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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5호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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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Oct 12. 2021

매듭의 상상력: 짐을 끄는 짐승들, 천 개의 파랑

[헤아리기] 편집위원 퓨

[원제목] 매듭의 상상력: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천선란 『천 개의 파랑』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 안희연, 「측량」[1] 中


들어가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그물이다. 무언가에 대해 논하는 일은 다른 모든 것을 가로지름으로써만 가능하다. 외부의 무엇도 없이 어떤 개체를 그 자체로 설명하려 들면 뻔한 동일성 명제밖에 나오지 않는다. ‘A는 A이다.’ 그렇게나 대단해 보이던, 존재론적 자립성을 지닌 ‘실체’들의 유치한 한계. 세상과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단일하고 쉬운 접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늘 다음과 같은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세상을 감싼 수많은 가닥은 순서랄 것 없이 늘어선 채 교차하고 있고, 여기서 말해질 모든 것은 끝에서 가져온 것일지도, 당연히 출발점이 되어야 했을 지점 또는 그물 한가운데 지어진 매듭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들 좋아하는 ‘결론부터’는 어떨까? 느닷없이 결말을 눈앞에 펼쳐 보인 좋은 텍스트가 하나 있었다. 나는 시작부터 대뜸 그 소설을 들이대 보려 한다. 지금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천선란의 SF 장편 『천 개의 파랑』이다. 이야기는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騎手) 콜리가 경마장 한복판에서 낙마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콜리는 일반적인 모델에는 사용되지 않는 인지와 학습 능력이 도입된 소프트웨어 칩을 우연히 갖게 된, 그럼에도 몸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아 늘 차갑고 단단한 상태로 존재하는 로봇이다. 작품 속에서 그는 경주마이자 경기 파트너인 투데이를 위해 기꺼이 경마장 바닥에 두 번이나 스스로 몸을 던지면서, 자신의 생이 끝나는 순간을 ‘기적’이라 칭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질문을 쥐고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경마라는 인간중심적 착취의 장 한가운데 선 동물과 로봇이라는 두 비인간존재의 우정에서 돌봄과 상호의존의 가치를 읽게 된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의 교차점을 논하는 도서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수나우라 테일러는 이렇게 쓴다. “우리 모두는 의존의 스펙트럼을 따라 존재한다.”(352p) 그는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을 단호히 거절하며 관계와 세계에서 의존은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하고자 했다. 어떤 존재도 혼자서 꼿꼿이 서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슬픔으로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히려 우리의 슬픈 숙명 앞에서 행복과 위안을 느낀다. 『천 개의 파랑』과 『짐을 끄는 짐승들』, 이 두 권의 책과 함께 나는 여기에 얽힌 가닥들을 들여다볼 계획이고, 마지막에 도착했을 때 그 가닥들이 다시 하나의 튼튼한 그물을 이루며 내 연결감의 지지대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다.



‘말하는’ 동물?

 나와 다른 타자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을 상상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난관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에 게을러지고, ‘인간’을 맨 앞에 내세우고는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인간들은 거리 이곳저곳의 비둘기나 길고양이를 괴롭히고 혐오한다. 또 어떤 인간들은 채팅 어플리케이션 속 여성으로 상정된 AI를 성희롱한다. 대개 이런 행위는 그 대상이 그저 인간이 아니고 생명이 아니라는 근거로 정당화되지만, 나는 그게 ‘굳이’ 자행되는 배타적 폭력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비인간이나 무생물에게 저런 행동을 하는 작자라면 언제든 인간에게도 비슷한 짓을 저지를지 몰라’ 같은, 지극히 뻔하고 또다시 인간중심적인 대응을 넘어선 비판의 언어이다.

 유별난 폭력으로 보이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비인간타자, 특히 동물을 착취하는 관습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지금의 인간 사회에서 동물성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먹거리를 찾는 건 정말로 어렵고, 인간의 안전을 위해 동물은 여전히 실험 대상이 되고 있다. 『천 개의 파랑』의 배경이 되는 경마장도 그렇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됐느냐는 콜리의 질문에 마사 관리자 민주는 당황하며 ‘재미있으니까’라는 대답을 내놓는데, 인간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이유와 그래도 된다는, 그럴 수 있다는 착각만으로 동물을 내세운 수많은 종류의 착취적 경기를 즐겨 왔다. 동물 억압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축화되었거나 인간 삶과 밀접한 영향 관계에 놓인 동물들은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테일러의 말마따나 의존은 종종 착취의 구실이 된다. 그리고 이 착취는 동물들에게 목소리가 없다는 믿음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는 영장류학자 로저 파우츠와 그에게 수어를 배운 침팬지 부이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둘의 눈물겨운 시련과 재회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여기서 부이가 ‘수어’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특별히 비판적으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소리를 통한 소통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구어주의 속에서 농인들의 수어는 오랫동안 폄하되어온 언어였다. 그런데 부이처럼 수어를 익힌 유인원들은 오히려 인간적 특징을 지닌 흔치 않은 존재로 여겨졌고, 그런 침팬지들을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일에 대중들이 강력히 항의해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례 또한 다수 존재한다. 테일러는 이 항의가 침팬지 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적 능력’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동물의 언어나 소통 능력이 어째서 그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는가?”(116p) 수어를 할 수 있든 없든 부이는 여전히 저 나름의 세계를 지닌 한 개체인데.

 언어는 오랫동안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주요한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동물의 소통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모색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언젠가부터 인터넷에 잔뜩 캡처되어 떠도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인간의 말로 번역해주는 어플리케이션 ‘미야오톡’ 같은 것들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그 존재를 알았을 때는 영 미심쩍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게 정말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어플리케이션이 맞는 거야?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던 소통 기술이 갑작스레 피부 가까이 다가오자 일단 의심의 말부터 내뱉고 본 것이다. 그러나 우려가 무색하게 미야오톡은 엄연히 인공지능 학습과 체계적인 고양이 소리 분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어플리케이션이고, 서비스를 사용해본 수의사들은 해당 번역기가 50~60%의 정확도를 보인다고 말한다.[2] 실은 그 모든 걸 떠나서 화면 너머로 고양이와 번역 기능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집사를 보고 나면 아무렴 어때, 싶은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자꾸 혼란에 휩싸인다. 납작한 스크린 속 동물의 이미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일방적 대상화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검열과 함께. 이들의 소리를 번역하는 장치는 때로는 소통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자주 소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인간동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을 이제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미야오톡 같은 기술은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들과의 교감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노력’인 걸까, 타자의 언어를 타자의 관점 그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는 나약한 우리들의 ‘인간중심적 수단’인 걸까. 우리가 번역 없이도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여기에 다른 가닥을 겹쳐 놓고 조금 더 파고들어 보자. 어떤 능력의 유무로 타자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또 다른 몹쓸 관습인 비장애중심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장애를 병리화하는 의료 모델은 의학적 개입과 치료를 통해 ‘결핍이 있는 열등한 몸’을 ‘정상적’ 범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환상을 내세우며 장애 자체가 개인의 정체성과 얽히는 양상과 그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체험을 지워왔다. 여기에 더해 인간과 동물이라는 종차를 기반으로 한 위계제는 종 내부의 차이를 구축하는 데에도 일조했고, 장애는 끊임없이 동물화되고 비인간화되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장애 권리 운동 진영에서 때로 ‘장애인은 짐승이 아니다’와 비슷한 종류의, 동물에 대한 배타적 슬로건이 내세워지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테일러는 동물에 대한 억압과 장애에 대한 억압이 비슷하고도 다른 방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짚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비인간 동물이다.

 『천 개의 파랑』에서 투데이는 콜리와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며 승승장구하지만, 몸값이 하늘로 치솟고 경기 출전 횟수가 많아지면서 관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말하자면 인간의 유희를 위해 꾸며진 환경 속에서 장애를 얻게 된 것이다. 콜리는 어느 날의 경기장 한가운데서 힘겨워하는 투데이를 위해 결정한다. 이대로 완주했다간 영영 다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투데이를 지킬 최선의 방법은 낙마를 통한 실격뿐이라고. 낙마 이후 폐기라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잔뜩 망가진 콜리의 판단은 오히려 자신을 고쳐줄 연재라는 인간과의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지만, 문제는 투데이였다. 눈앞의 경기는 피했어도 투데이에게 생긴 신체적 손상은 이전만큼 회복되기 어려웠다. 고칠 수 없는 경주마는 쓸모없는 말이 된다. 쓸모없어진 말은 퇴출당한다. 퇴출당한 말은 죽는다. 당연하고 잔인한 운명.

 의료 모델의 반대편에 자리한, 장애를 설명하는 또 다른 모델인 사회 모델은 손상(impairment)에 장애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 구조에 의해 그것이 형성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짐을 끄는 짐승들』에 따르면 이데올로기화된 장애와 비장애중심주의는 ‘죽느니만 못하다’라는 독단적 가치판단과 함께 장애동물 안락사를 정당화하거나 장애를 극복한 동물의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책에서는 혼자서 걷지 못할 만큼 작은 뒷다리를 갖고 태어나 안락사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수의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후 전용 휠체어를 이용하며 성장한 돼지 크리스 베이컨의 사례를 소개한다. 크리스가 휠체어를 타는 모습이 인터넷에 퍼지자 어떤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살게 하는’ 것은 잔인하므로 크리스를 안락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장애를 ‘이겨낸’ 크리스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이런 반응들은 일견 상충하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장애를 필요에 따라 프레임화하고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생물학적 결점이자 종내에는 제거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 낙인 자체가 진짜 장애를 만든다는 것은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장애에 대한 인식은 동물의 손상 자체도 착취적 배경에 의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숨긴다.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젖을 생산하도록 품종이 개변된 젖소. 마취 없이 부리가 절단된 닭, 칠면조, 오리. 비좁고 더러운 우리에서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거나 다리가 부러진 돼지. 무더기로 퍼지기 쉬운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감염병. 테일러가 차례로 언급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야생동물이 아닌 가축화된 동물, 공장식 축산과 산업화된 농장 한가운데의 동물들에게 장애와 낙인은 더더욱 불가피함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곧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상한 잣대로 직결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초식동물이 아니고 우리가 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것은 본성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방금 늘어놓은 몇 가지 통념들은 모두 비슷한 맥락 속에 있다. 장애를 극복과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의료 모델은 장애를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을 전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담론은 가축의 존재와 이들에 대한 인간들의 취급, 이를테면 섭취를 위한 일상적 도살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한 동물의 노동 착취, 감염병 앞에서의 대량 살처분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포장하는 데 일조했다. 테일러가 비판하는 공진화 이론은 인간이 제공하는 돌봄과 보호에 대한 대가로 동물들이 목숨과 노동을 내놓겠다고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동물의 존재가 강제적 도살이 자행되는 구조에 의존할 수밖에 만든, 그 이외의 선택지를 모두 지워버린 시스템을 숨긴다. 이런 인식 속에서 노동이나 목숨을 내놓을 가치가 없는 동물이 죽는 것은 또다시 ‘자연스럽다.’

 그러는 동안 이 동물들이 놓인 배경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지는 조금도 논의되지 않았다. 문명 이전이나 부재를 상정한 ‘자연 상태’는 사실 매우 자의적이다. 타자 존재를 완전히 도구화하고 상품화해서 인간의 관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든 기형적 구조나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끔찍한 환경의 부자연스러움은 경쟁과 발전, 자본을 향한 몰두를 옹호하는 데 쓰인 ‘자연스러움’이라는 변명 앞에서 완전히 외면당했다. 테일러에 따르면 그런 자연 상태에 대한 관념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자 인위적인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것들이 정말로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능동적으로 본성에 굴복해 살아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억압과 폭력을 인간의 이기심과 진화적 본능에 엮고 그렇게 얻어낸 결과물이 진짜 이익이자 목적이라고 믿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연스러움에 대한 현재의 사회적 구성물은 의존, 공감, 돌봄, 연대와 같은 또 다른 가치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차단해왔다.



돌봄과 의존의 관계 속에서

 테일러의 할머니는 그가 장애인[3]으로서 얻는 것 모두에 감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숲속에 그대로 남겨진다면, 그러니까 ‘자연 상태’에 놓인다면 타자의 베풂 없이는 금세 죽고 말 것이라는 논리하에서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말한다. 비장애인인 자신의 동생들 역시 도움이나 도구 없이 혼자 남겨진다면 -자신보다 조금 오래 살아남을 수야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금방 죽게 될 것이라고. 우리 모두는 때로 취약하고, 때로 다른 이들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때로는 취약한 타자에게 돌봄을 제공할 만한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엔 의존성을 구실로 끊임없이 타자화되는 범주의 존재들이 ‘정상적’이고 ‘자립적’인 자들의 일방적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모든 존재가 돌봄과 의존의 상호 관계 속에 자리해야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한 존재가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에 주목해 세상을 구성하는 그물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러운 인간, 동물, 생명 범주 같은 게 무의미하다는 사실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이를테면 경계 짓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콜리는 그저 기계일 뿐이다. 첫 번째 낙마 판단을 계기로 콜리의 몸이 잔뜩 망가졌을 때 콜리는 ‘퇴출’이나 ‘안락사’보다도 훨씬 도구적인 의미의 ‘폐기’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인지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콜리가 투데이나 민주와 같은 타자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와 관계없이 말이다. 쓸 수 없는 기계는 버리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러나 관계 한가운데의 콜리는 그저 차가운 무생물이 아니었다. 로봇 기술에 엄청난 흥미와 재능을 지닌 인간 동물 연재와의 우연한 만남은 콜리에게 삶의 2막을 열어주었다. 모아둔 돈을 털어 폐기 직전의 로봇 기수 C-27을 데려온 것도, 그에게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콜리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부품을 구해 새 다리를 만들어준 것도 연재였다. 민주와 연재를 시작으로 연재의 엄마 보경, 언니 은혜, 친구 지수, 자신을 인간처럼 대하는 이상한 자들과 함께하게 된 콜리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자신을 인간처럼 대할 때 기쁜 이유는 이들이 그 순간 자신을 옆에 실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처럼 『천 개의 파랑』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끊임없이 구분하고 규정하려 했던 생명 범주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다양한 돌봄과 의존의 장면을 그려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연결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 관용이나 배려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연재의 언니 은혜와 경주마 투데이는 특별히 의존적이라고 여겨져 온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장애인과 가축화된 동물. 소아마비로 삶의 대부분을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은혜는 장애가 요구하는 의존과 돌봄을 구실로 수많은 시혜적 시선과 원치 않는 도움을 견뎌야 했지만, 투데이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과 용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 부담스러운 손길보다 투데이와 함께 있는 순간에 느끼는 안정감이 은혜에게는 훨씬 ‘돌봄’에 가까웠던 것이다. 투데이 역시 은혜의 노력과 다른 이들의 협력으로 안락사 직전 마지막 경기 출전의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렇게 투데이를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날 은혜가 일기장에 적은 말은 두 존재의 상호의존이 얼마나 단단히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지킬 수 있다.” (190p)

 로리 그루엔은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서 인간과 동물이 맺는 관계에 대한 최근의 논의로 페미니즘 철학의 관점을 소개한다. 페미니즘 철학자들은 ‘이성’에 호소하는 전통적 논변을 거절하고 그 존재자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의 측면에서 동물의 도덕적 고려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4] 이를 받아들였을 때 동물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제기되곤 하는, 물에 인간과 개가 빠지면 당연히 인간을 구하지 않겠냐는 납작한 질문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기각될 수 있다. 송다금은 이 질문이 언제나 ‘구하는 자’의 자리에 우리를 둔다는 점에서 기만적임을 지적하며, 물에 빠진 존재가 나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은 타자인지에 따라 대답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5] 무작위의 인간과 동물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인간과 20년 동안 함께해온 개를 비교하는 일은 또 다르다. 『천 개의 파랑』 속 종을 넘나드는 관계의 그물망은 정확히 그런 사적 애정의 힘을 보여준다. 예컨대 콜리는 비슷한 질문 앞에서 목숨의 가치를 재단하거나 선택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기꺼이 자신이 물에 빠진 모든 존재를 구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투데이와 자신의 상호의존 관계에서 파생된 애정을 인정할 줄 알았다. 나는 여기서 생명이나 인간의 기준을 넘어선 훌륭한 ‘관계’의 윤리를 본다.

“저는 팀이라는 게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 투데이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저는 감정이 없지만 100마리의 말이 바다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저는 투데이를 구할 거예요. 바다에 빠진 모든 말을 결국에는 구하겠지만 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294p)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

 이들에게서 또 주목할 만한 지점은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일에서 인간의 언어만이 소통의 매개체가 아닐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콜리는 투데이가 당근을 먹을 때나 빠른 속도로 달릴 때 몸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언어적인 대화를 한 것이 아님에도 콜리는 이 떨림이 투데이가 행복해하는 신호라는 것을 직감했고, 그 박동을 오롯이 전달받는 자신의 감정에도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까, 둘은 ‘호흡’을 통해 소통하고 있었다. 사실 “몸이 공기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무언가를 흡수하고, 분해하고, 배출하는 과정”(27p)은 에너지의 축적과 전환, 소비만을 반복하는 콜리의 로봇 몸체에서 절대 불가능한 메커니즘이다. 호흡은 생명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리는 생명 범주로서의 호흡이 아닌 은유로서의 호흡, 투데이와의 파트너십이나 함께하는 순간에 느끼는 떨림 같은 것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투데이의 등에 앉아 주로를 질주할 때 자신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이 호흡하는 생명의 몸이 자동으로 부풀었다 줄어드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여기며.

 장애의 사회 모델을 기조로 삼는 도서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SF 작가 김초엽은 인간과 다른 지각 세계를 지닌 생물체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세계와 환경을 일컫는 단어 ‘움벨트(Umwelt)’에 대해 쓴다. 그는 청력 손상이라는 장애 경험을 가로질러, 다른 존재의 움벨트를 상상하는 것은 물론 같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움벨트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닿는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고유한 삶과 체험, 감각과 인지 범위를 애써 상상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탐구를 위한 적절한 장소로 SF를 꼽는다. “SF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존재들을 세계의 중심에 두는 이야기이며, 세계를 재설계하는 상상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사고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6] 그러니 『천 개의 파랑』을 통해 우리가 짐작해본 적 없거나 짐작할 수 없을 움벨트를 지닌 비인간존재들과의 성공적인 연결을 엿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움벨트에 대한 설명은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소개되는 ‘불구의 시간’과도 맞닿아 있다. 시간의 상대성과 가변성을 말하는 이 개념은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231p)과도 같다. 각자의 움벨트 속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방법과 내용은 모두 다르다. 특히 장애나 동물성은 속도와 나아감,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다른 감각을 만들고, 그런 면에서 이것들은 단지 물리적/사회적 ‘고통’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정체성이자 체험의 매개이자 몸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다. 테일러는 이렇게 쓴다.

“장애는 어떤 사람이 떠안는 정체성이기도 하고,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고, 해방을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데 활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동시에, 장애는 이 모든 것이기도 하다.” (59p)

 그걸 알았던 『천 개의 파랑』 속 존재들은 투데이의 몸이 더는 빠른 속도를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태어나서 줄곧 경마장에서 삶을 보냈던 투데이가 주로를 달리는 순간에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운 마지막 경기 전략은 느리게 달리는 것. 투데이는 주로에 서서도 뛰지 않는 연습, 다치지 않을 만큼 느긋하게 달리는 연습을 한다. 속력을 내고 싶어 할 때마다 곁에 있던 인간 친구들은 투데이를 달래며 그렇게 말한다.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느린 호흡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네 등에 타고 있는 콜리의 움직임을 함께 느끼면서…”(348p). 빠른 말이 1등을 차지하는 것이 경마장의 원칙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리게 달리는 말이 경기 도중 퇴출당하는 규정 같은 것은 없다. 경쟁과 착취, 자본에의 집착으로 가득찬 경마장이 우리네 세계의 작은 축소판이라면, 이들의 연대가 시도한 작은 변화와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349p)는 소설 속 문장이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마지막 경기 직후 투데이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경주마의 실태가 이슈로 대두되고 투데이는 목숨을 구하지만, 콜리는 이 해피엔딩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트랙을 천천히 돌던 투데이가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 것을 진동으로 느낀 콜리가 수리 과정에서 무거워진 자신의 새 몸체를 태운 채 속도를 낼 수는 없음을 깨닫고 다시금 낙마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에게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를 주로에서의 마지막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콜리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3초를 보냈다.”(354p) 세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소프트웨어 칩에 입력되어 있던 단어는 단 천 개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콜리가 되짚은 삶은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이름들과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언어를 넘어선 타자의 삶에 대한 상상력과 언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과의 연결. 말로 해명되지 않지만 얼마든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 충만한 감각을 마음에 새기며, 콜리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파랗고 눈부신 하늘을 상상해본다.



매듭을 지으며

 이 글을 쓰면서 작년의 내가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말들을 새삼 발견했다. “누군가의 불행에 기댄 행복 말고 행복에 기댄 행복을, 그런 행복을 갖고 싶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가도 가끔은 믿게 되는 순간이 있어”. 하지만 이제는 불행에 기댄 행복이야말로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사실을 안다. 미움과 배제를 통과해야만 느껴지는 행복은 전부 착각이고, 금세 불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서로를 향한 마음의 가닥이 복잡하게 짜여 완성된 『천 개의 파랑』 속 연대와 우정을 엿본 직후에는 타자의 이익이나 기쁨이 곧 나의 불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면서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고약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고 다채롭게 꾸릴 기회 하나를 놓치고 있다.

 『짐을 끄는 짐승들』의 촘촘한 통찰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본문은 끝나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이들에게 저자가 남긴 감사의 말을 마주하게 되는데, 꼬박 일곱 쪽을 넘어가는 이 마지막 파트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테일러가 나열하는 수많은 이름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그 자체로 돌봄과 상호의존이라는 책의 핵심 키워드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지점을 옮겨본다. “저의 개 베일리. 제 삶과 동물에 관한 사유에서 베일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이 책 전체에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베일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379p) 여길 읽고 나면 “종이 다른,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두 존재가”(372p) “서툴고 불완전하게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 게 꼭 행복에 기댄 행복의 구체적인 장면과도 같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그물이다. 매끈한 하나의 끈이 아니라 매듭으로 단단히 연결된 색색의 끈들을 상상해야만 이 복잡한 세상을 설명할 수 있고,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나와 얽힌 다른 모든 존재들을 가로지름으로써만 가능하다. 세상과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단일하고 쉬운 접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되짚은 지금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순서랄 것 없이 늘어선 채 교차하며 세상을 감싸는 수많은 가닥 앞에서, 나는 이제 당신이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하다.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1]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수록.

[2] 백수진, 「니야옹~ 울음소리에 앱 갖다댔더니 고양이가 말했다… “나 잘못 건드렸어”」, 『조선일보』, 2021.06.19.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6/19/ERLQH4BAOVGEROBQAEZUY5KMQY>

[3]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는 선천성 관절굽음증을 지닌 장애인 당사자이다.

[4] 로리 그루엔, 『동물의 도덕적 지위』, 전기가오리, 2020.

[5] 송다금, 「‘동물’의 난민성과 재난민화」, 『난민, 난민화되는 삶』, 갈무리, 2020.

[6] 김원영·김초엽,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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