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크다아. 심장이 쫄깃해지네
테두리가 붉은 오로라 단테 만년필 뚜껑을 열며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위긴 나쁘지 않았지?
-그럼요. 거룩한 방 안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겠어요
-풋, 거룩? 난 팀장이 그런 고급진 단어를 아는 줄 여태 몰랐네 그려. 헤어질 때도?
-제 신조가 헤어질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아닙니까
-그건 주현미 노래고. 국장님이 조만간 부를 거야. 이거 시립미술관 푠데 애인하고 다녀와. 그 뭐냐, 녹는 시계 그린 화가 전시회 한다더만. 난 그런 그림은 당최 모르겠어. 어휴 뭐가 그리 형이상학적이야
-없는 애인을 어디서 구해요? 편의점 컵라면도 아니고
-왜 못 구해? 국장님 같은 늙은 유부도 있는데
부장 방을 나와 5층 국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봤다. 지난주 국장이 오전 나절에 계단에서 뒹굴어 이마와 무릎에 타박상을 입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고장인 게 화근이지만 직원들은 다 아는 눈치였다. 안 그래도 그날 조례 회의 때 국장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소금에 열 달 삭힌 황석어 젓갈 같은 얼굴색에 전날 입은 셔츠와 넥타이 차림 그대로였다. 분분한 소문만 돌뿐 재벌 3세인 영화 제작자 애인이 있는 국장의 이혼불가 사유는 아무도 몰랐다. 낙상 사고로 국장이 드디어 홧김에 이혼을 결심할지도 모른다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귓속말을 하던 부장은 다음날 아침 회의에서 국장님 안전을 위해 논슬립을 재시공해야 한다며 총무팀장에게 힘을 줘서 말했다.
김명수를 만난 지 이틀 후에 부장이 국장실로 불렀다. 이마에 붙인 반창고를 감추느라 탈모가 진행된 몇 가닥 없는 앞머리를 연신 쓸어내리던 국장이 투덜댔다.
-누가 나 꼴 보기 싫다고 계단에 초 칠한 건 아니지? 그럼 역모야, 역모. 그런 조짐 보이면 발본색원해서 가만 안 둘 거야. 이 나이 먹어갖고 쫄따구들 다 보는데서. 아이고야. 당장 이 지긋지긋한 일 관두고 낚시나 하면서 살다 죽어야 하는데 이게 뭐냐고. 맨날 남 똥 싼 거나 휘휘 뒤적이고. 남들 눈에는 대단한 알토란이라도 주워 먹는 줄로 보이겠지만 다들 알잖아. 하등 쓸모가 없어요. 얼굴은 죄다 뜨다만 누룩 색깔들처럼 누리끼리해가지고는. 기껏 애써서 뭐라도 밝혀내면 윗대가리들은 봉인해! 이 지랄이고. 지들끼리 힘겨루기 싸움에 왜 신성한 내 노동을 쓰레기로 만드냐고. 일 시켜 먹으면 긍지 비스무리한 쪼가리라도 갖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새우도 살아야 할 거 아니냐고. 내가 진짜 화가 나는 건 그런 개자식들한테 복무해야 하는 삶의 처절한 딜레마이지
-저, 국장님. 제가 출장을 가야 해서 얼른 결재해주셔야 하는데요. 죄송합니다
-이봐, 팀장은 뭘 믿고 그렇게 죽어라 일해?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뭐 빠지게 충성해 봤자 이 바닥에서는 일 열심히 잘하는 놈부터 잘리는 거 알잖아? 거 왜 지난번에 재밌던 말 그거나 해보자. 서양 중세에 유명한 논쟁이었다는 거. 천사가 배꼽이 있다, 없다, 그 얘기 말야. 있어?
-있으면 인성이고, 없으면 신성이죠
또롱또롱한 눈동자를 유리구슬처럼 굴리며 눈치를 보던 부장이 말을 받았다.
-국장님, 팀장이 지금은 바쁘니까 고 얘기는 나중에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힘들어도 저희는 방패막이 돼 주시는 국장님을 믿고 일한다는 거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국장님 노고가 있는데 나라에서 그냥 있을 리가 있나요
회의 테이블에 널린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챙기던 국장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부장은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게 몇 번째야! 에이, 다 때려치고 어디 늙은 벚꽃나무 있는 강가에서 낚시나 하다가 죽으면 좋겠네. 아, 그림 좋잖아. 행복이라는 게 별거겠어. 죽을 때 좋으면 그게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지. 사는 일은 지리멸렬해도 죽을 때는 깔끔해 보이는 풍경 말이야. 떠날 때는 자신이 있던 자리나 남은 자를 위해서라도 뒤가 스마트한 게 최고야. 근데 이 모냥으로 계속 살다간 마지막 꿈도 글러버리게 생겼어
자기 자리를 찾도록 견인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에 동화되는 뜨거운 감동, 미적 감흥을 수혈해 주는 뛰어난 예술,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소통, 지적 성취감을 안겨주는 탐구, 어지간한 계층의 사람은 무시해도 사는 데 큰 불편 없거나 웬만한 물건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소유할 수 있는 경제력도 자기 자리일까? 행복이라는 피상적 개념을 구체적 개념으로 환원시켜 주는 부단한 노력을, 부단한 개선을, 부단한 진보를, 부단한 자기 계발을, 부단하고, 부단하게, 부단히 쉬지 않으면 행복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재에 빠른 부장은 주식과 부동산이, 벚꽃나무 아래 은일거사 낚시터를 소망하는 국장은 그곳이 자기 자리라고 생각할까?
내 자리는 어디일까? 여기저기 아픈 엄마는 병원을 마실 다니듯 드나들고, 집에 콕 박혀 살림 보조나 하면서 산스크리트어로 쓴 책이나 영어 원서 같은 제목만 봐도 눈이 핑핑 도는 책이나 읽는 오빠를 보면 속이 들들 보깬다. 어쩌다 통화라도 하면 이쪽 안부를 묻는 건 새까맣게 잊고 기획 전시회 성공 자랑질에 신난 여동생 목소리를 듣다 보면 신경질이 난다. 그러다가 곤히 잠자는 어린 삼남매를 깨워 앉혀놓고 신독(愼獨), 수급불류월(水急不流月), 심무괘애(心無罣碍) 같은 뜻을 모르는 말로 술주정을 읊은 아버지는 왜 번듯한 내 집하나 못 챙겨주고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는지 졸이고 졸여 쓰디쓴 농축액만 남은 탕약 같은 원망이 재탕됐다. 심약한 엄마를 등지고 스물여덟 살에 금선탈각하듯 미국으로 달아났으면 지금처럼 내 한계를 재느라고 소모적인 분투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바람이 몸을 숭숭 뚫고 지나가는 밤에는 ‘flightradar24’ 사이트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책상 서랍에 숨겨 둔 헤네시 XO를 꺼내 홀짝홀짝 마셨다. 코르티솔이 증폭한 날에는 늦은 밤 퇴근길에 동네 중학교 운동장에서 구둣발로 백 미터를 뛰었다. 구둣발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시커먼 건물을 한 바퀴 흔들고 메아리로 돌아왔다. 한바탕 몸을 들볶다 보면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18세기 런던에 사는 어떤 남자는 밤 11시와 12시 사이에 칼과 지팡이를 갖고 산책을 했다고 한다. 옛집을 떠나온 후로는 별이 환한 밤 산책은커녕 늦은 밤에 보는 희미한 달은 너무 추워 보여서 포근한 극세사 담요를 씌워주고 싶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월인천강’은 달은 하나이지만 달빛은 천 개의 강에 골고루 비친다는 뜻이라는데 도시의 달은 춥고 외롭고 슬퍼 보였다. 밤에 복잡한 생각을 떨쳐 내려고 “어둠이 그대를 괴롭히게 하지 말라. 달이 잠을 자고 있어도 밤의 별은 그대에게 빛을 내리라니”라는 시를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포탄을 맞아 온몸이 부서진 것처럼 가슴께가 욱신욱신 저미면 방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심장의 파동 따라 건반음이 미끄러지듯 스며들어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지우개로 지우는 느낌으로 Bob Acri가 연주하는 Sleep Away를 들었다. 83세에 첫 재즈음반을 낸 사람의 다독임은 무덤덤하고, 간결하며, 담백했다.
우주물리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우주는 95퍼센트의 암흑물질로 쌓여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은 태양이 가려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두울 수밖에 없는 셈이다. 밤은 문학에서 죽음, 욕망, 아름다움, 비밀, 악, 고통 등을 상징한다. 명료하게 개념을 정리하기 어려운 낱말들이지만 시끌벅적했던 낮을 차분하게 정돈하는 것도 밤이다. 고요하고 평온한 밤의 기억은 거의 다 옛집에 있다. 검푸른 밤이 융단처럼 깔리면 앞뜰 꽃나무는 알 듯 모를 듯한 검은 형체로 바뀌어 낮의 소란을 다독였다. 엄마가 대바늘로 뜬 감귤색 앙고라 잠옷을 입고 여동생과 나란히 창가에 서서 달과 별을 보던 밤에는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갈 것 같은 단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