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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석류가 그려진 스카프를 코발트색 코트 위에 두르고 나온 안숙경은 15분이나 늦었다.
-세상에나! 전화받고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언니가 맞구나! 언니, 너무 반가워.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손 좀 한번 잡아보자
안숙경 손톱에 붙인 하얗고 파란 큐빅이 실내조명에 반사돼 번쩍거렸다.
-언닌 벌써 차를 마셨네. 우리 밥 먹자. 차가 뭐야, 시시하게
점심에 팀원들하고 삼선짬뽕을 거하게 시켜 먹어서인지 오후 2시가 다 된 시간에 입맛이 당기지 않아 과일샐러드만 뒤적이면서 말문을 텄다.
-넌, 요새 미국에서 뭐 해?
-언니, 나 사업해
-어, 그렇구나. 무슨 사업인지 말해줄 수 있어?
-신약 사업이야. 노화방지에, 기미 주근깨, 검버섯을 비롯해 웬만한 주름까지 싹 해결하거든. 성장 호르몬약인데 이 성분이 나이 먹어도 계속 우리 몸에서 나오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노화가 더디고 질병이 생기는 것도 막아주고. 언니, 면역력 딸릴 때 있지? 그것도 다 성장 호르몬이 감소되어 그러는 거거든. 미국 연예인들하고 부자는 이약 다 써. 잡병에 체질개선에 갱년기까지 다 잡아. FDA에서는 8년 전에 승인이 났어요. 좀 비싸긴 한데 미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기적의 약이야. 근데 한국에서는 수입이 안 돼
-왜?
-검증이 안 됐다나 어쨌대나 수입허가를 안 해줘. 아유, 한국은 글로벌 마인드가 꽉 막혔어
-개척하려면 고생이 많겠구나
-그렇긴 한데 좋은 건 입소문으로 다 번지니까. 언니만 미리 알고 있어. 머지않아 한국에도 1호 영업점이 생길 거야. 내가 지금 그거 뚫고 있거든. 출국하기 전에 우리 또 만나요. 내가 들고 온 거 한 병 줄게. 정말 좋아. 말할 수 없이 좋아. 글루타치온이 한국에서 유행인가 본데 이건 비교자체가 안돼. 피부가 완전 애기 때로 돌아간다니까. 아침 볼일이며 부부 잠자리까지 완전 신세계야. 울 남편이 이거 먹으면서 비아그라 버렸잖아. 참, 언니 남편은 무슨 일 해? 돈 잘 벌어?
뒤채 안씨 외동딸은 애살 맞아서 남자를 잘 바꾸고, 취업도 잘하고, 좋은 물건도 잘 가졌다. 엄마는 뒤채 쪽문이 밤늦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와 밤 열한 시에 야식을 먹는 내 옆에서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거짓말을 잘해서 싫다고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발랑 까져 남자애들하고 어울린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전쟁 통에 남포에서 혈혈단신 내려와 공사판 막일을 전전하던 안씨는 밀양 출신 과부와 능허대 암굴에 살림을 차리고 갯일을 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나 전혜린을 읽으며 나무늘보처럼 뒹굴 대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막 끝나갈 무렵에 초등학생 어린 딸을 데리고 안씨네가 이사 왔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모서리 쪽이 떨어진 낡은 나무 반닫이 한 개와 이불 두어 채, 때깔이 죽은 양은그릇 몇 개, 칙칙한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길가 공사판 임시 판잣집에서 살다가 앞집 정심이네 문간방으로 옮겼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건처럼 깨끗한 걸레로 방과 마루, 문지방이며 대문까지 닦던 정심이 엄마는 안씨가 마당에 던져 놓은 그물이며 살림살이가 땟국물이 덕지덕지 끼었다고 타박이 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씨네는 우리 집으로 살림을 옮겼다. 오갈 데 없는 안씨네가 안쓰러웠던 부모님은 제기 그릇을 넣은 나무궤와 교자상에 개다리소반이며 돗자리와 병풍을 보관한 뒤채를 비우고 거저 내주다시피 세를 줬다.
장마철에 바닷가로 떠밀려온 불발탄을 만지다가 왼쪽 손목이 날아간 안씨는 쪽배를 띄워 한 손으로 그물을 쳐서 새우며 꽃게를 잡아왔다. 어떤 때는 됫병만 한 참숭어나 농어 아가미에 오른손 검지를 꿰어 우리 집 부엌 개수대에 척 놓고 갔다. 엄마는 안씨가 가져온 물고기 배를 갈라 손으로 내장을 쭉 뽑아낸 다음 나무 꼬챙이를 가로로 찔러 넣어 말렸다. 바람이 시원하고 해가 잘 드는 부엌 뒤꼍 처마 아래에서 꾸덕꾸덕 말린 물고기는 실고추와 어슷어슷 저민 마늘을 얹어 밥솥에 쪄서 상에 올렸다.
안숙경은 어촌계 조합 옆 대폿집 작부가 낳았는데 아비가 어떤 놈인지 모른다고도 하고, 무선국 옆 군부대 하사라고 했다가, 딸만 넷에 아들이 없던 서해쌀집 노사장이 아들 보려고 낳았다가 딸이라서 버렸다고도 했다. 동네에 소문이 몇 바퀴 돌고 난 후 별명이 지역 방송국인 막내 이모에게서 새로운 말이 나왔다. 안숙경의 진짜 핏줄은 어촌계 조합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한쪽 눈꺼풀이 찌그러진 애꾸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 가면 애꾸는 문 여는 소리가 천둥만큼 크게 울리는 미닫이 창고 철문에 등을 기댄 채 삐딱하게 서서 담배를 태우며 고동이나 거북손을 줍는 우리들을 히죽히죽 웃으며 쳐다봤다.
역전에 살던 막내 이모가 도토리묵 두 덩어리를 들고 와 마루 걸레질을 하던 엄마에게 들려준 내용은 이모의 능숙한 입담에 힘을 얻어 정설로 굳어졌다. 애꾸가 작부보다 열 살 가까이 나이가 많고 돈도 없어서 작부가 임신을 숨긴 채 노사장 돈을 뜯어낼 심사로 노사장 첩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애꾸가 술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출동한 경찰에게 깨진 술병을 휘둘러 한 명은 얼굴이 찢어지고 한 명은 손바닥에 유리 파편이 박혔다고 했다. 집도 절도 없는 데다가 피붙이도 없고 돈도 없던 애꾸는 교도소 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 나중에 경찰서에서 흘러나온 후일담에서 애꾸 고향이 속리산 아래 보은으로 형제가 여덟 명이나 있고, 성은 이씨이며 어렸을 때 말벌에 쏘여서 애꾸가 되었다고도 했다.
안숙경은 애 낳고 도망간 생모 대신 장정 허벅지만큼 팔뚝이 굵은 술집 여주인이 네 살 때까지 키우다가 자식이 없는 안씨가 데려왔다. 앞집 정심이 엄마는 안숙경이 동네 남자애들하고 노는 모습을 보면 지나가다가 째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부지런하기로는 인근에서 첫째가던 안씨는 술만 마시면 이북에 두고 온 처자식 이름을 대면서 몇 가지 없는 살림을 부쉈다. 안씨 부인의 서러운 울음소리와 안씨의 막돌 같은 이북 욕설이 냄비와 밥그릇 내동댕이치는 소리와 뒤섞여 안개가 내려앉은 저녁 어스름을 흩트려 놓았다.
여상에 입학하고 집을 잘 안 들어온 안숙경은 친구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어쩌다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안씨는 딸 교복을 찢는다고 가위를 꺼내며 손찌검을 해댔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안숙경은 소방서 경리로 취업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시청으로 출근했다. 안숙경이 유명 메이커 투피스를 세련되게 차려입고 가끔 집에 올 때마다 남자와 동거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냄새를 타고 골목을 휘감아 돌아다녔다. 소문이야 어떻든 안씨 내외는 시장 비서인 딸이 사 오는 소고기를 방문을 꼭 닫고 지져 먹으며 가뭄에 단비 만난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