통신망이 끊겼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소통도 불가능했다.                        (P498-499) 

    

그는 거기에 서서, 자기 시대의 모든 것 — 혼란스러운 생활, 강고한 확신과 엄격한 관습, 억압된 정서와 우스꽝스러운 익살, 조심스러운 과학과 뻔뻔스러운 종교, 타락한 정치와 변함없는 계급 제도 —을, 그의 가장 깊은 갈망을 은밀히 방해하는 막강한 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속인 것은 바로 그의 시대였다. 그의 시대에는 사랑과 자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생각도 없고, 목적도 없고, 악의도 없었다. 속임수는 그 시대의 본질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는 비인간적인 기계였다. 그것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실패였고, 나약함이었고, 암이었고, 찰스를 지금의 찰스 —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몽상하기를 즐기고, 말보다는 침묵을 택하고, 행동보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인물 — 로 만든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리고 화석이었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바닥 없는 낭떠러지로 다가가는 것과 같았다.               (P504-505)  

   

“난 의사일세, 스미스선. 의사로서 나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법칙을 알고 있는데, 그건 바로 모든 고통은 악이라는 걸세. 때로는 필요악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기본적인 성질이 달라지는 건 아닐세.”

“그렇다면 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바로 그 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과거의 자아가 무너진 폐허위가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보다 나은 자아를 어디에 어떻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P547)   

  

몬터규는 점잖게 그 서류를 빼앗았다. “법은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지금쯤은 그걸 알 때도 됐을 텐데 그래.”                  (P572)  

   

“저는 종종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부수는 것을 보았어요. 저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작품인데도, 그들은 미련 없이 파괴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제가 항의를 했더니, 예술가가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심판자가 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술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았답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도 저 자신이 파괴해 버리는 것이 옳다고 믿었어요. 거기엔 거짓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P620)   

  

진화란 단지 우연(핵산의 나선 구조가 자연의 방사선 때문에 일으키는 돌연변이)과 자연 법칙이 협력하여 생존에 좀 더 적합한 생명체를 창조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마틴 가드너, 두 얼굴을 가진 우주(1967)            (P640)   

           

신비로운 법칙과 신비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강물은 황량한 강둑을 진지나 흘러간다. 그리고 또 다른 황량한 강둑을 따라서 찰스는 자신의 시체가 실린, 눈에 보이지 않는 상여를 뒤따라 가는 사람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임박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드디어 자신에 대한 믿음 한 조각, 그 위에 자기 존재를 세울 수 있는 진정한 고유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비통하게 그것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리고 그의 눈에는 그 부인을 지지하는 눈물까지 고여 있지만, 그리고 사라가 어떤 면에서는 스핑크스 역할을 맡기에 유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에서 한 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를 한 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도시의 냉혹한 심장으로 끌려 들어간 인생이 아무리 불충분하고 덧없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인생을 견뎌 내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강물은 흘러간다. 다시 바다로, 사람들을 떼어 놓는 바다로.          (P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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