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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윤재 Jul 19. 2024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하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전공은 정치외교학과이지만,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사회복지학과와 연계 전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친한 선배를 따라 행정학과에 가는 것을 고려했지만, 영어 수업을 많이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지금의 전공을 선택했다. 부모님은 예전부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많이 했는데, 영어는 ‘수학보다 싫을 정도로’ 적성에 잘 맞았다. 

  사회복지학을 배우면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많이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1학년 때는 저소득층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원론적인 강의가 많았어서 앞으로 장애인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를 기대하고 있다.

  직접적인 직업으로 삼지는 않더라도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맹학교를 다닐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다. 한국시각장애인가족협회에 들어가 일하게 된 것은 학교 선배를 통해서였다. 한국시각장애인가족협회는 서울맹학교 학부모들이 만든 협회로, 시각장애인 학습 보조, 교육환경 개선, 사회 진출 등 평생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그는 ‘시각장애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주로 협회의 여러 활동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협회 덕분에 혼자서는 만날 수 없었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협회 활동의 일환으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시각장애인 김예지 국회의원의 초대를 받고 국회에 두 번 갔다 왔다. 김예지 의원은 최근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그 출간회에 참석했던 그는 자신도 글쓰기를 열심히 연습해 스스로를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고충접수센터의 권지웅 센터장을 만나서는 장애인을 포함한 주거 취약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동산 시장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장애인편의시설을 만드는 기업인 휴먼케어의 한치영 대표와 가족협회 사이의 협약식에도 참여했다. 휴먼케어는 공공장소에 설치할 수 있는 음향신호기, 안내촉지도*뿐만 아니라, 이런 시설을 장애인이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리모컨 등도 개발했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하다.”

  협약식에서 한치영 대표가 한 이 말이 그의 뇌리에 확 꽂혔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제대로 설치하면 노약자나 유모차 이용자 등 다른 교통약자들도 편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듯이, 장애인 복지시설은 단순히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시설 이용이 불편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는 장애인을 위한 정책에는 항상 ‘장애인도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도와주세요’와 같은 말이 뒤따라오는 것이 싫었다. 장애인의 편의를 위해서는 장애인이 용기를 내야 하고, 비장애인이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장애인 전용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최근 정보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대해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좋은 점은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여러 매체를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쉽지 않았을 문자 메시지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되었고, 동영상이나 SNS도 화면해설의 발달로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 하지만 그는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빼면 영상 시청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뉴스도 사실 TV보다는 라디오를 선호한다. 화면해설이 있어도 영상 매체는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들이 다같이 보며 즐기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웃긴 ‘밈(meme)’ 영상은 무엇이 웃긴 것인지 아예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즘 들어 음식점마다 키오스크가 들어서는 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배리어 프리(barrier-free) 키오스크가 있는 곳은 거의 없고, 키오스크가 있는 경우 말로 주문을 받아주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나는 햄버거 가게에서 한 할아버지가 키오스크를 써보려고 하다가, 잘 되지 않아서 가게 직원에게 말로 주문을 받아줄 수 없냐고 물어보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직원은 “키오스크로 하셔야 해요.”라고 잘라서 말했고, 할아버지는 키오스크와 씨름을 하다가 결국 주문을 포기하고 나갔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편리한 키오스크가 누군가에게는 이전에 겪을 필요 없었던 불편을 만들고 있다.

  키오스크 화면이 보이지 않는 A 씨에게 키오스크 주문은 불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식당이나 카페를 갈 때는 혹시 키오스크 주문만 받지는 않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의 동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번에 인터뷰를 하는 김에 처음 보는 카페에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혼자 가면 턱이 얼마나 높은지, 시각장애인이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키오스크 주문만 받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들어간 카페에는 키오스크 기계가 있었다. 나는 카페 직원에게 “말로도 주문을 받으시냐”라고 물어보았고, 다행히 그렇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안심하며 앞으로는 이 카페에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키오스크처럼 기술 발전이 전에 없던 불편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기술 발전이 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의 손에 늘 있는 시각장애인 정보통신기기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기기는 텍스트 파일을 점자로 바꾸어 그가 읽을 수 있게 해준다. USB 포트도 있고 핸드폰과 연동할 수도 있어서 문자메시지도 이 기기를 활용해서 할 수 있다. 그는 이 만능 기기에 대해 설명하며 카메라 기능도 있다고 자랑을 하고는 찰칵, 나를 한 번 촬영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이 조그만 게 600만원이에요.”라고 말했다. 전액을 내고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되어서 건강보험공단에서 진행하는 장애인 보조기기 지원 사업에 당첨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계속 당첨이 안 되다가 재작년에 취소 물량이 나와 80% 정도 지원을 받아서 겨우 살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서 가족이 추가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항상 신경 쓰였다. 컴퓨터 화면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소프트웨어인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는 시각장애인이 컴퓨터를 활용하기 위해 필수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70만원을 주고 샀다. 그가 걷기 위해 꼭 필요한 흰지팡이도 비싼 것은 10만원 이상이다. 그가 어릴 때 지출한 병원비나, 시골에 맹학교가 없어 서울로 통학하며 발생한 가족의 각종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꽤 많은 액수가 될 것이다. 각종 보조기의 직접적인 비용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해주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왔으며 앞으로도 써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가 몸이 좋지 않아 미루어졌다. 처음에 감기인 것 같다고 했던 그는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는 축농증과 역류성 식도염도 함께 진단을 받고 많은 약을 타왔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여러 종류의 약을 먹어야 헸는데, 약봉지의 내용을 볼 수 없어서 전부 외워야 했다. 물론 핸드폰으로 찍어서 글씨를 쭉 읽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약봉지에 쓰여 있는 약품명과 복약안내의 모든 내용을 매번 다시 들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는 하루 중 언제 먹어야 하는지 정도라도 점자 스티커로 만들어 약이 든 비닐에 붙여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든 약통에 점자가 찍혀 나오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스티커라도 붙여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우리가 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내촉지도: 시각장애인이 건축물의 구조 및 공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건축 도면과 점자를 이용해 나타낸 안내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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