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5

by 커피탄 리

20대 중반의 5년은 ‘구렁텅이 속에서 구더기와 함께’였다. 혹자는, 젊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오랜 정신적 아픔과 그에 따라 휘청거리는 몸의 영상을 카세트테이프처럼 가만히 돌려보고 있자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끝은 어디일까?’ ‘내 인생에 탈출구는 있는 걸까?’하는 질문들이 날마다 시곗바늘소리처럼 내 신경을 금 가게 했다. 처음 책을 펴고, 머릿속이 곳간인 양 거기에 지식들을 마구 저장할 때만 해도 내 마음대로 통제되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다. 내가 보는 책, 내가 보는 세상 속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학원이라는 둥우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책을 조금 많이 읽은 편인 그저 그런 학생일 뿐이었고, 내 뇌 망상은 내 뇌 망상으로 끝이 났다. 난, 그 시절 했던 어떤 몽상이나 가졌던 어떤 사상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병마에 세상에서 유리되어 침대에 혼자 오래 누워 있었다. 세상에 당당했던 나는 온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성도 죽었다. 기억력도, 상상력도, 집중력도, 창의력도 죽었다. 신체도 죽었다. 내게 남아 있던 것이라고는 어디로 요동 칠지 모르는 감정뿐. 세차게 휘둘리는 추같이 있더라도 꽃을 보면, 나비를 보면, 다시 물소리를 들으면 거기에 가만히 가슴과 귀를 가져다 대는, 반은 죽은 내가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지난 5년간 내가 해 온 것이라고는 책 읽고 글을 쓴 것뿐이었다. 감정뿐이 없었기에, 소설을 쓰고 시를 썼는데, 시를 더 많이 썼던 것 같다. 그 시들은 다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어떤 성취도 이뤄내지 못하고 대학들을 전전한 5년의 대가란 참혹했다. 글쓰기 말고는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약을 복용했고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었다는 것. 대학도 2번이나 자퇴했다. 심지어, 다시 돌아온 미술 전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옛 생각에 잠겨 거리를 걷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은행열매들이 길가에 구린내를 흩뿌리는 걸 보면서, 은행잎들이 떨어져서 온 거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것을 보면서, 옛날 주희를 좋아했던 시절의 감정이 떠올랐다. 몇 년 만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10년 가까이 지난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이제는 다시 잡을 수 없는 시간,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내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허무함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하고 되새기고 순간들을 품에 고정해 보려 해도, 그 순간들은, 시간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될 테니까.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알 수 있는.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알 수 있는. 나는 그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아무도 몰래, 나만 아는 시간들 속에서. 내가 헤엄칠 수 있는 강은 정해져 있었다. 난 고개를 뒤로 한 채 앞으로 조금씩 걸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눈이 내렸고, 난 눈을 맞았다. 눈을 맞으며, 눈 덮인 어느 버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 주희를 만났다. 그곳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주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옆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왔는데.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희뿌연 하늘에선 말 그대로 눈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버스가 언제 올지 몰랐으므로 난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9년 전 그때, 내가 널 만나러 5층으로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주희는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죽은 사람이라도 봤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반은 기쁨으로 반은 서글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그 애의 마음속에 내가 있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에. 그 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음속의 말을 다트처럼 톡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네 뒷모습을 봤어. 왜 그냥 갔니?”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것 같길래….”
“그 사람은 그냥 학과 선배였어. 네가 가지 않았다면…….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니?”
“너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또, 번호가 없었어…….”
“……요즘은 뭐 하고 지내?”
“여전히. 글을 쓰고 있지. 넌?”
“난 학예사 준비하고 있지.”
“대학원에 가겠네. 또 서울로 가겠지? 마산에는 왜? 집에?”
“응, 집에.”
“…….”
“…….”
“하늘이 희다. 그치?”
“응……. 희네.”
“언제 올라가?”
“내일.”

우리 사이엔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버스가 몇 대나 지나갔고, 떠드는 사람들도 우리 뒤를 지나쳤다. 나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끝내 가슴속에 오래 있던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일이 여기까지 흘렀을까? 너도 봤던 그 책 말이야. 내가 교회 장로님에게 받았다고 한 그 책. 그 책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그 책을 안 봤다면, 다음 책을 읽지도 않았을 거고, 글도 안 썼을 거고, 그럼 네가 날 쳐다보지도 않았겠지.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나는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더 작게. 그 생각은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었다.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그간 느껴온 감정의 100분의 1도 그녀는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만 오래도록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 103번 버스가 도착했다가 사라졌다. 버스 정류장엔 나만 남았다. 버스 정류장 지붕에 쌓인 눈이 한 움큼 떨어졌다. 참새가 발을 붙인 까닭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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