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내 봐요.
1월에는 향일암에, 2월에는 선암사에 다녀왔다.
여수 돌산도 남쪽, 기도빨 좋은 남해안의 관음성지 기도도량으로도 유명한 향일암. 해를 향하는 암자에 오르기 전, 291개 계단을 아이들의 작은 보폭에 맞춰 걸어 올라간다.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입신출세의 길에 오르는 곳이라는 등용문을 지난다. '두 자리 숫자 셈을 하면서도 가끔 앞 머리카락을 베베 꼬는 딸아이에게 수학 머리가 생기게 해 주세요.' 빌며 지나간다. 그리고 해탈문 역할을 하는 비좁은 바위틈 사이를 통과하여 사찰에 들어선다.
향일암을 최종 목적지로 두고서 출발한 여수행은 아니었지만. 향일암이 기도 발원을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해수관음기도도량이어서 굳이 들른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바위 끝에 붙어있는 암자에서 탁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이 상쾌하고. 다도해의 섬들과 돌삼도 상록림들과 동백나무를 반가이 맞닥뜨리는 것이 올망졸망 반갑고. 그래도 명색이 향일암인데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시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여수 여행 때마다 향일암 코스를 넣지 않나 싶다.
1월의 향일암에선 승승장구하는 한 해를 기원하며 쌀 보시를 하고 집집마다 소원초를 밝히고 왔다. 알게 모르게 든든해진 마음으로 가뿐하게 내려오면서 시식용 먹거리들을 주섬주섬 먹으며 배까지 채웠다. 설탕 말고 조청으로 만들었다는 한과에서부터 알싸한 갓김치까지... 달콤해졌다가 매콤해졌다가 쌍화차로 달콤 쌉싸름하게 끝마칠 수 있는 시식 코스가 덤인! 그러면서도 소원까지 한 개 들어줄 수도 있는 최적의 코스라니.
선암사는, 여행 가기 직전에 다녀온 순천시 조계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로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이요, 우리나라 산사의 전형이라 칭송했다던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이 뭔지 알 것만 같았던 절. 오래된 나무 향을 풍기는 소박하면서도 선암사만의 무정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왔다.
향일암은 워낙 기도빨 좋은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마음에 담고 왔다면 것보다 캐주얼한 마음으로 갔던 선암사에선 "곧 떠나게 될 여행. 안전하고 행복하게 다녀오게 해 주세요." 빌었다.
선암사에서 마음속으로 빌었던 안전한 여행에 대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못 나섰던 발걸음에도 이유는 있을 거라고 위안 삼았으니. 대신 내 인생, 손에 꼽던 좋은 분께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리고 마침 눈이 많이 내려 최소한 공항에서 4-5시간 발을 동동 굴렸을 시간은 피했다며.
'건강'과 '무탈함'으로 소원이 바뀐 언젠가부터 나는 내 인생에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아등바등하던 것들도, 불안해하던 것들도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아주 조금씩. 크게 꿈꾸는 게 없으니 그럭저럭 무료하고 누군가에게 별 볼일 없을 일상도 내겐 괜찮다. 아무 일이 안 일어나는 하루, 지루해도 조용한 하루의 끝자락에 서서 감사일기를 쓰는 밤에 감사한다.
그냥 오늘! 아무 일 안 일어나면 다행이에요.
지루한 것이, 가장 고급스러운 행위인 것 같아요.
- 고현정
며칠 전, 누군가의 우울증을 고백받았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보냈다던 그 사람의 숱한 밤을 들었다.
무탈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인사할 수 있는 아침만을 꿈꾸면서 잠에 드는 나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었다.
우울증이 극심하다는 사람의 고백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론 여러 질문들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던 그날. 설득과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말하고 싶었지만 또 허벅지를 꼬집었던 그날.
나는
(선생님. 언제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내가 맛있는 밥 해줄게. 이거 빈 말 아니에요.)
밥 한 끼만 약속하고 말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우리 집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배 부른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감히' 말이다.
그러다 BYE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불현듯 떠나간 누군가의 마음과 그 마음은 같았을까, 오늘에서야 생각했다. '감히'가 맞았다.
나이 서른넷에 내가 무얼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아가는 모험을 하고 있다. 즐겁고 행복하고 싶다. 지쳐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운동을 하고 잘 먹고 푹 잘 자고 싶다
지금은 잘 먹지 못해서인지 운동도 수면도 엉망이다. 앉아있다 일어서면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에너지가 바닥났다. 하지만 괜찮다. 텅 비었으니 채울 공간이 넉넉해서… 지금은 요가움을 운영하지만 어쩌면 5년 뒤에는 카페 알바를 할 수도 있고 가사도우미를 할 수도 있다. 요가를 사랑하지만 내 마음이 가벼운 게 더 중요하다. 티칭 하는 일로 내가 괴롭다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권태기 요가강사 일기 끝.
체면 구겨질까 봐 다른 사람이 내 가치를 낮잡아 볼까 봐 억지로 척하는 거 X나 싫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고 싶은데 걱정도 싫고 동정도 싫다. 내가 그 힘을 받아서 살아내야 하는 건데 응원과 격려도 흡수가 안된다. 그냥 좀 쉬고 싶다.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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