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날짜를 정하고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 난생처음 본격적인 매물 투어를 시작했다. 결혼을 위해 독립을 하는 것인지, 독립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인지 조금 헷갈릴 만큼 서른 즈음의 나에겐 내가 주도하는 공간을 의미하는 독립이 절실했다. 평생을 가족과 함께 살다가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조차도 홈스테이를 했기에 혼자만의 집이 아닌 내 방이 겨우 전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며 엄마의 잔소리에 치일 때면 집을 나갈 거라며 짐을 바리바리 쌌지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부모님 품에서 먹고 자는 것 걱정 없이 지낸 탓에 은행 잔고는 늘어났지만 그래서인지 물리적인 정신적인 독립이 나에게는 좀 더 절실했다.
나와 레오가 함께 꾸려나갈 스위트홈을 구하기 위해 매물을 보러 다니는 일은 쉽지는 않았지만 설렜다. 프리랜서인 레오 덕에 살 곳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정할 수 있었다. 친정 근처, 시댁 근처의 집들도 형식상 알아는 봤지만 맘에 드는 곳이 없었다.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을 알아보던 중 온라인 카페(당시에는 직방, 다방, 이런 앱이 없었기에 피터팬이라는 카페를 주로 살펴보고 있었다)에서 마음에 쏙 드는 하얀 집을 발견했다. 위치는 예전 평창동 직장을 다닐 때 버스로 지나다니던 곳이었는데, 5성급 호텔이 근방에 있는 한적하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동네였다. 바로 방문 예약을 하고 토요일 오전에 레오와 함께 집을 보러 갔다.
우리에 앞서 집을 보러 온 팀이 한 팀 더 있었다. 집에 사는 분은 세입자였는데, 평일에는 일을 하다 보니 주말에 시간대별로 예약을 잡아서 집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집을 볼 수 있게 되어 꼼꼼히 집을 살폈다. 다세대주택으로, 1층에 원룸이 하나, 반지하 원룸이 하나, 그리고 우리가 보는 집 총 3 가구였다. 우리가 보는 집은 1층과 2층이 연결된 하나의 집이었다. 일반 오피스텔의 복층 구조가 아닌 1층과 2층으로 집 내부에 계단이 꽤나 길게 나 있었다. 1층 공간에는 한 평은 되어 보이는 널따란 현관과 전실이 이어졌고 그 안쪽으로 주방과 세탁실로 활용 가능한 다용도실이 있었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니 작은 공간이 있었고, 복도가 이어져서 반대쪽으로 방과 거실, 화장실이 있었다. 방은 퀸사이즈 침대와 화장대가 들어가기 적당한 사이즈였고, 한쪽으로 베란다가 나 있었다. 화장실은 생각보다 협소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숲 뷰가 마음에 들었다. 거실은 창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햇살이 마구 쏟아지는 공간이었다. 2층으로도 밖에 나갈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는데, 그러면 바깥쪽 계단을 통해 1층 바깥 입구로 이동이 가능했다. 계단은 우리만 사용하는 공간이어서 이곳에 작은 텃밭상자를 두어도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집을 둘러보았다. 계단, 복도와 같이 조금은 쓸모없는 공간들이 많기는 했지만 붙박이 장도 있고 복도에 나 있는 세로로 긴 창들도 인상 깊었고 무엇보다 항상 봐 오던 익숙한 아파트 평면도가 아닌 독특한 구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레오도 마음에 들었는지 이 집으로 결정을 하고 계약하겠다고 이야기하려는 순간 통화를 마친 세입자가 우리를 슬픔에 빠트렸다. 우리에 앞서 집을 본 사람이 계약을 하기로 했다는 것.
이미 이 집을 내 집으로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나는 슬펐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또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하얀 집을 나섰다. 이왕 집을 보는 것 조금 더 다양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지역을 좀 더 넓혀서 일산의 오피스텔과 신축 빌라 등을 보러 다녔다. 사실 우리에게는 서울 강동구에 레오 명의의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결혼을 하면 그 집에 들어가 살까도 생각해 봤지만 세입자가 살고 있던 그 아파트는 계약기간이 많이 남아있었고 조만간 재건축을 할 예정이었기에 아파트 입주는 포기한 상태였다. 한정된 예산으로 우리도 전셋집을 구해야 했기에 인터넷도 찾아보고 발품도 팔며 여러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나에게는 마음에 쏙 들었던 하얀 집만 아른거릴 뿐 다른 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얀 집 세입자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혹시라도 계약이 불발되면 연락을 달라는 얘기를 하려고.
"아 혹시 계약이 그대로 진행 중이실까요?"
"아, 사정이 있으시다고 해서 계약이 취소됐어요."
"아, 정말요? 그럼 제가 계약할게요!"
"아 네, 00일에 집 앞 부동산에서 볼까요?"
"네!! 고맙습니다!!!"
꿈일까 생시일까, 그리던 집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레오에게 바로 연락을 해 이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계약금도 딱 우리 예산에 맞는 상태였기에 너무 기뻤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집 스위트홈은 이 하얀 집으로 계약을 해 살 수 있게 되었다. 신혼집으로 맞이하며 청소를 하고 가전과 가구를 들이면서 나와 레오만의 공간이 되어가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집주인의 허락으로 인테리어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안락한 우리의 공간이 된 하얀 집에서 우리는 1년 6개월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예상보다 짧게 거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름 아닌 집주인이 이 집을 업자에 판 것. 이 근방에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였는데, 함께 묶어서 빌라를 짓게 되었단다. 2년도 살지 못하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 나를 또 슬프게 만들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전세살이의 애환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해 이사를 가야 하는 그 심정은 마치 이직을 위해 자의로 퇴사하는 것이 아닌 회사에서 계약 만료 및 여타 사유로 근로를 종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면 조금 이해가 갈까?
하얀 집에서의 추억으로 동네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였을까? 우리는 이사할 집으로 하얀 집 근방을 집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얀 집 계약을 대리해 주었던 부동산에 의뢰해 집을 보러 다녔다. 처음에는 다시 전세를 알아보다가 전세살이의 애환이 싫었는지 레오가 먼저 집을 사자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인근에 12평 빌라의 1층에 매물이 나와있다고 해 함께 보러 갔다. 하얀 집보다는 작았지만 1,2층을 오르내리며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필로티 구조로 주차장이 아래에 있는 구조의 1층 집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작은 집에 방이 3개나 있고 거실 겸 주방이 길게 나 있었다. 동향으로 된 부분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주차장도 확보된 빌라를 찾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약간의 대출을 받아 이 집을 매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는 이미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었던 터라 시어머니께서 이 빌라는 며느리 명의로 하라며 레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 첫 집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내 명의로 된 집이라니. 더욱 애착이 갔다. 이 집에서는 무려 10년을 살았다. 살면서 여러 이유로 이사를 가고 싶은 순간들이 있긴 했지만 10년을 살고 이사를 나간 뒤 이 집은 또 다른 용도로 활용 중이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풀어볼게요)
조금 좁긴 했어도 희로애락이 가득한 내 명의의 작은 집, 그 추억과 함께 이 집은 평생을 함께 하고프다.