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이의 겨울 농담

첫 눈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by 요인영



깨질듯한 웃음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 아이는 그렇게 겨울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깊은 곳에 아이가 기억하는 세계가 있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이기전의,
지금은 사라진.

겨울은 농담처럼 사라졌다.



목에 붙어 있던 숨이 사라져 목숨을 잃은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보던 날, 눈이 내렸다.


눈은 소리 없이 내려서 내리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했고, 숨은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지도 모를 만큼 희미했다. 우리는 늘 습관처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긴다. 그러다 문득, 느낄 수 없던 것이 어떤 내밀한 말초를 건드려 감각되는 순간, 보이지 않던 세계를 만졌다는 전율이 찾아온다.


눈은 겨울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이 감춰둔 진리의 조각이다. 말없이 떨어져 내리는 흰 파편들 속에는 우리가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세계가 숨어 있다. 눈이 내리면 잠시 넋을 잃고 모든 일을 멈추게 된다. 눈을 본다는 것은, 숨겨져 있던 세계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가시화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눈은 일상에 틈을 내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소리 없이 쌓이며, 다가오는 기척 없이 존재를 드러낸다. 그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멈춰서고, 가만히 바라본다. 우리는 어쩌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은 사라지고 나면 다시 닫혀버리는 문, 닿을 수 없는 세계의 미세한 진실을 잠깐 흘려보낸다는 사실을.


그래서 겨울은 세계가 자신을 잠시 해명하는 계절이다.


눈이 내릴 때 도시는 잠시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춘다. 지나가던 사람도 발걸음을 늦추고, 자동차의 소리도 희미해진다.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둘러싼 소음을 잊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에 놓아준 얇은 막을 바라본다. 눈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쌓이는 하얀 침묵이 된다. 그 침묵은 감정의 방향을 바꾸고, 기억의 질감을 바꾼다.


눈이 내리면 숨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입김이 보이면서 숨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형태를 가지고 있었음을 천천히 깨닫는다. 가시화 되지 않는 숨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숨이 하나의 기호가 되어 공중에 떠오른다.


공기 속에 떠 있는 각자의 작은 구름들

몸에서 방출된 미세한 존재의 증거

눈은 그 숨을 잠시 붙들어두는 장치다.


사라져야 할 것들을 붙잡아두는 계절의 배려 같은 것. 차가우면서 따뜻한 마음 같은 것.


그래서 겨울에 눈이 내리면, 우리는 마음으로 무릎을 끌어안듯 잠시 웅크린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떨어지는 조각들을 세다가 문득 나도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마침내 땅으로 가라앉는다.


생각도 그렇다. 어디선가 불쑥 발치에 떨어진 생각을 주어 저 안쪽 깊은 곳에 넣어둔다. 좀 더 쌓이도록 그래서 형태를 갖춰 눈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겨울의 눈은 예기치 않게 들리는 정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만 들리는 소리.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며 살지만 눈은 그 감각을 중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여겼던 세계가 잠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진다. 눈발이 공기를 자르고 떨어지는 궤적, 그 작은 진동들이 우리를 부른다.


이 조용한 중재자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멈추는 것을 잃어버린 시대에 겨울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정지시킨다. 어쩌면 진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소리 없는 형태를 취해왔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만 존재하는 세계. 손끝에 닿지 않아도 분명히 여기 있다는 감각. 눈은 잠시나만 그 세계가 있음을 증명한다.



나와 눈을 맞춘 겨울 아이는 첫 눈이었다.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

첫사랑처럼 겨울은 잊혀지지 않아

숨이 사라질 때까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2025년 12월 4일 첫눈을 기념하며.




https://brunch.co.kr/@yoinyoung/68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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