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May 16. 2024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영화 <아들과 연인>  1960년

“모든 인생의 역사는 개인과 전체 사회의 괴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David Herbert Lawrence)의 자서전 같은 소설이다. 그는 1885년 노팅엄셔 주의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태어났다. 광부인 아버지(월터 모렐)와 교사였던 어머니(거트루트 모렐) 사이에서 다섯 아이들 중 넷째(소설에서는 둘째 폴)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가정의 불화를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2년 어머니를 여읜 뒤 대학 시절 은사의 아내이자 여섯 살 연상의 독일 여인 프리다 위클리(소설에서는 유부녀 클라라)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1914) 1차 세계대전으로 더 이상 독일인 부인과 함께 영국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이탈리아 등을 떠돌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

그녀는 자기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인지 생각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녀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듯했고, 보텀스의 뒤뜰을 무거은 몸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이 십 년 전 쉬어니스의 방파제에서 그다지도 가볍게 뛰어다녔던 사람과 같은 존재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도대체 그것이 지금의 나와 무슨 관련이 있나!>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걸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내가 낳을 아이는! 내 사정은 고려되지도 않은 것 같아.>

때로 삶은 한 인간을 사로잡아 그 육신을 이끌고 다니면서 그 사람의 역사를 완성하지만 그 삶은 진실로 여겨지지 않고 그의 자아는 무심하게 내버려진다.

모렐 부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데 내가 기다리는 것은 결코 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부엌을 치우고 램프에 불을 붙이고 난롯불을 살피고 다음날의 빨래거리를 찾아서 물에 담갔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앉아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P24-25)    

 

사내아이가 태어날 때 거트루드 모렐은 심한 산통을 겪었다. 모렐은 그녀에게 정성을 들여 잘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서 몹시 외롭게 느꼈다. 그녀는 이제 남편과 같이 있을 때도 외로웠고 그의 존재는 외로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아이는 처음에 조그맣고 약했지만 이내 건강해졌다. 그 애는 짙은 황금색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아름다운 아이였고, 그의 암청색 눈은 점차 맑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환멸의 쓰라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삶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고 그녀의 영혼이 황량하고 외로울 때 태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아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질투했다.                  (P40)   

  

모렐 부인은 조합교회주의파 목사로부터 매일 방문을 받았다. 허튼 씨는 젊고 아주 가난했다. 그의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었고 그래서 그는 목사관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문학사였고 수줍음을 많이 탔으며 설교자 타입이 아니었다. 모렐 부인은 그를 좋아했고 그는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녀가 몸이 괜찮을 때면 그는 몇 시간 동안 그녀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기의 대부가 되었다.

아기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아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생활이 없었고 청소하고 요리하며 아이를 돌보고 바느질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젖혀놓고 실상 아이들이라는 은행에 맡겨놓아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했으며 아이들이 자랐을 때 자신은 아이들의 뒤에서 밀어주는 원동력으로 남아 있으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게 될까 환상에 잠겼다. 벌써 윌리엄은 그녀에게 연인과 같았다.        (P81-82)  

   

그녀는 남편을 미워했다. 그는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동정을 받기 위한 푸념과 연극을 일삼았다. 아기를 돌보며 앉아 있던 윌리엄은 거짓 감정에 대한 소년의 증오심과 자기 어머니를 무식하게 대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했다. 애니는 아버지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그저 피해 다닐 뿐이었다.             (P89)   

  

아이들이 커서 홀로 내버려두어도 될 만큼 되었을 때 모렐 부인은 여성 조합에 가입했다. 그것은 협동구매협회 조합에 부속된 소규모의 여성 클럽이었는데 <베스트우드 구매 조합>의 잡화점 2층에 있는 긴 방에서 월요일 밤마다 모임을 가졌다. 여자들은 구매협회에서 얻어지는 이익이나 다른 사회적 문제들을 토론했다. 때로 모렐 부인은 발표를 했다. 항상 집안 일로 바쁜 자기 어머니가 앉아서 빠르게 글을 쓰고 생각하고 책들을 참조하여 다시 글을 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경우에 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아이들은 <조합>을 좋아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거기에 가는 것만큼은 싫어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그 일을 즐겨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아이들이 거기에서 받는 대접 때문이기도 했다. 자기 아내들이 너무 독립적으로 되어간다고 생각한 어떤 적대적인 남편들은 그 조합을 <딸그락거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가게, 즉 수다 떠는 가게라고 불렀다. 조합의 기본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서 여자들이 자기들의 가정과 그들의 삶의 조건을 살펴보고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광부들은 아내들이 그들 나름의 새로운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P129)     


“중요하지 않다고! 그 애를 나와 함께 탄광에 넣으면 처음부터 쉽게 주당 10실링은 벌 거야. 그런데 의자에서 바지 엉덩이를 닳게 하면서 6실링을 버는 것이 나와 함께 탄광에서 10실링을 버는 것보다 낫단 말이지.”

“그 애는 탄광에서 일하지 않을 거예요.” 모렐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요.”

“그래, 광부가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일이지만 그 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열두 살에 탄광에 보냈다고 해서 내가 내 아이에게 똑같이 해야 할 이유는 없어요.”

“열두 살이라고! ....... 그보다 훨씬 전이었소!”

“언제였든 간에요.” 모렐 부인이 말했다. 

그녀는 아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야학에 나갔고 속기를 배워서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에서 두 번째로 속기와 장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성질이 불같았지만 그의 착한 성품과 큰 체구가 유일하게 그를 보호해 주었다.                    (P130-131)   

  

그의 어머니는 그를 지켜보고 그를 기다리면서 마음속에 서늘한 냉기를 느꼈다. 그가 <성공>할 것인가? 그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에는 불안의 씨앗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기대해 왔기 때문에 그가 실패한다면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다만 그가 그 자신이 되기를, 그녀가 그에게 심어준 모든 것들을 키워서 결실을 맺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서 그녀의 삶의 결실을 보고 싶어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기 영혼의 모든 힘을 바쳐서 그녀는 그가 강하고 균형이 잡힌 상태로 곧바로 정진하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목적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바른 길에서 벗어났고 그저 자기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럴 때면 그녀의 마음은 낙담과 염려로 꺼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P145)  

   

그는 가족의 모든 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식구들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면 그날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어떤 일도 어머니에게 말할 때까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는 가정이라는 부드럽고 행복하게 돌아가는 기계를 멈추게 하는 쐐기와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들어서면 갑자기 침묵이 깔리고 활력이 사라지며 자기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상태가 너무 진행되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P163-164)     


어느 화요일 아침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출발했다. 팔월이라 찌는 듯이 더웠다. 폴은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꼭 죄어온다고 느끼면서 걸어갔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든 못하든 모르는 사람 앞에 가서 이처럼 터무니없는 고통을 당하느니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갔다. 그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괴로운지 결코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는 부분적으로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연인처럼 명랑했다. 그녀는 베스트우드 역 매표소 앞에 섰고 폴은 그녀가 표를 사기 위해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오래된 검은 염소가죽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낡은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는 모습을 보자 그의 가슴은 그녀에 대한 사랑의 아픔으로 죄어들었다.         (P218-219)  

   

선생님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그가 불평을 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아니, 얘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해라.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견디어내든지.”

그리고 아서는 과거에 아버지를 사랑했고 또한 그의 아버지도 막내를 매우 아꼈지만 이제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모렐은 서서히 파멸해 가고 있었다. 예전에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아름다웠던 그의 몸은 오그라들어서 세월과 더불어 원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초라하고 비루해지는 듯이 보였다. 그에게 비열하고 하찮은 표정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비열하게 보이는 사람이 자신에게 강압적으로 말하거나 명령을 하면 아서는 화가 나서 펼펄 뛰었다. 게다가 모렐의 태도는 점점 더 나빠졌고 그의 습관은 다소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을 때 게다가 결정적인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란 사람은 그들의 영혼에 추한 자극제와 같았다. 집안에서 그의 태도는 탄광에서 광부들 사이에서 보이는 태도와 같았다.                 (P263)     


그들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길고 천장이 낮았으며 벽난로에는 큰 불두화나무 꽃다발이 있었다. 거기서 여자들은 이야기를 했고 폴은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정원에서 향꽃장대의 향내를 맡고 화초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소녀가 재빠르게 나와 울타리 가에 쌓여 있는 석탄 더미로 갔다. 

“이건 겹장미 같은데” 그가 울타리를 따라 자라난 덤불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큰 갈색 눈에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꽃이 피면 겹장미일 거야” 그가 말했다.

“난 몰라” 그녀는 더듬거렸다. “그건 가운데가 분홍색인 흰색 꽃이야.”

“그럼 그건 수줍은 소녀 장미야.”

미리엄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름답고 따뜻하게 얼굴색이 변했다.

“난 몰라” 그녀가 말했다.

“너네 정원에는 종류가 많지 않구나” 그가 말했다.

“우린 올해 이곳으로 왔어” 그녀는 쌀쌀하고 다소 거만하게 대답하고는 뒤로 물러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탐색을 계속했다. 곧 그의 어머니가 밖으로 나왔고 그들은 건물을 지나갔다. 폴은 한없이 기뻤다.               (P287-288)     


“불 좀 피워주시겠어요?”

모렐 부인은 아들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누워 있도록 하려고 애썼다. 

의사가 왔다. 폐렴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단독(丹毒)이 칼라에 긁힌 턱밑에서 시작되어 얼굴로 퍼지고 있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는 단독이 뇌에는 퍼지지 않기를 희망했다. 

모렐 부인은 자리를 잡고 간호를 시작했다. 그녀는 윌리엄을 위해 기도하고 그가 그녀를 알아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의 얼굴은 더욱 색깔이 변해갔다. 밤이 되어 그녀는 힘겹게 그를 돌보았다. 그는 헛소리를 하고, 또 헛소리를 하고 의식이 들지 않았다. 2시에 무섭게 발작을 하고 나서 그는 죽었다.               (P310)     

미리엄은 그 어머니의 딸이었다. 오후의 햇빛 속에서 어머니와 딸은 그와 함께 들판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새 둥지를 찾았다. 과수원 근처의 산울타리에 굴뚝새의 둥지가 있었다. 

“난 정말 이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어” 레이버스 부인이 말했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조심스럽게 자기 손가락을 가시 속에 있는 둥지의 둥근 문으로 넣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새의 몸 속을 느끼는 것과 비슷해요” 그가 말했다. “아주 따뜻해요. 새가 가슴으로 둥지를 눌러 그것을 컵처럼 둥글게 만든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천장을 둥글게 만드는지 궁금해요.” 두 여자에게 새 둥지는 생명을 갖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미리엄은 매일 그것을 보러 왔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가깝게 여겨졌다. 그녀 옆에서 함께 산울타리를 따라가면서 그는 조가비 모양으로 금이 튀어 만들어진 것 같은 애기똥풀을 도랑 가에서 보았다. 

“난 애기똥풀의 꽃잎이 햇빛을 받아 활짝 피어 뒤로 평평하게 넘어갈 때가 좋아. 마치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것 같아.” 폴이 말했다. 그 이후 애기똥풀은 작은 매력을 지니고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 그녀는 자연을 인격화시켜 보았고 그녀의 이러한 경향은 폴을 자극하여 사물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러고 나서 그것은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그녀는 사물을 인식했다고 느끼기 전에 그것을 상상력이나 영혼 속에서 불태울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종교적인 치열함 속에서 일상 생활과 차단되어 있었다. 이러한 치열함으로 인해 세상은 그녀에게 수녀원의 정원이나 일종의 낙원이 되었고 그 속에서 죄와 지식은 추하고 잔인한 것이 아니었다.               (P334-335)     

“그리고 사람도 중요해.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윌리엄을 봐.”

“그래” 그녀는 깊이 생각했다. 

“난 그게 소모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겠어” 그가 말했다. “소모, 그뿐이야”

“그래” 그녀가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엄은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그녀에게 생명과 같았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서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그가 말했다. “우리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그 길로 가면 문제가 없어..... 그리고 우리가 그 길 근처로 가더라도 괜찮고, 하지만 우리가 잘못 가면 우리는 죽어. 난 우리 윌리엄이 어디선가 길을 잘못 갔다고 확신해.”

“우리가 우리 삶의 길을 따라간다면 죽지 않는다고?” 그녀가 물었다.

“그래, 우린 죽지 않아. 내면적으로 어떠한 사람인가에 따라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길로 갈 수밖에 없어. 다른 길로는 못 가.”

“하지만 참된 길을 따라가고 있을 때 우리가 그걸 알 수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알지! 난 알아. 난 내가 내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아.”

“넌 안다고?” 그녀가 물었다. 

“그래....... 난 확신해.”                     (P361)     


미리엄은 매주 목요일 저녁 베스트우드의 도서관에 가는 일과를 중단했다. 봄철 내내 정기적으로 폴을 찾아가고 나서 여러 차례 사소한 사건을 겪고 그의 가족에게 작은 모욕을 당한 후 그 집 식구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달았고 더 이상 폴의 집을 방문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 그녀는 폴에게 목요일 밤마다 그를 보러 다시는 그의 집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왜?” 그가 매우 짧게 물었다.

“별일 아냐. 그냥 안 가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해.”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네가 만나고 싶으면 우린 여전히 함께 갈 수 있어.”

“널 어디서 만나?”

“어디든..... 네가 좋은 곳에서”

“난 아무 데서도 널 만나지 않을 거야. 왜 날 찾아오지 않겠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하지만 찾아오지 않겠다면 널 만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녀와 그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목요일 저녁은 없어졌다. 그 대신 그는 열심히 일했다. 모렐 부인은 이렇게 사태가 진행되는 데 대해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냈다.           (P390-39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윌리엄은 운동경기에서 트로피들을 타서 그녀에게 가져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아직도 간직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서는 잘생겼고, 적어도 훌륭한 종자였다.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러우며 아마도 결국은 잘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폴은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대단한 믿음을 가졌고 그것은 그가 자기의 능력을 인식하고 있지 않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가능성으로 넘쳤다. 그녀는 자신이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고투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모렐 부인은 전시회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폴 몰래 캐슬로 갔다. 그녀는 전시된 다른 작품들을 구경하면서 긴 전시실을 따라 어슬렁거렸다. 그래, 이 작품들이 훌륭하구나. 그러나 그것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그녀가 만족할 만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녀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매우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흠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그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깜짝 놀라 가슴이 뛰었다. 거기에 폴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자기 가슴에 새겨져 잇는 것처럼 그 그림을 알아보았다.

<성명 -- 폴 모렐 -- 일등.>                          (P413-414)   

  

“지금도” 그가 계속했다. “지금도 난 내 손을 보고 그게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 저기 저 물이 나를 바로 통과해서 흘러가지. 난 내가 저 찰랑거리는 잔물결이라고 확신해. 잔물결이 바로 나를 뚫고 흐르고 나는 그것을 뚫고 흐르지. 우리 사이에는 장벽이 없어.”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일종의 산포된 의식, 그게 내게 있는 전부야. 난 내 몸이 텅 빈 채 누워 있는 것처럼, 내가 다른 사물, 구르모가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치 사람이 아니라 사물인 것처럼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동시에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이 가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가 그만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했다. “개인적인, 육체적인 나는 버려졌어. 하지만 그렇다면 난 여기 살아 있지 않아. 그것이 날 파괴하리라는 것을 난 확신해. 네가 원하는 건 나를 살찌우고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지 유령처럼 만드는 건 아니지. 넌 내 영혼을 영혼의 칼집 속에 고이 고정시키기를 원해. 그 영혼은 칼이 느슨한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와 바다로 빠지듯이 언젠가는 빠져나올 거야.”

미리엄은 고통스럽게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들고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가 네 칼집이 될게.”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떨리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적 자아가 우리를 만들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아냐. 우리는 둘 다 정상이 아니야..... 하지만 이제 난 정상적이고 싶어하지만 넌 그렇지 않아. 넌 평범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아.”

“원해” 그녀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P434-435) 

    

[2]

브레이포드 항구에서 배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폴은 어머니에게 클라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수없이 질문을 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누구와 함께 사니?”

“블루벨 헬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대요.”

“그럼 먹고살 수는 있어?”

“그렇지 않나 봐요. 레이스 만드는 일을 한 대요.”

“그런데 그 여자의 매력은 뭐냐, 얘야?”

“매력적인지 모르겠어요. 엄마,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솔직해요..... 전혀 감추는 게 없어요. 전혀.”

“하지만 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지 않으냐.”

“그 여잔 서른이고, 전 스물셋이 돼요.”

“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드는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 반항적인 태도 때문이지.... 화난 태도 때문인지.....”

모렐 부인은 숙고했다.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녀의 몫을 남겨둘 여인과 아들이 사랑에 빠졌으니 기뻐할 일이었다. 그러나 폴은 너무나 초조해했고 너무나 갑자기 화를 냈으며 그리고는 다시 우울해졌다. 그녀는 그가 좋은 여자를 알기를 원했다. -- 그녀 자신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막연한 채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녀는 클라라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지 않았다.                  (P62-63)     

폴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전 부유한 중산층에 속하고 싶지 않아요. 전 저와 같은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요. 전 노동자 계층에 속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얘야, 너 눈물을 흘리지 않겠니. 내 자신이 어떤 신사와도 대등하다고 여기고 있잖아.”

“제 자신에 대해서 그래요.” 폴이 대답했다. “제 계층이나 교육이나 예절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아요. 제 자신속에 제가 존재해요.”

“좋다, 그렇다면 노동 계층 사람들 얘기는 왜 하니.”

“왜냐하면..... 사람들 간의 차이는 계층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죠..... 중산층에게서만 사상을 얻고 노동자 계층들로부터는..... 삶 그 자체, 따뜻함을 얻어요. 그들의 증오와 사랑을 느끼지요.”

“모두 다 좋다. 얘야....... 하지만 그러면 넌 왜 아버지 친구들에게 가서 그들과 이야기하지 않니?”

“하지만 그들은 조금 달라요.”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이 노동자 계층이야. 결국 지금 네가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울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중산층처럼 사상을 주고받는 사람들 아니냐. 나머지 노동자 계층에게 넌 관심이 없어.”

“하지만....... 삶이 있어요.”

“네가 교육받은 여자..... 말하자면 미스 머턴 같은 여자보다 미리엄으로부터 삶을 더 많이 얻는다고 난 믿지 않는다. 계층에 대해 속물 근성을 가진 사람은 바로 너야.”

그녀는 폴이 중산층으로 올라가기를 솔직하게 원했고 그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결국 숙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P92-93)  

   

폴은 자기 나이의 수많은 젊은 남자들과 마찬가지였다. 섹스가 그의 마음에 너무나 복잡한 문제가 되어 그는 클라라나 미리엄, 그 밖에 자기가 알고 있는 여자를 원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 했다. 또한 성적인 욕망은 여자에게는 속하지 않는 일종의 초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으로 미리엄을 사랑했다. 클라라를 생각하면 뜨거워졌고 그녀와 싸웠으며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클라라의 가슴과 어깨의 곡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클라라를 성적으로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영원히 부인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미리엄에게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 결혼을 한다면 미리엄과 결혼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클라라가 그것을 이해해주기 원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폴이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P130-131)     


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아는 상당히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순결의 문제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너무나 민감해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당하게 대하느니 차라리 애인 없이 영원히 살고자 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남편 때문에 꽤 난폭하게 여성적인 존엄성에 상처를 입은 여인 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 자신은 아주 소심하고 수줍었다. 그들은 여자로부터 비난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고 그들은 어머니에 대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독신의 비참함을 겪고자 했다.                   (P138)    

 

“그걸 가져야만 할 거야.” 그가  계속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오는 진정한, 진정한 불 같은 느낌 말이야. 그게 석달밖에 가지 않더라도 한번, 단 한번이라도 가질 만하지. 우리 엄마는 살아가고 발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여. 엄마에게는 메마르다는 느낌이 추호도 없어.”

“그래.” 미리엄이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처음에는 엄마가 그 진정한 것을 가졌다고 확신해. 엄마는 알아..... 그걸 경험했거든.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가 매일 만나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그걸 느낄 수 있지. 그리고 일단 그런 경험을 하면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고 성숙해져.”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미리엄이 물었다. 

“이야기하기는 매우 힘들어.....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거대하고 치열한 그런 거야. 그건 우리의 영혼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가 계속 나아가게 하고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그런데 네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 그런 것을 가졌다는 거니?”

“그래......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는 그것을 자기에게 준 데 대해 아버지에게 지금까지도 감사하게 느끼고 있어. 지금은 사이가 엄청나게 벌어졌지만.”

“그런데 클라라는 그걸 갖지 못했다고 생각해?”

“난 확신해.”

미리엄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다. 미리엄은 폴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열정의 불로 행하는 일종의 세례 같았다. 그녀는 폴이 이것을 갖기 전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남자들에게 메귀리를 뿌리는 일이 필수적이듯이 -- 어쩌면 그에게는 이것이 필수적일지 몰라. 그리고 나중에 만족하면 더 이상 불안하게 날뛰지 않고 자리를 잡고서 내게 자기의 삶을 맡길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가 가야 한다면 가서 자기가 원하는 것 -- 그가 말한 대로 거대하고 치열한 그런 것을 갖도록 내버려두자. 어쨌든 그가 그것을 가지면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 그가 그렇게 말했지. 그는 다른 것을 원할 것이며 그것을 내가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소유당하기를 원할 거야. 폴이 떠나야 한다는 것은 미리엄에게 쓰라린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위스키 한잔 마시러 주막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듯이 그가 클라라에게 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있어 -- 그것이 그의 내부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내가 소유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클라라에 대해 엄마에게 말씀드렸니?” 미리엄이 물었다. 

미리엄은 이것이 그가 클라라에게 가진 감정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폴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남자들이 쾌락을 얻으려고 창녀에게 가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중요한 것을 구하러 클라라에게 간다는 것을 알았다. 

“응” 그가 말했다. “일요일에 차를 마시러 올 거야.”

“집으로?”

“그래, 난 엄마가 클라라를 만나보기를 원해.”

“아!”

침묵이 흘렀다. 상황은 미리엄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기를 폴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비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렇게 적대적이었던 그의 식구들에게 클라라는 받아들여질까?              (P211-213)    

 

그는 무엇인가를 그녀에세 속여야 한다고 느꼈고 그것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침묵이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침묵하는 가운데 어머니에게서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에 의해 저주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때때로 그는 어머니를 미워했고 그녀의 구속을 끊어보려고 했다. 그의 삶은 그녀에게서 자유롭기를 바랐다. 마치 삶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원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고 사랑했으며 지켜주었고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그는 자유롭게 자기만의 삶을 진척시킬 수도 진정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었다. 이 무렵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어머니의 영향력에 저항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들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다.                 (P263-264)    

 

폴은 다소 자포자기하듯이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원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아니에요, 엄마. 나는 클라라를 여전히 사랑하고 과거에는 미리엄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결혼해서 나 자신을 그들에게 주는 것.....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그들에게 예속될 수가 없어요. 그들은 나를 원하는 듯이 보이는데 나는 나 자신을 그들에게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네 짝이 될 만한 여자를 만나지 못한 거겠지.”

“그런데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여자를 결코 만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아주 조용히 침묵했다. 이제 그녀는 힘을 다 써버린 듯이 다시 피곤해졌다. 

“두고 보자, 얘야.” 그녀가 대답했다.                 (P275)   

  

<어쩌면 저렇게도 작을까!>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닷가의 모래 한 알처럼 사라졌어.....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불리는 응집된 작은 알맹이이고..... 조그마한 흰 거품이고...... 이 아침의 대기 가운데 거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 그녀가 왜 내 마음을 빼앗는 것일까.>

아침의 대기는 전혀 방해받지 않았고 그녀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널리 해안과 푸른 풀이 덮인 모래언덕과 반짝이는 물이 광막하고 지속적인 고독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무엇일까?> 그는 중얼거렸다. <여기 장대하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해변의 아침이 있어. 저기에는 초조해하고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고 거품 방울처럼 일시적인 그녀가 있지. 결국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거품 방울이 바다를 의미하듯이 그녀도 무언가를 의미하겠지. 그러나 그녀는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아냐......>             (P289)     


아주 오랫동안 따뜻했던 그 방이 이제는 차가웠다. 꽃이며 약병, 접시 등 병실의 잡동사니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고 모든 것이 간소하고 엄격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발을 덮은 시트 자락이 깨긋한 눈처럼 위에서 아래로 곡선을 이루며 정적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잠자는 처녀처럼 누워 있었다. 촛불을 손에 들고 폴이 그녀에게 몸을 굽혔다. 그녀는 잠을 자면서 연인을 꿈꾸는 소녀처럼 누워 있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이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지만 마치 삶이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듯 얼굴은 어려 보였고 이마는 맑고 깨끗했다. 그는 눈썹과 약간 한쪽으로 치우친 작고 매혹적인 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젊었다. 다만 관자놀이에서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머리카락에 은색이 감돌고 있었고 두 가닥으로 단순하게 땋아서 어깨에 드리운 머리 다발은 은색과 갈색의 섬세한 세공품 같았다. 그녀는 일어날 것이다. 그녀는 눈꺼플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몸을 굽히고 그녀에게 열렬하게 키스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 닿았을 때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경악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결코 어머니를 가게 둘 수 없다고 느꼈다. 안 돼! 그는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것도 역시 차가웠다. 그는 고통에 의아해하는 듯한 말없는 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엄마 --- 엄마!”                      (P368-369)     

시간은 없고 공간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 잇었고 이제는 살아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한 장소에 있었는데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어머니가 어디 있든지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밤의 세계로 떠났고 그는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기 있어서 그의 가슴을 들판의 산울타리 계단에 기대고 목재 난간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어디 있는 것일까? -- 밀밭에 숨어 있는 하나의 밀 이삭보다도 못한 똑바로 서 있는 조그마한 하나의 살점인 자신은,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방에서 거대한 어둠의 침묵이 그를, 그 조그마한 반점을 소멸하도록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거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도 소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밤이 별들과 해를 넘어서 계속 확장되어 나갔다. 몇 개의 빛나는 미소한 낟알 같은 별들과 해는 그것들 모두를 능가하고 그들을 왜소하고 미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거기 어둠 속에서 공포에 질려 빙빙 돌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여서 무한히 작고 그 근저에 있어서는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엄마!> 그는 속삭였다. <엄마!>

어머니는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그 자신을 지탱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고 이 어둠 속에 뒤섞여 버렸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만져주고 그녀 옆에 자신을 두기를 바랐다.                   (P408-409)   

  


이전 16화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