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읽었다는 착각, 심리소설 작가의 충격과 깨달음

100일 챌린지_Day 27

by 윤소희

고함 4기 책 선정 투표에서 <죄와 벌>이 뽑혔다는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다. 30대 시절 가장 사랑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대부분을 읽고 소장했지만, 유독 이 책만 없었다. 분명히 읽었는데, 왜 없을까. 살인과 고백, 유형지로 떠나는 라스콜니코프와 그 곁의 소냐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진짜 읽었다고 믿었다. 아마 어린 시절 읽었거나, 주변에서 흘러들어온 이야기 때문일 터. 많은 이들이 고전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책장을 열고 읽는 내내, 나는 낯선 공간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의 줄거리는 말하자면 <노인과 바다>에서 상어에게 살점이 모두 뜯긴 채 앙상하게 남은 뼈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 얼마 전 내 첫 소설이 ‘심리소설’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나왔기에, 나는 <죄와 벌> 속 인물들의 내면 심리에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코드라마>를 쓸 때, 주한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성별도, 경험도 다른 인물을 이해하고 사건을 배치하는 일은 늘 벅찼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인물의 심리만으로도 얼마나 정교하고 다채로운 내면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살인 전, 살인 장면, 살인 후 고백, 벌로 떠나는 유형 생활까지 숨 고를 틈 없이 라스콜니코프의 심리 묘사가 이어진다. 작은 떨림, 죄책감의 파문, 내적 갈등이 촘촘히 직조되어 독자는 그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더욱 놀라운 점은,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이 단일한 심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죄책감과 이념적 갈등은 소냐의 순수한 구원, 마르멜라도프의 몰락과 희생, 라주미힌의 현실적 선,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파괴적 욕망과 대칭을 이루며 반사된다. 두냐는 그의 도덕적 고민과 정의감의 은유적 거울로, 포르피리는 외부 현실과 윤리적 시험으로 그의 심리를 단단하게 다듬는다. 인물들은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다. 라스콜니코프 내면의 층위와 긴장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도스토옙스키는 심리학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 이미 인간의 무의식, 죄책감, 억압, 고백 충동을 문학 속에 구현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쓰기도 전에, 그는 인간 심리를 소설로 풀어냈다. 문학은 심리학보다 먼저 내면과 심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3.png 고함 (고전 함께 읽기) 4기_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대가의 작품 앞에서, 나의 고민은 깊어진다. 나는 계속 심리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한 인물의 심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다. 사건과 주변 인물, 공간과 분위기까지 심리적 리듬에 맞춰 조형물을 만들 듯 직조해야 한다. 그것이 심리소설의 핵심이며, 문학이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정은 두렵다. 읽는 내내 라스콜니코프처럼 고뇌한다. 그럼에도 하나의 층위가 아닌 여러 층위로 구성된 인간을 이해하고, 그 모든 층위를 글로 담는 짜릿함을 놓칠 수 없다.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당분간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을 파고드는 여행에 집중해야겠다.



Weixin Image_20250814091502_406.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