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시울이 비친 아르노 강의 일몰
어떻게 하면 르네상스의 고도에 둥지를 틀 수 있을까..?
서울에서 하루하루는 악전고투였다. 하루에 30개씩 어떤 때는 50개씩 이탈리아어 동사 및 형용사 등 단어를 외웠다. 이런 일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그것도 모자라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탈리아어 공부는 계속됐다. 잠이 들기 전에는 이어폰을 끼고 듣는 연습을 계속했다. 자장가 대신 이탈리아어 회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꿈속에서 조차 수업이 진행되는 희한한 일이 생겼다. 숙면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에 두어 시간 눈을 부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면 부리나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하는 순간 코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입안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 속의 한 남자는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세수를 하다 말고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잠시 지혈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세수를 한 다음 식탁으로 향했다. 그동안 아내는 아침을 차리고 수업 준비를 도왔다. 아침을 먹는 동안 컴퓨터 혹은 앰프에서 이탈리아어 듣는 연습은 계속됐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보따리를 챙겨 지하철로 이동했다.
집에서부터 전철까지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듣기 연습은 계속됐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절주절 이탈리아어를 말했다. 지나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돌아보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은 "제대로 미쳤군" 하는 표정들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하철을 탈 때까지 이 같은 습관은 이어졌고 지하철 내에서는 창가에 서서 조용히 소리 내어 듣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동안 이 같은 일은 계속됐다. 그리고 어학원에 도착하면 수업이 시작됐다. 어학원에는 아들딸 또래 혹은 더 어린아이들(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수업 첫 시간에 매번 단어 시험을 쳤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또 그 후로도 계속된 단어 외우기는 선생님이 질문을 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생각나지 않았다.
학급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여러 형태로 대답을 했다. 이탈리아어의 동사 변화가 헷갈리는가 하면 엉뚱한 단어를 내놓아 교실 안은 박장대소가 이어졌다. 선생님도 따라 웃고 나 또한 배꼽을 쥐고 웃었다. 이 같은 현상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 차례..
선생님이 코 앞에서 뒷짐을 지고 내게 묻는 단어는 입에서 좔좔 달달 외웠던 단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나지 않았다. 교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를 선생님은 '어르신'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어르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늦깎이 요리 유학생의 이탈리아어 입문 과정은 주로 이랬는데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집에 바로 들르지 않았다. 집 근처 공원에 들러 이번에는 큰소리로 웅변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뜸하거나 없었기 망정이기 누군가 이 모습을 봤다면 "한 어르신 완전히 맛이 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호된 수업 과정을 통해서 이탈리아가 조금씩 눈과 귀에 입술에 익기 시작하면서 점점 재미가 더해졌다. 이 과정은 순전히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자 장차 이탈리아에 머물거나 둥지를 틀 경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만약 이 같은 과정을 소홀히 하면 준비하지 못한 만큼의 결과가 기다릴 것.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삶을 통해서 익히 체험한 바 있으므로 힘든 과정이 계속되어도 힘든 줄 몰랐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악종이야! 악종!!"
맹세컨데 나는 악종이 아니라 순종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내뱉은 무시무시한(?) 발언에 대해 기분이 언짢지 않았다. 아내의 표정도 그랬지만 아내의 말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제대로 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채찍이 되어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이탈리아어 공부에 매진했다. 덕분에 빼곡했던 이탈리아어 단어는 물론 요리조리 용어를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다.
이때부터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유튜브 채널을 찾아 요리 수업을 시작했는가 하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찾아 이탈리아의 문화를 익히기에 바빴다. 대략 이 같은 과정은 1년이 소모됐다. 외국어를 1년 동안 배워서 잘할 리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그런데 이 같은 과정이 없거나 생략됐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함께 공부하고 유학했던 젊은 친구들 다수는 유학에 실패했다.(내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학을 통해서 어깨너머로 이탈리아 요리를 흉내(기술) 낼 수는 있을지언정 이탈리아 요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 현장에서 소통이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은 몸이 단지 6개월 만에 반쪽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귀 기울여야 한다. 유학은 여행을 나선 관광객과 성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인데 외국에 처음 발을 딛는 젊은이들은 '제사보다 잿밥'에 마음이 더 가 있었던 것이랄까.
단기간에 최고의 속도를 낸 이탈리아어 공부는 언어를 전공한 나의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모름지기 외국어란 당신의 나라의 말과 다를 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달라서, 그들의 언어를 따라잡으려면 그들이 말하는 수준까지 절차를 되새겨야 함은 물론이다. 그저 취미 삼아 얼렁뚱땅 공부를 하면 얼렁뚱땅한 만큼의 외국어가 머릿속에 남을 뿐이다. 외국어는 머릿속에 남아있을 게 아니라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누군가 툭 건드려도 그 나라의 말이 입에서 툭 하고 튀어 나와야 하는 것.
영어를 10년 넘게 배워도 외국인 앞에만 서면 쫄아드는 당신의 외국어 실력은 주로 이럴 것이다. 그래서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학생들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며, 교수님께 외국어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사님은 무슨 공부든 다 그렇지만 왕도는 없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전수(?) 해 준 비결이 안 먹히면 200% 책임을 진다고 하셨다. 이랬다.
"한 단어를 천 번씩 큰 소리로 말해봐요!"
지난 11일(일요일, 현지시간) 저녁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아내와 함께 걷던 피렌체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뽄떼 베끼오까지 걸었다. 아내는 겸사겸사 다녀올 일이 생겨서 한국에 머물고 있지만 우리가 뻔질나게 다녔던 길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었던 것. 말 그대로 쌍코피 터져가며 공부한 결과 우리는 마침내 죽기 전에 살아보고 싶었던 낯선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또 일상이 너무 무료하고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파르마의 꼴로르노에서 요리 유학을 마쳤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아내와 상의한 결과였고 내가 실천에 옮긴 일이었다. 다시금 생각해 봐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피렌체에 둥지를 튼 이후 시내를 배회하면 그곳에 어린 미켈란젤로가 형들과 함께 골목을 누비는 장면이 연상됐다. 또 인간세상은 다 그런 것인지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단테(Dante Alighieri)는 신곡을 내놓고 사람들의 회개를 종용하기도 했다. 또 우피치 미술관과 빨라쪼 피티 궁전에 소장되어있던 빼곡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작품들을 보며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게 됐다.
또 두오모 곁에서 쿠폴라를 바라보고 있는 부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를 통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빼곡한 인물 가운데 세계 최초의 원근법을 도입한 마사쵸(Masaccio)가 그린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 삼위일체' 그림은, 우리가 어떤 영감을 받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세계 최초 혹은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 작품이었다. 요리 유학을 통해서 또 이곳에 둥지를 튼 다음 피렌체에 머문 시간만 2년은 족히 될 텐데 여전히 호기심이 남아 집에서 발품을 파는 즉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뽄떼 베끼오까지 도달했는데 저만치 아르노 강 위로 해가 뉘엿거리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도 아니었건만 나는 그때부터 해가 저무는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은 피렌체 현지에서 이탈리아어 인텐시보 과정을 위해 거의 매일 오가던 뽄떼 산타 트리니타(Ponte Santa Trinita)가 있는 곳. 피렌체에 명소가 아닌 곳이 없지만 이곳 또한 일몰 명소여서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이 바람도 쇨 겸 지친 몸을 일몰에 맡기는 것.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 이틀 생각해 보니 우리가 너무도 사랑한 도시로부터 멀어지면서 생긴 별리의 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현상이 어디서부터 발현되었는지 곰 되새겨 보니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 때까지 죽기 살기로 덤벼든 도전 때문이었을까. 그 힘든 노력 끝에 둥지를 튼 것인데 이 도시를 떠나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마치 목숨을 걸고 사랑한 사람과 생이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만치 멀어지는 저녁나절의 풍경 가운데 나의 눈시울이 비친 아르노 강의 일몰이 보였다. 안녕 내 사랑 미켈란젤로여 피렌체여..!!
CIAO LA CITTA' DEL MICHELANGELO
11 domenica Fiume Arno FIRE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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